나름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겠지만 빈틈이 있었다.
"그러면 성녀님은 성지식이 풍부한가요?"
모처럼 보인 빈틈을 향한 회심의 반격이었지만
[..용사님을 위해서라면 서큐버스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얼굴을 붉히면서 저렇게 말하는 모습에 오히려 이쪽이 당했다.
순간 벙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성녀님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쪽이 궁금하네요! 이렇게 예쁘게 스타일도 좋은 여자가 평생 용사님만을 바라보며 용사님이 원하시는 모든 걸 해드린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튕기시는 거죠?!]
"윽.."
솔직히 고자가 아닌 이상 저 말만 들으면 사양할 이유가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대신 평생을 종마로 살아야 하잖아요!"
책임 없는 쾌락은 없다고 그만큼 책임도 무거웠다.
아니 이건 쾌락 뿐인 쾌락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무튼 자유를 빼앗기고 평생 씨만 뿌리면서 살아야 한다.
최근 일주일 같은 시간을 평생, 그것도 여러 명이랑 보내야 한다고?
절대 사양이었다.
[..그러면 저 혼자면요?]
-멈칫
갑자기 성녀님의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다른 여인들은 없이.. 저하고 만 평생을 지내는 것도 사양인가요?]
창 너머로 성녀님이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성녀님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
순간 내가 당황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 그리고 그쪽 세계의 여인들보다는 제가 훨씬 낫잖아요? 말해보세요! 저한테 부족한 게 있나요! 성격도 착하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가진 능력도 뒤처지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자신감 넘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만한 여인이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본인 입으로 말하니까 조금 깰 뿐이지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면 왜..!]
그리고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여기선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스승님보다 가슴이 작아요."
[...]
성녀님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0년 동안 지내면서 스승님의 무기가 얼마나 흉악한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게 보통, 아니 대부분의 여인들에게 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본 여인들 중에서도 분명 객관적으로 충분한 크기를 자랑하는 여인들은 있었다. 당아영이나 검후님이나 여소천.
그러나 직접 겪어본 입장으로서 평가하건데
스승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성녀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건 반칙이죠! 그 크기를 어떻게 이기라고요!]
물론 성녀님도 충분히 컸다. 애초에 작으면 소화가 불가능한 복장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스승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괜찮아요. 크기가 전부는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방금 용사님이 신경 쓰게 만들었잖아요?!]
"에이 농담이죠 농담."
[으으읏.. 여자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침울한 표정으로 본인의 가슴을 주무르고 계시는 성녀님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다행히 곤란했던 분위기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았고
[두, 두고 보세요! 언젠가 그 범죄자로부터 용사님의 마음을 돌리고 말 테니까! 아무리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악당들이 도망칠 때나 쓰는 대사를 하시면서 사라지셨다.
그리고 잠깐 숨을 돌리자마자
"어. 미리 와 계셨네요."
이번엔 딱히 급하게 온건 아닌지 번개에 휩싸이지 않고 평범하게 걸어와 마차에 올라타는 여소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여소천의 모습을 보자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몰골이 왜 그러세요?"
"뭐, 뭐가요?"
평상시와 다르게 얼굴에 진하게 화장을 한 상태였는데 그게 심지어 굉장히 과했다.
분은 너무 많이 칠해서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보일 정도였고 눈썹도 쓸데없이 너무 진했고..
전형적인 화장 초보가 조절을 못하고 무작정 과하게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화장하셨어요?"
"티, 티 나나요?"
"눈치를 못 채면 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수준인데요.."
"흐,흠. 모처럼 남성이랑 둘이서만 길을 떠나게 됐으니 힘 좀 줘봤어요. 따, 딱히 당신 보기 좋으라고 한 건 아닌데. 어때요? 잘 된 거 같아요?"
"..."
여소천의 반응을 보고 속으로 확신했다.
이 사람 이번이 화장이 처음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걸 설명할 수가 없었다.
'후우..'
속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수건으로 박박 문질러 닦아버리고 싶은 수준이었지만 여소천의 성격 상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분명 나중에 보복을 할 것이다.
그래서 간신히 생각해낸 방법.
"화장하는 모습은 처음 봤는데 꽤 잘하셨네요 신경 쓰신 티가 나요."
"그, 그래요?"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원래 얼굴도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화장한 모습은 조금 그러네요."
여소천에게 다가가 붉게 칠한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당신은 화장 안 한 평상시 모습이 더 예뻐요."
나름 잘 대처한 건지 여소천이 내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더니
"자, 잠깐만 기다려요! 씻고 올 테니까!"
-쌔앵!
잔상까지 남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으아아.."
