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50)

천지신명 외에는 관심도 없으니 비고에 큰 욕심도 없을

..여차하면 천지신명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시킬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여소천을 어떻게 만나지?'

일단 대화를 나누려면 그녀와 만나야 했는데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내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무림맹에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당아영에게 부탁이라도 하면 되겠지만..

원래 늘 곤륜산 안에서만 있었다고 들었기에 지금 무림맹에 있을지, 아니면 그 사이에 돌아갔을지 알 수 없었다.

'부를 방법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내가 무슨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보고 찾아오라고 연락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여소천이 갑자기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기습적으로 찾아온다면 모를..

'..어.'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여소천이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었다.

내가 평소에 천지신명을 향해 무례한 언동을 했던 것에 대해 꾸짖으러 온 거였지.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하면..

'천지신명을 또 놀리면 알아서 찾아오겠구나!'

머리 위로 전구가 반짝 하고 켜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저번에 혼난 건 까맣게 잊은 뒤였다.

당아영과 지낸 일주일의 농도가 짙어도 너무 짙었기에 그때를 생각할 머리가 이때는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렇게 천지신명을 놀리면 여소천을 부를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를 생각해낸 뒤 처음은 가볍게 메롱으로 시작했다.

-베에

모자를 내리고 허공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로 놀려야 올지 알지 못했으니까 초반은 귀여운 정도로 시작하려는 의도였다.

'인세에 제대로 간섭도 못하는 허접♥ 제대로 챙겨주는 것도 없는 주제에 신이라고 뻐기기만 하는 허수아비♥'

[...]

'거지♥ 멋대로 끌고 왔으면 대접도 제대로 안 해주는 거렁뱅이♥ 이러다 나 저쪽 성녀님한테 의탁해 버릴지도♥'

[얘가 미쳤..]

-콰앙!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인영이 벽을 발로 부수며 나타났다.

"당신은 신을 뭐라고 생각하는겁니까아아아!!!!"

분노와 모욕감이 느껴지는 표정.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몸 주변에 파직 거리는 푸른 번개가 보일 정도였다.

"저번에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나요?! 다신 안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대체 그분이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해 주시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좋아 계획 대로다.

부르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진정 시킨 다음에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스릉

"안되겠어요. 이렇게 배은망덕한 자가 그분의 은총을 이용해 계속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모습을 감히 제가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요."

"...어."

여소천이 칼을 뽑아 들었다.

-삐질삐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살벌한 분위기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해봐야 저번처럼 볼기짝 좀 몇 번 두드려 맞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빛이 굉장히 살벌했다.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얼굴이 붉고 숨이 거칠어져 있으며 옷도 흐트러져 있고 몸 곳곳에 땀이 흐르는 게..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아예 외부와 단절을.."

"..혹시 뭐 하다가 오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화들짝!

방금 전까지 살벌한 분위기를 뿜던 그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 들고 그 자리를 당혹감이 채웠다.

"ㅁ, ㅁ, ㅁ, 뭐가요?!"

"아니 뭔가 되게 급하게 달려오신 것 같은 몰골이라.."

"그..으.. 수련하다가 왔어요! 수련! 당신이랑 다르게 저는 끝없이 정진해야 하는 무인이니까!"

"아.."

확실히 격한 수련을 하다가 급하게 달려온 몰골처럼 보였기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수련을 중요시하는 무인이 한참 수련을 하던 와중에 나 때문에 급하게 불려왔다고 생각하니 충분히 저렇게 화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급하게 달려오셨네요. 그런 중요한 일인 줄도 모르고."

"어..?"

"근데 저도 어쩔 수 없었잖아요. 밖에 소문이 쫙 깔려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그쪽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제가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이거 말고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어떻게 해요. 제가 따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아니잖아요."

"그..렇죠?"

"제가 이렇게 된 원인도 그쪽한테 있고요."

"그..렇긴 한데.."

여소천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이게 맞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니까 책임 지셔야죠."

"네?!"

속으로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채, 책임이요?"

"네. 안 지실 생각이에요?"

"어.. 그야 전에 당신이 책임 질 필요는 없다고.."

'...?'

순간 여소천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못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책임 질 필요 없다는 말을 했었다니. 대체 언제..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하긴 했었었다.

"다, 당신이 이제라도 괜찮다면 상관 없겠죠. 그러면 우선.."

내가 그녀의 오해를 정정하기도 전에 그녀가 검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오세요. 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깜짝

명백히 당아영을 부르는 행위에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그곳에 당아영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꿀꺽

여소천에게 지목당한 당아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여소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소천은 당아영을 보면서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나요? 그를 해칠 생각은 없다고. 근데 그 건방진 표정은 뭐죠?"

