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50)

내 말에 당아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소저가 그렇게 울적해 하면 제가 뭐가 되겠어요. 나이도 동갑이고. 심지어 저는 신체 능력도 더 좋다는 남자인데. 전에 소저가 한 손가락으로 팔씨름에서 이겼을 때는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알아요?"

"아, 아뇨.. 그러려던 의도가 아니었.."

"뭐, 소저는 집안도 좋고 어렸을 때부터 수련 해오던 사람이고 저는 고아에 선천적으로 몸도 약한 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오히려 차이가 별로 안 나면 그게 더 불공평하지 않겠어요?"

당아영이 고개를 들은 탓에 이불에 파묻혀 있던 얼굴이 보였다.

눈가에 붉은 기운과 물기가 남아있는 게 정말 울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요. 지금 당장은 강함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거에요."

"연연하지 말라고요..?"

"네. 소저 아직 젊잖아요?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있어요. 소저의 목표가 어디까지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를 정도의 재능이면 시간만 있으면 가능할 거에요."

"...읏.."

당아영이 표정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빠서 짓는 표정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더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저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당아영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여소천한테 저를 뺏긴 것 같아서 그래요?"

"...!"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세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이 상황에서 그것도 눈치 못 채면 병신 중의 병신이었다.

애초에 당아영이 먼저 내 쪽에 그 마음을 표현한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서 여소천에게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치욕을 당했는데 저런 감정이 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이상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 사람이 입이 조금 험하고 감정도 솔직하지 못해서 그래요.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애초에 도사잖아요? 곤륜의 도사."

"...친한 사이에요?"

"친한 것 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천기 때문에 이래저래 얽히는 게 있죠. 전에 무림맹에 끌려갔던 것도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고."

-멍..

내 입장에서야 여소천이 편하게 느껴지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파의 최고 고수 중 한명. 청뢰검이기에 내가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게 잘 받아 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저도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해요. 본성이 나쁜 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솔직히 이러저러해서 피해를 많이 끼치거든요. 입도 험하고. 욕도 자주하고. 외모만 보면 신비로워 보일 수 있는데 은근 허당끼도 있어요."

"푸흡.."

"어. 웃었다."

"아하하하.."

내 위로가 먹힌 걸까

당아영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그게.. 어디 다른데 가서 청뢰검님을 그렇게 표현하면 몰매 맞아요. 감히 정파의 영웅을 그렇게 표현 하냐고."

"뭐 어때요. 제가 직접 보고 느낀 사실인데."

"푸흡.. 뭐..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당신이 없는 얘기를 꾸며내서 사람을 욕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요."

"사실 있는 얘기도 잘 못해요. 보복이 겁나서."

"하하핫.."

가볍게 웃고 있는 당아영의 모습을 보면 다행히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알았어요. 덕분에 기운이 좀 나네요. 확실히 당신이 그런 성격 나쁜 여자한테 넘어갈 것 같지는 않네요."

"뭐에요. 진짜 걱정하고 있었어요?"

"사실 가끔 그런 걱정을 해요. 당신이 저보다 능력이 좋은 다른 여자한테 넘어간다거나. 아니면 강제로 당신을 빼앗긴다거나 하는 그런 걱정을요."

-흠칫

경우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지금 그녀 외에 검후님과도 관계를 맺은 상황이었기에 완전히 당당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티를 냈다가 무슨 꼴이 될지 모르는 상황.

"그럴리가요. 제가 감히 소저를 두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마냥 붙잡아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더라고요."

"...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동안은 당신이 한눈팔지 못하게 제가 꽉 잡아두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중원은 넓고.. 언제 저보다 강하고,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가 당신을 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것 만으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제가 당신의 이상형이 될 거에요."

당아영이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연애는 서로 맞춰가는 거라고 하죠.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서로 사랑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매꿔나가는 그런 행위.. 하지만 저는 이미 있는 그대로의 당신에게 너무 만족하고 그런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저에게 맞출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맞추려고요."