그리고 드디어 다시 혼자만 남은 상황에 마차 안에 드러누워 피로를 풀면서 기지개를 폈다.
"으응.. 응.."
몸의 뻐근한 느낌이 풀리면서 약간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기지개를 핀 다음에 한숨을 내뱉으면서 마차 밖을 내다보자 아직 해가 하늘 높이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거의 정오를 가리키고 있는 해의 모습을 보자 오늘 하루 있던 일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당아영, 성녀님, 여소천. 일어난 지 몇 시간도 안돼서 만난 여자만 3명이다.
'내 주변엔 왜 이렇게 여자밖에 없는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쯤 되니까 동성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상담도 요청하고 싶었고.. 그냥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머리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닌데 이걸 남한테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머리를 굴려서 해결하려고 하니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과 지내던 시절에는 기지개도 함부로 못 폈었다.
정 기지개를 필 거면 신음 소리라도 안 나게 하라는 데 절로 나오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남자애 신음 따위 수요가 없다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그것도 이해를 못해주나 싶어서 일부러 신음을 흘렸던 기억도 있었다.
그랬더니 하는 소리가 뭐 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라고 했었던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10년 동안 함꼐한 이 세상의 유일한 가족이자 은인이었다.
산에서 뛰쳐나올 때야 그냥 드디어 지루한 산에서 나온다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나왔었는데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냥 기다릴걸 그랬나 하는 마음도 자주 들었다.
'지금 벌려진 일만 다 해치우면 그냥 산속에서 지내야지..'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멸망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성녀님은 유독 간섭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어필했었고 전에 멸망을 막기 위해서 여소천을 이용하라는 말이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어떤 행위를 하던 간섭력이 많아야 멸망을 더 쉽게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일.
"제, 제대로 다 씻고 왔어요."
-쪼륵
화장을 지우고 물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고 있는 여소천을 바라봤다.
여소천을 이용해서 더 많은 포인트를 뽑아내는 것.
그게 지금 내가 당면한 목표였다.
"그런데 화장하다가 늦으신 거에요?"
"...읏."
내가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편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여소천은 제법 늦게 온 편이었다.
덕분에 금방 끊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성녀님과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던 거고.
그래서 약간 핀잔의 감정을 담아 눈길을 보내보자 여소천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장은 처음이다 보니 시간이 점점 오래 걸려서.."
'진짜 처음이었구나.'
예상이 맞았다는 기쁨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 몰골로 화장이 처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그 전에는 그렇게 하고 돌아다닌 적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화장 안 하셔도 예뻐요. 왜 안 해도 예쁜 외모를 화장으로 감추려고 하세요."
"흐, 흥! 아부하셔도 떨어지는 건 없거든요?"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에요. 화장 안 하신 게 더 예뻐요. 그냥 본래 얼굴이."
딱히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아까의 과한 화장이 아니라 적당한 화장이었어도 이미 본판이 워낙 좋다 보니 오히려 외모를 감춘다는 느낌이 들것 같았다.
정말 예쁜 사람은 화장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랑 10년을 지냈으니까.
"아,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앞으로도 갈 길이 머니까. 빨리 출발이나 하죠."
여소천은 그렇게 말하더니 내 앞에 다가와서 앉았다.
마차가 넓은데 굳이 내 앞에 앉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질문해봤자 제대로 된 답변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던 도중
-킁킁
"...잠시만요."
여소천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거의 나한테 밀착하듯이 다가오더니
-킁킁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내 가슴팍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가만히 있어봐요. 지금 중요하니까."
자기가 무슨 개인 줄 아는 건지 내 냄새와 주변의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여소천.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 멈춰 서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다른 여자 왔었어요?"
-움찔
엄밀히 따지자면 성녀님과는 창을 통해 연락만 했을 뿐 직접 이곳에 온 적은 없었기에 다른 여자가 왔었냐는 말은 잘못된 말이었지만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몸에 소름이 돋은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멈춰선 곳이 성녀님의 모습이 나오던 창이 띄워져 있던 곳이었으니까.
"아, 아뇨? 저밖에 없었는데요?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뭔가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왠지 여자 냄새 같기도 했고요."
"아, 아마 당아영 냄새 아닐까요? 향수를 바꿨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런가?"
그녀가 그 사이에 내가 성녀님과 연락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당아영의 핑계를 댔다.
어차피 여소천도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내 몸에 당아영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뭐 하루 종일 껌딱지처럼 붙어있었을 테니 냄새가 베었어도 이상하진 않겠네요. 제 착각이었나 봐요."
"하하.. 다음부터는 좀 더 제대로 씻을게요."
"..."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마지막에 어째서인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지만 아마 따로 고민할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