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지금 얼마나 쌓여 있으려나.'
저번에 로자리오를 사면서 가진 포인트를 탈탈 턴 탓에 남아있는 포인트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시간이 꽤 지난 만큼 어느 정도 재생이 됐을 거라 생각하고 상점창을 열었다.
보나 마나 적은 양의 포인트만 간당간당히 남아 있..
"..400포인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저번에 포인트를 탈탈 턴 다음에 따로 상점창에 돈을 이용해 충전한 적도 없었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끽 해봐야 몇 포인트 정도겠지 많은 양을 넣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200포인트 전후가 한계였다.
하지만 거의 그 2배가 되는 포인트라..
'...성녀님이 뭐라도 하셨나?'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만났던 성녀님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아뇨! 전부 용사님이 노력해주신 덕분이에요!]
-깜짝!
갑작스럽게 상점창에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귀하면서도 성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미성.
"..성녀님?"
[네. 성녀 에르델 세인트리스. 용사님께 다시 인사 드립니다.]
판타지 세계의 성녀.
원래 나를 소환하려고 했던 장본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용사님! 보고 싶었어요!]
"어.. 오랜만이에요."
지직 거리는 상점창 너머로 들려오는 활발한 목소리에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여소천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건 제가 확인 했거든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주제에 저건 또 어떻게 알았나 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저번에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를 계속 지켜봤었던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마차 안에는 용사님과 저 단둘이 있다는 거죠.. 후후..]
"어차피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홱홱
[자, 잠깐만 용사님! 창 흔들지 마세요! 화면이 흔들려서 어지러우니까아!]
별 생각 없이 상점창을 들고 흔들었지만 예상 외로 나름 타격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어지러운 정도인 것 같지만.
"그래서 왜 갑자기 지금 연락하신 거에요? 여소천한테 들키면 곤란한 거 아니에요?"
[물론 그쪽 세계의 성녀와 마주치면 곤란하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그녀가 온다면 잽싸게 타이밍에 맞춰서 연결을 끊을 거니까요.]
"와.. 타이밍.."
새삼스럽지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영어였다.
나야 지구에 있었을 때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라서 이쪽 세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쓰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일일이 뜻을 설명해야 해서 불편한 점이 많았었다.
그런데 그 단어를 남의 입에서 들으니까 뭔가..
[감동적이라면 어서 저희 세계로 소환을..]
"와 덕분에 감동이 싹 날라갔어요."
[왜죠?!]
"정말 몰라서 묻는 거라면 자아 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는 거 아닐까요?"
차갑게 식은 눈으로 하얀 빛으로 물든 상점창을 바라봤다.
정말 이 여자고 저 여자고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감동적이려고 하면 바로 그 마음을 식게 만들어 버리니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으읏.. 거의 다 넘어왔었는데..]
애초에 거의 다 넘어간 것도 아니었고.
[용사님이 그렇게 경계하실수록 저는 슬프다구요? 한정된 간섭력으로 용사님을 최대한 도우려고 매일 밤을 새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제 헌신을 그렇게 의심하시면 아무리 저라도 가슴 아파요!]
나름 상점창으로 받은 게 있는 만큼 성녀님을 향한 감정은 고마움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는 건 또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저쪽에 있었으니까.
[..나쁜 건 그쪽 세계의 신이라고요. 그녀만 없었어도 용사님은 저희 세계에서 해피 라이프만 즐기고 계셨을텐데.]
"행복한 거 맞죠..?"
[그럼요! 원하는 건 다 들어 드릴 수 있다고요! 진수성찬! 산해진미! 주지육림! 남성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인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아랫도리에 물이 마를 날이 없는 인생이 대가라고 생각하면 꽤 힘들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내가 요 일주일 동안 체험해봤다.
한 명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여러명..?
-부들부들
절대 사양이었다.
쾌락이라고 무작정 좋기만 한 게 아니니까.