당아영이 양손으로 내 볼을 붙잡았다.

"당신의 마음속 공간을 전부 저로 채우면.. 설령 아무리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나도 들어올 틈이 없겠죠? 그걸 노릴 거에요."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당당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원래 이렇게 예뻤나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하지만 바람을 허락하는 건 아니에요? 만약 바람 피우면 사천당문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중원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올 거에요."

"...그것 참 살벌하네요."

"그건 당연하죠.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신의 마음속 공간에 다른 여인을 들여야 할 때가 온다면.."

-쪽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평소 잠자리에서 당했던 무거운 사랑이 담긴 딥키스가 아닌 달콤하고 상냥한 입맞춤.

"그때 저를 놓지 말아주세요."

갑자기 그녀에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에 변화한 그녀의 사랑의 방식에 대해서 아직 뭐라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달콤한 맛 안에 쌉싸름한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에.

자신이 내 이상형이 되겠다는 말을 한 당아영은 정말 그 말을 지킬 생각인지 밤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자기만 생각하는 키 작은 난폭한 여자보다는 상냥한 여자가 더 취향이죠?]

굳이 앞에 붙은 키가 작다는 수식어 덕분에 누구를 의식하고 한 말인지 확연히 보였지만 굳이 그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당연하죠.]

[그래요. 오늘은 그냥 편하게 자죠. 내일부터 먼 길 떠나야 하는데 괜히 무리했다가 폐를 끼치면 안되니까.]

이런 대화가 오고 간 결과 당아영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기만 할 뿐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전에도 쉬게 해준다고서 다시 덮쳤던 일이 있었기에 조금 의심하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마음을 먹은 건지 내 쪽에 눈길 하나, 손길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

정말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다른 여자를 만나도 괜찮다는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이 어장 관리가 들키면 어떻게 될지 매일 졸이던 가슴은 조금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미쳤다고 좋다고 당장 검후님과의 일을 말하지는 않았다.

'눈치가 있지 어떻게 바로 말해..'

만약 밝힌다면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다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가 운이 좋아서 당아영을 어떻게든 설득한다고 해도 검후님이 문제였다.

그 고지식한 분을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당아영 쪽의 위험이 줄었다는 것도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었기에 그냥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했다.

비록 당아영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를 생각해보면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당장은 도움이 되는 변화였기에

그녀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담아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는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 * *

"잘 갔다 오세요. 밥 잘 챙겨 먹고.. 잠도 푹 자고.. 무리하게 몸도 움직이지 말고.. 만약 병에 걸리면 괜히 참지 말고 꼭 주변 의원을 찾아가서 바로 진료부터 보세요."

"알았다니까요. 누가 보면 제 엄마인 줄 알겠네."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과하게 걱정해주는 당아영에게 집 앞에서 배웅을 받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 사탕 주면서 따라오라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주변 어른한테 도움을 요청.."

"제가 무슨 애에요?!"

"그러면 술을 주면서 따라오라고 해도.."

"주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결국 그대로 한참이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더 들은 뒤에야 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또.."

"또 뭔데요?"

-짤랑

"여기 용돈이니까 그 여자한테 기죽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고 혹시 숙박할 일이 생기면 웃돈을 줘서라도 다른 방으로 쓰세요. 넉넉히 넣었어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저."

바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진지한 목소리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변한 내 태도가 우스웠는지 당아영은 피식 웃으면서 내 손 위에 돈 주머니를 올려줬고

손 끝으로도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저도 엄청 좋은 여자에요? 비록 중원에서 최고라고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 정도 외모에 이 정도의 무력. 그리고 재력까지 가지고 있는 여자는 찾기 힘들걸요?"

"당연하죠. 누가 소저한테 부족하다고 그래요. 그런 사람 있으면 나중에 한번 불러주세요. 제가 따끔하게 반박해드릴 테니까."

"푸흡.. 마음만이라도 고맙네요."

그 뒤로 소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여소천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잘 갔다와요~"

집 앞에서 웃으면서 팔을 흔들고 있는 당아영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들었다.

