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요. 혼잣말이니까. 일단 숨이나 고르고 계세요 약골 색마."
색마라는 호칭 앞에 하나가 더 붙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거에 대해서 입을 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휴우우우.."
그 상태에서 내 숨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시답잖은 일로 그런 짓까지 해가면서 부른 거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에요."
그녀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지금 저에 대한 소문이 밖에 쫙 깔린 덕분에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잖아요. 근데 원래 소문이라는 게 더 큰 사건이 터지면 그것보다 비교적 관심도가 떨어지는 소문은 금방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서 지금 중원에 큰 거 한방을 터뜨리겠다?"
"네. 그거에요."
내 말을 들은 여소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중간에 소문을 억제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을 향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그걸 덮을 정도로 거대한 일을 터뜨리겠다고요?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요?"
"엄청 유명한 유적 같은 거면 되지 않을까요? 오래전에 죽은 고수가 남겨 놓은 기연이라거나."
"하, 확실히 관심은 꽤 많이 끌리겠지만 마냥 좋은것만은 아니에요. 그런 게 터지면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무인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싸움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유적같이 보상이 유형적인 거라면 더더욱 심할 거고요."
"음.."
그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내 소문을 묻을 정도로 크게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만 그만큼 많은 피가 흐를 거고 운이 안 좋으면 원래 없던 문파간의 갈등이 생기거나 기존의 것이 심화될 수도 있었다.
"..그건 몰랐네요."
"이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랑 대화하기가 싫다니까요.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걸 생각을 못해서 사고를 일으키질 않나. 은혜도 생각 못하고 기껏 구해줬더니 제 발로 저쪽의 음흉한 성녀에게 넘어가겠다고 하질 않나."
"..후자는 사심이 섞이지 않았나요?"
"당신이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그 여자는 입만 열면 거짓말인 음흉한 여자라니까요? 혹시라도 당신한테 말을 걸거나 하면 그냥 무시하세요. 괜히 이상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네.. 네.."
"대충 흘려듣지 말고 제대로 새겨 들으세요."
"알았어요 알았어. 애초에 농담이었어요. 저는 남은 삶을 종마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판타지쪽의 성녀님과 이쪽의 천지신명, 여소천에 대한 감정을 비교했을 때 내가 좀 더 마음이 가는 쪽은 성녀님 쪽이었다.
딱히 성녀님이 엄청 착해서 라기 보다는
'이쪽 세상에서 고생을 적당히 겪었어야지.'
이 세상에서 한 고생이 너무 많았다.
스승님을 못 만났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험한 세상이고, 내가 가진 힘은 그 정도로 약했으니까.
'심지어 천기 읽는 방법도 스승님이 알려주신 거잖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 정말 이쪽한테는 받은 게 없는 거 같은데?
성녀님한테는 상점창으로 제법 쏠쏠한 도움을 받았지만 여소천이나 천지신명한테는..
-따악!
"또, 또 건방진 생각을."
"악!"
여소천이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생각 읽는 건 반칙이에요..!"
"뭐라는 거에요. 방금 당신 표정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다 나왔었는데."
"...칫."
얼얼한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혀를 찼다.
"여러 번 말했지만 그 여자의 손길에서 구해준 것 만으로도 평생 감사하고 살아야 할 은혜니까 알아 두시길."
"씨이.."
"됐고요. 본론으로 돌아가죠. 그래서 소문을 더 큰 소문으로 덮으려고 한다고 했죠? 일단 생각해둔 거부터 다 말해 보세요. 일단 들어는 드릴 테니까."
이 이상 아무 반론도 받지 않는다는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본래 내 계획을 설명했다.
"..신투의 비고의 위치를 알아낸 다음에 그 위치를 뿌리려고 했어요. 소문 하나는 확실히 퍼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뭐라고요?"
"..소문 하나는 확실히 퍼지.."
"아니 그 전에."
정색에 가까워진 표정.
평소 나름 다채로운 표정과 대비될 정도로 차갑게 굳은 표정이었다.
"..신투의 비고요?"
그리고 내 입에서 다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그 망할 새끼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죠?"
엄청난 기운의 살기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
.
.
-툭툭툭
여소천이 팔짱은 낀 채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건드리며 고민에 잠겨있었다.
그제서야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 또한 신투에게 물건을 도둑맞은 인물 중 하나라는 걸.
'..요즘 너무 쥐어 짜이기만 해서 기억력이 안 좋아졌나.. '
진지하게 이렇게 살아도 되나 생각하던 와중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여소천은 검을 안 찾았지?'
내가 알기로는 그녀 또한 천기를 읽을 수 있을텐데 그렇다는 건 나처럼 신투의 비고에 대한 정보를 천기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검후님에게 들었던 것과 지금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 검을 굉장히 아꼈다는 말은 틀리진 않았었던 것 같고
그러면 더더욱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됐다.
'천기를 읽어서 검을 찾아왔으면 됐을텐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추측이 떠오르다가 폐기되기를 반복하며 의문이 더 심화되어가던 도중
"...하. 재밌네요."
여소천이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간신히 잊고 살았었는데 이제 와서 그 이름을 다시 들어볼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요."
"저기.. 그.."
"좋아요. 가죠. 위치를 알려주면 이동 수단은 제가 준비할게요. 하루나 이틀 뒤에 출발할 거니까 혹시 준비할 게 있다면 미리 해 놓는 게 좋을 거에요."
갑자기 같이 비고로 떠나자는 말에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원래 얘기했던 건 저희가 털자는 게 아니라 소문만 흘리자는 거였는데요?"
"안돼요. 소문을 먼저 흘리면 제가 검을 찾기 힘들어지잖아요. 소문을 흘리는 건 그 다음에 해야 해요."