"..."

"그를 아끼는 마음은 알겠지만 까마득한 선배로서 충고하는 건데 무인이라면 상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에 대해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검후만큼 마음이 넓지 않아요?"

-움찔!

어딘가 낮아진 여소천의 목소리에 당아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

-꽈악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아영이 조심스럽게 돌린 눈이 나와 마주쳤을 때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내 모습을 본 뒤 당아영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멋대로 집을 부수고 침입한 여소천 쪽이 가해자였지만 원래 무인들의 세상에서 선과 악은 힘과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법.

여소천이 먼저 집을 부쉈어도 까마득한 선배인 여소천에게 살기를 드러낸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쪽이었다.

다행히 당아영의 사과가 마음에 든 것일까

"흐흠. 뭐, 고개까지 숙일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당신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한 상황이니까. 제가 먼저 잘못한 게 맞죠."

"..아닙니다."

"수리비는 나중에 보내드릴게요. 근데 지금은 그와 대화를 나눠봐야 하니 잠깐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요?"

"쓰지 않는 방이 많으니 아무거나 골라서 쓰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잠시 물러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딱딱한 말투의 당아영이 사라진 뒤 나는 여소천을 바라봤다.

"자, 봤어요? 저 당가의 계집이 저한테 찍소리도 못하는 모습을?"

"그렇게 까지 해야 했어요?"

"흐흠. 그야 일반인인 당신 관점에서는 제가 너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무인들의 세계는 냉혹해요? 그녀도 그녀의 나이대에서는 충분히 천재라고 불릴만한 실력이지만 중원에 그녀보다 더한 고수는 차고 넘치니까요."

"...그래도."

"뭐, 이것도 나름 귀중한 경험이에요. 저 정도 재능이면 조금만 자극해줘도 금방 성장하겠죠. 원래 무인의 성장에 적절한 원동력은 날개를 달아주는 법이니까. 아마 그녀한테도 좋은 경험일걸요?"

'아닌 거 같은데.'

나한테는 그냥 NTR의 한 장면으로 보였다.

내가 그 대상이 됐다는 게 기분이 참 묘하긴 했지만.

"그, 그래서 왜 부른 거죠? 그 책임.. 때문인가요? 비, 비록 당신한테 제가 아깝지만 저도 잘못한 건 있으니까 그 보답이라고 생각하죠."

나중에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소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책임이 아니라 소문을 퍼트린 거에 대한 책임이요."

"..."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 원래 소문은 더 거대한 소문으로 덮.."

-스릉!

"아무래도 보니까 잘라야 할 건 사지가 아니라 당신의 입인 거 같네요. 그 잘난 주둥아리를 없애버리면 다시는 그런 말도 못하겠죠?"

"자, 자, 잠깐만요! 일단 진정 좀!"

"시끄러워요 이 색마!!"

진짜로 검을 들고 달려오는 여소천을 진정 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 *

화산파 깊숙한 곳 검후의 거처.

"부르셨습니까?"

검후는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을 향해 등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행을 다니던 도중 혈교의 잔당들과 격돌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비겁한 수를 많이 쓰던 놈들 답게 독을 쓰는 자들도 많았지. 그중에는 춘약과 미약을 이용해 덤벼오던 자들도 있더군."

"그런..!"

여인 또한 화산에서 자라며 그 가름침을 받은 몸.

정당한 사랑을 통한 것도 아닌 인위적인 수를 통해 색욕을 불러 일으키는 짓은 그녀에게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물론 내 경지가 경지인 만큼 웬만한 독은 기를 통해 억누를 수 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나. 미리 해독제들을 구해다 줬으면 좋겠네. 그런 감정이 들지 않게 막는 약이라던가."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여인은 검후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검후. 정파의 영웅이었으니까.

설마 그녀가 평소에 쓰기 위해 약을 요구할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제 잘못이죠. 당신이 그런 인간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여소천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들부들

"저기 그러면 이제 손 좀.."

"똑바로 안 들어요?!"

-움찔

나는 몸을 떨면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부들부들부들

그녀의 고함에 깜짝 놀라 번쩍 들긴 했지만 이미 내 가느다란 팔은 한계를 맞이한 상태.

금방 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이익.."

나름 인상까지 써가면서 버텼지만 결국 한계가 다가왔고

"하아.. 됐어요. 그냥 내리세요."

-털썩

"헤엑.. 헥.."

여소천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팔을 내리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에 미약하지만 경멸이 섞인 것 같았다.

"정말.. 대체 그분은 왜 이런 자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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