[흥. 이미 계약은 끝났어요. 도장까지 쾅쾅 찍었다고요.]
"그 계약서를 가져 오시던가요."
[으으.. 그때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이런 실없는 잡담은 그만하고. 그래서 왜 오셨어요? 그냥 심심해서?"
이대로면 잡담만 하다가 여소천이 올 것 같았기에 서둘러 용건을 물었다.
[아, 맞다. 흠흠. 아까 포인트가 이상할 정도로 불어나 있는 거에 의문을 품으셨었죠? 그걸 설명해 드리려고 왔어요.]
말하는 게 뭔가 미덥지 못했지만 잠자코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번에 상점창의 '포인트'가 용사님이 그 세계에서 확보한 간섭력을 가공하는 형태라고 말씀드렸었죠? 시간이 지나거나 돈을 소모하는 것으로 포인트가 늘어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어요. 하지만 간섭력을 얻는 최고로 효율이 좋은 방법은 따로 있어요. 바로 그쪽 세계의 성녀를 이용하는 것.]
"여소천을 이용.."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여소천 덕분에 간섭력이 충분히 쌓여 채널을 만들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설명하니까 이해가 갔다.
"여소천이 활동할수록 간섭력이 쌓이고.. 그 간섭력이 가공되어 포인트가 쌓이는 건가요?"
[네! 제대로 이해하셨네요!]
"아.."
내가 여소천을 만나고 약 3~4주 정도가 지났으니까 대충 편하게 한 달로 계산했을 때 한달에 200포인트를 줬다는 소리였다.
원래 대로면 30포인트밖에 못 받는 시간 동안 200포인트..
'엄청 짭짤한데?'
만약 여소천이 옆에 있었다면 바로 넙죽 엎드렸을 정도로 엄청난 수치였다.
안 그래도 1만 포인트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여소천을 이용하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요? 빨리 1만 포인트를 모으라고?"
[뭐.. 그런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어요. 간섭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거든요. '귀환'이나 '소환' 외에 꼭 필요한 일들을 할 때도 간섭력이 필요하고요.]
"필요한 일이요?"
[예를 들면.. 이런 거?]
-퐁
성녀님의 목소리가 나오는 상점창 옆으로 원래의 상점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곳에 반짝거리는 NEW! 표시와 함께 처음 보는 물건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채널에 화상 기능 추가]
[가격:400포인트]
[☆강력 추천 상품☆ 지금 바로 구매시 사은품 '성녀의 사랑' 증정]
"...뭐예요 이 당장 사라는 의도가 눈에 훤히 보이는 상품은."
가격도 딱 수중에 있는 400 포인트에 NEW! 표시와 별 모양으로 두 번이나 강조했다.
칼만 안 들었지 사라고 협박하는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에요. 저 상품을 구매하시면 용사님도 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답니다? 목소리만 나오는 히로인 역할은 이제 끝! 저도 본격적으로 용사님을 유혹할 수 있는 그런..]
"채널 끊을게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ㅇ, 왜 그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세요?]
"사도 메리트가 별로 없잖아요. 겨우 성녀님 얼굴이나 보자고 400포인트는 너무 비싸요."
[겨우 얼굴이라뇨! 제국 제일 미인! 여신님이 손수 빚어 만드신 아이라는 평가가 어릴 때부터 자자했던 저 에르델 세인트리스의 얼굴이라구요! 예전에는 제 얼굴 한번 보려고 성소 앞에 사람들이 한 달이나 모여있을..]
"아 스팸 전화네. 끊어야겠다."
[알았어요!! 잘난 척 안 할게요! 자랑 안 할 테니까!! 제발 그것 만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렸다.
"깎아줘요."
[아, 안돼요.. 저것도 최대한 우회하고 우회해서 깎을 수 있는 만큼 깎은거라니까요.. 저 아래는 정말 안돼요..]
"흠.."
손을 턱에 올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작 성녀님의 얼굴을 보는데 400포인트의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비록 여소천 덕분에 절반은 날로 먹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라면 1년이 필요한 금액이다.