"..언제는 그런 소문을 함부로 흘렸다간 큰 싸움이 일어난다고.."
"어차피 그 비고는 언젠가 세상에 풀릴 예정이었어요. 어차피 일어날 거 이용이라도 하는 게 낫겠죠."
저게 진담인 건지 자기 합리화인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또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정에 드러나네요. 오해하지 마세요.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무슨 계획이요..?"
또 이상한 변명이나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뒤에 이어진 것들은 꽤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죽다 만 시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될 구더기들을 유인할 계획이요."
처음 들어보는 비유였지만 금방 그것들이 혈교. 이 세상에 침입한 뱀파이어들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고
"정말 증오하다 못해 살아만 있다면 백 갈래로 찢어서 땅에 흩뿌려 버리고 싶은 자이지만.. 그 망할 신투가 당대. 아니, 무림 역사를 통틀어서 훔치는 것 하나는 가장 뛰어났던 도둑이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어요. 그자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우들의 애병을 가지고 잠적할 정도로 미친 자라는 것 도요."
-까드득
여소천이 이를 가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도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미친 도둑은.. 정(正)과 사(邪)를 가리지 않고 온갖 것들을 다 훔쳐 댔죠. 그리고 그가 훔친 것 중에는 당시 천마에 의해 다 휩쓸려버린 혈교의 신물도 있었고요. 그리고 망할 구더기들이 혈교에 기원을 둔 상태로 부활했다는 건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뭔지 아세요?"
"..뭔데요?"
"신투의 비고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는 장소라는 거에요. 그들의 신물이 잠들어있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무인들이 모이게 될 장소. 그 구더기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잘만 하면 그 자리에서 일망타진을 노려볼 수도 있다고요."
"오!!"
나는 여소천의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그녀의 말 대로 된다면 단번에 뱀파이어들을 몰아내고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었으니까.
그것도 스승님이 수련에서 나오시기도 전에.
"그리고 세상에 소식을 알리기 전에 먼저 가서 제 검과 혈교의 신물까지 빼돌려 놓는다면? 저는 더 강해진 힘으로 세상을 좀먹는 구더기들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거죠!"
그녀 또한 기분이 상기됐는지 두 팔을 벌리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와아아."
-짝짝짝
"..뭐죠 그 영혼 없는 박수는?"
"왠지 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아니었어요?"
"..."
마무리에 가서 분위기가 서먹해지긴 했지만 여소천과 무사히 헤어진 뒤 나는 또 다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부디 전부 잘 풀리길 바라면서.
여소천과 헤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아영이 침울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소저. 오셨어요?"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밝은 표정으로 달려나갔지만
"..."
-스륵
그녀는 말 없이 나를 지나쳐 침대에 쓰러졌다.
"..소저?"
"..."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는 걸 보면 기분이 크게 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침묵을 유지한 채로 시간이 꽤 지난 뒤
"..있잖아요.."
당아영이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둘이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같이 어딜 좀 가게 됐어요."
"어디를요..?"
"..."
나는 그녀에게 신투의 비고로 간다는 말을 해도 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아영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천당문의 여식이자 그 가주의 딸.
미래에 사천당문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기에 그녀 본인의 의사보다 가문을 먼저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됐어요. 말 못하면 안 알려줘도 돼요."
한층 더 침울해진 목소리로 얼굴을 더 이불에 파묻었다.
"..갔다 오면 알려드릴게요."
"..."
'이거 큰일 났네.'
그동안 그녀가 화난 모습은 몇 번 봤었어도 이렇게 침울해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구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로해줄 때 가슴을 만지게 해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지금은 성별이 반대지 않은가.
아무리 침대에서 역할이 거의 반대에 가깝긴 하다지만 남자가 여자한테 그걸 시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이 다시 당아영의 입이 열렸다.
"..사실 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 듣고 자랐어요. 배우는 무공마다 금방 익히고.. 독도 금방 만들고.. 주변 친척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이었고 덕분에 저 때문에 스승님에게 비교 당한다며 한탄하는 친구들도 굉장히 많았죠."
갑작스러웠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항상.. 또래 중에는 가장 뛰어났고.. 나이가 몇 살은 차이나는 오라버니나 언니들도 금방 뛰어넘었었죠. 비록 전에 열렸던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는 독과 암기를 온전히 쓸 수 없었으니까 2위에 그쳤었지만.. 쓸 수 있었으면 제가 이겼을 거에요. 확실해요. 그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인정했던 사실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녀와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울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당아영은 평소에 당당하던 모습과는 큰 거리감이 느껴졌다.
"저.. 강해요. 분명 강해요. 절정 고수가 중원에 흔한 것도 아니고 그것도 이 나이에 절정은 중원의 긴 역사에서도 그렇게 사례가 많지 않다고요. 분명 강한데.. 분명 재능은 넘치는데.."
울적한 것을 넘어서 눈물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왜.. 지금은 이렇게 약하게 느껴질까요."
평소 늘 강인해 보였던 당아영이었지만 오늘은 그 어깨가 유독 좁아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나이대에 비해서 넘치도록 강한 편이었지만 여소천에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마 당아영이 수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소천 한 명도 상대하지 못할 거다.
그만큼 당아영과 여소천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었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세상이니까.
"...소저."
"알아요. 그분이 정파 제일의 고수 중 하나라는 것도. 20년 전에 중원을 지켜낸 영웅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살아온 세월의 단위가 다른데 애초에 제가 상대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어요. 있다고요."
이제 그녀가 하는 말이 내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그 정도로 충격적인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기가 묻어 나왔다.
"...음.."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저. 소저는 충분히 강해요."
"네, 그야 그렇겠.."
"그건 제가 잘 알고 있어요. 매일 소저한테 당하면서 지내고 있으니까."
-흠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