.

.

.

-풀썩

'여소천은 아직 안 왔나'

그녀가 준비해둔 마차 위에 올라타 짐을 내려둔 다음 올 때 시장에서 사왔던 꼬치구이를 우물거렸다.

비록 당아영이 떠나기 전 진수성찬을 차려주긴 했지만 원래 집밥과 시장 음식은 다른 법이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 칼로리 같은 것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냠냠

'옛날에는 그래도 나중에 키가 엄청 크려나 보다 했는데..'

무릎을 펴 망토에 가려진 상태로 쭉 펴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산 속에서 풀떼기만 먹었다지만 그래도 스승님이 고기도 자주 먹여 주셨는데 그 영양이 어디로 갔는지 몸도 마르고 키도 별로 자라질 않았다.

지학 쯤에서 키는 물론이고 성장 자체가 거의 멈춰서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랑 비교해도 외모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아마 이런 수상한 망토를 벗고 바깥에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미성년자로 보지 않을까.

-투덜투덜

'진짜 이런 몸으로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건지.'

막간을 이용해 또 속으로 천지신명을 향해 투덜대기 시작했다.

기껏 데려올 거면 좀 좋은 몸으로. 재능도 빵빵하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그런 몸으로 데려와 줄 것이지 이런 어린애 같은 몸이 뭐란 말인가.

차라리 내가 빙의한 뒤에 단전이 망가졌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미 망가진 상태로 빙의 당했으니 내가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근데 그렇다고 키까지 안 크는 건 너무하지.'

단전도 망가져서 무공도 못 익히지, 근골도 약하고 키도 작아서 순수한 신체 능력도 여자도 제대로 못 이길 정도로 낮지, 무력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메리트라고는 눈곱 만큼도 없는 몸이었다.

신이라는 사람이 자기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이런 몸을 줬다는 걸 생각하면 내게 악감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상점창에서 산 이 망토가 아니었다면 이 모습 그대로 노출을 하고 다녔어야 했을 거고 만만해 보일 테니 분명 시비가 자주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쫄아서 산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를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딱히 빙의 전에 쌓인 악연 같은 건 없어 보인다는 걸까.

'진짜 양심이 있지. 이런 약한 몸을 줘 놓고 악연까지 있으면..'

그땐 벌이고 뭐고 온 힘을 다해서 욕을 퍼부어줄 자신이 있었다.

종마 신세에서 구해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종마로 쥐어 짜이는 인생이랑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몸으로 발버둥 치는 거나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냥 지구에서의 삶이 백 배는 나았다.

'에휴 됐다. 괜히 향수만 생기지.'

생각해보니 그냥 산 속에서 스승님이랑 지내던 시절이 제일 나았던 것 같았다.

그때는 미친 듯이 심심하긴 했어도 살기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의 그 심심함이 그리웠다.

신경 써야 할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다 보니 당아영은 걱정이 조금 덜어지긴 했지만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언제 검후님과 당아영한테 들킬지 몰라서 전전긍긍 하면서 혹시라도 말 실수 할까 봐 말하는 거 하나하나를 의식하면서 지냈었다.

당아영과의 하루를 잘 넘긴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정말 혹시나 검후님이 우연히라도 나와 당아영의 관계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자기 전까지 계속 했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어장관리였지만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

'이제 와서 포기하기는 이미 늦어서 문제지.'

다 포기하고 산 속으로 도망쳐도 만약 멸망을 막지 못하면 그냥 이 세상 자체가 끝이었다.

"하.."

-냠

그냥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고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꼬치구이를 마저 입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당아영이 줬던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을 못했었다.

꽤 두둑했던 것 같았기에 속으로 기대하며 주머니를 열었고

"와우."

쓰기 편하게 은전이 대부분이었지만 금전도 꽤 있었다.

무려 5개.

용돈으로 주기에는 차고 넘치는 돈이었다.

상점창에 포인트로 넣어도 5포인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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