그 정도의 포인트를 함부로 쓰는 건 아무래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까.. 이번만 투자해주시면 안될까요.. 앞으로도 그쪽 세계의 성녀를 이용하면 포인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수급 할 수 있어요..]
"으음.."
고민이 길어질수록 성녀님의 침울해 하는 분위기가 느껴져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구매 감사합니다 고ㄱ.. 아니 용사님!]
뭔가 다른 호칭이 들렸던 것 같지만 그걸 의식하기 전에 성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창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평소 그냥 하얀 빛만 뿜어내던 곳이 공간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아! 됐다! 보이시나요 용사님!]
창 너머로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잠깐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헤일로와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름다운 백발.
묘한 매력을 품고 있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고귀해 보이면서도 노출이 꽤 많아 보이는 복장은 절로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는 종류였다.
[후훗. 어때요? 이래도 400 포인트 값을 못하나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최상위권의 미인이었다.
스승님의 눈에 익숙해진 나로서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수준의 외모.
제국 제일의 미인이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자! 어서 더 칭찬해 주세요! 예쁘다! 사랑스럽다! 섹시하다! 어떤 칭찬이라도 저는 고맙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저기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뭐죠!]
"성녀는.. 원래 그런 복장을 입나요?"
나는 그녀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리지 않는 부분이 가린 부분보다 많다거나 그런 수준의 옷은 아니었지만 정작 중요해 보이는 부위는 전부 노출이 있었다.
어깨는 물론이고 왜 하필 아래쪽을 뚫어 놨는지 모를 가슴 부분의 복장, 그리고 옷이 트여 드러나는 허벅지까지.
가리기 위한 옷이라기 보다는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옷처럼 보였다.
여러모로 신을 모시는 성녀라는 사람이 입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는 복장.
내 질문에 성녀님이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원래는 이런 복장 안 입어요!! 맹세코 다른 남자들한테 이런 복장은 보여준 적이 없다고요?! 오직 용사님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에요!]
"..저 유혹하려고 만든 복장이에요?"
[그, 그리고 그렇게 말하시면 저는 억울하거든요?]
그 뒤에 이어진 성녀님의 억울함이 섞인 말은
[용사님이 지구에 있으셨을 때의 취향을 분석해서 직접 한땀한땀 개조한 옷이라구요..]
대체 지구에 있던 시절의 나는 뭐하던 놈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 얘기는 일단 넘어가죠."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이 정도 취향은 귀여운 수준..]
"제발 그냥 넘어가죠."
[..넵!]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성녀님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차마 내 취향대로 만들었다는 그 옷을 대놓고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저렇게 유독 특정 부위들이 돋보이는 복장이 내 취향이었다니.
'아으..'
남에 의해 흑역사가 까발려지는 기분이라 수치심이 몰려왔다.
차라리 그냥 2D 캐릭터 그림 같은 거라면 모를까 실제 사람이 입고 있는 옷 아닌가.
[부끄럽게 생각하실 필요 없다구요? 저는 용사님이 기뻐해주시면 그걸로 만족하니까!]
내 감정을 읽었는지 성녀님이 당당한 표정으로 허리를 피고 가슴을 내밀었다.
복장 덕분에 안 그래도 눈에 띄던 노출된 부위가 더 강조되면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원에서는 복장이 야하다고 해봐야 가슴골이나 허벅지가 보이거나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 정도였는데 그런 옷들만 10년 동안 봐오다가 이렇게 신문물(?)로 공격 당하니 타격이 꽤 있었다.
아무리 스승님의 외모에 익숙해져 왔다지만 이건 스승님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매력이었으니까.
[흐흠. 그쪽 세계 여자들은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잖아요? 성지식도 얕고. 그러니까 용사님도 그런 보수적인 세상 말고 어서 저희 세계로 오세요! 용사님을 향한 저희의 마음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