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50)

"오.."

당아영은 아빠를 통해 그의 활약상을 들으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야하기만 한 게 아니라 능력까지 좋다니. 정말 남편감으로서는 최고였다.

'같이 다닌 게 검후님이었나?'

그가 내게 일행이 남성이었다고 말했지만 뒷조사를 했었을 때 일행이 여자라는 것 까지는 확인을 한 상태였다.

거짓말을 한 게 괘씸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다 큰 남녀 둘이서 여행을 다녔다는 것만 보면 온갖 불안한 상상이 들기는 했지만

'검후님이면 믿을 만 하지.'

상대가 무려 검후님이니 그런 불안한 상상도 쏙 들어갔다.

정파인에게 검후라는 이름은 그 정도의 위치였다.

감히 무례한 상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이름.

그게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그녀를 향한 인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얼마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들었지. 혹시 그의 도움이.."

"그건 딱히 없었어요."

"..그랬나?"

"네.. 그의 능력의 도움이라기보다는.."

당아영은 당시의 자신을 떠올렸었다.

이미 그의 몸에 유혹되어 빠진 이후에 그가 여행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혼자 남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가는 성욕을 다스리기 위해 수련에 맹진 했었고..

"...다른 방향으로 도움을 줬었죠."

결과적으로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왠지 경지가 올라선 이후에 전보다 더 성욕이 늘어난 느낌이었지만.

"아, 알았어요. 일단 제가 수습해보긴 해볼게요. 이미 늦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여소천을 닦달해 조금이라도 손을 써두고 덜덜 떨면서 무림맹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에 소문이 퍼졌을지도 몰라서 그냥 얌전히 당아영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밤에도 기대한다는 말이 여러모로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 같았다.

여소천의 말대로 당아영의 곁은 안전이 꽤 보장된 장소였으니까.

-똑똑

"소, 소저.. 저 왔.."

-화악!

노크를 하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당아영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쾅!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안에 들어온 상태로 문이 굳게 닫혔다.

-철컥!

문의 잠금 장치가 잠기는 것까지 내 눈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다행히 금방 왔네요?"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당아영이 서있었다.

-꿀꺽

"무, 물론이죠. 약속 했잖아요. 금방 오기로."

"솔직히 그렇게 말하고 또 도망치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사람을 풀어두긴 했었는데.. 제대로 집까지 바로 온 모양이네요. 기특해라."

-스윽 슥

"하하.."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마냥 웃을 수 만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꿀꺽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내가 지금 어장관리를 하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됐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의 통제는 필수였다.

이 스토킹을 어떻게 해결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들킬게 뻔했다.

"자, 그래서 이제 대답할 준비는 됐나요?"

여소천과 마찬가지로 나를 벽에 몰아 놓은 상황에서 그녀가 대답을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뭘 얘기하는지 모르겠다는 변명은 도움이 되지 않을게 뻔했다.

이미 그녀의 아버지까지 만나 결혼 얘기가 나온 마당에서 할 얘기가 그것 말고 더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후우..'

-톡톡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 준비를 했다.

말하면서도 정말 떨리고 걱정됐지만 지금 대답 해야 했다.

더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소저.. 사실.."

그래서 떨리는 입으로 준비했던 대답을 내뱉었다.

정말 못할 짓인 걸 알지만

정말 이기적인 말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대답.

"저한테.. 가족은 없지만 가족 같은 분은 계셔요. 제가 전에 말했었죠? 폐관수련에 들어가신 스승님이 계시다고."

"...네. 그랬죠?"

"그런데.. 제자 된 도리로서 결혼 같은 중대사를 스승님한테 알리지 않고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꿀꺽

실시간으로 당아영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앞으로 약 1년에서 1년 반.. 스승님이 폐관수련에서 나오실 때 까지만 기다려주세요."

"..."

"그, 그렇잖아요? 제자 된 도리로서 유일한 가족 같은 스승님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알리지도 않고 결정할 수는 없잖아요? 패륜이라고요?"

변명처럼 들릴 수는 있겠지만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이 세계에서 사제 관계는 거의 부모와 자식이나 마찬가지고 가끔은 오히려 그보다 더 돈독한 관계일 때도 많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주장을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이랬다.

부모님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을 할 순 없다고.

이 세계 기준으로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지만

-삐질삐질

그게 당아영에게 받아들여 질지는 의문이었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다고 해도 그걸로 설득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스승님이랑 많이 친하세요?"

"네? 네. 능력 하나 없이 뒷골목에 버려져 있던 저를 거두어주신 뒤에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식이나 기술도 가르쳐주신 은인이니까요."

"...하아. 네. 뭐. 당연하겠죠. 스승님이랑 친하겠죠. 아무렴요."

당아영이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미간에 손을 올렸다.

딱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여기서 뭐라도 더 말을 덧붙여볼까 고민하는 사이

"..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정말. 비겁한 변명이긴 한데 알고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 변명이네요."

당아영이 두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네. 그렇게 하세요. 당신 말대로 혼인은 중대사니까. 스승님한테 알리긴 알려야겠죠. 그렇다고 폐관수련에 들어가신 분을 끌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꼼짝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잖아요."

"...!"

일이 너무 잘 풀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뱉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으니까.

"그런데 당신 스승님이 결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계획은 이렇게 시간을 번 다음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기회를 봐서 산 속으로 튀는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저렇게 질문을 했으니..

'스승님이라..'

스승님이 폐관수련에서 나오셨을 때 대뜸 혼인을 올린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어떻게 반응하실까.

............

"...아마 괜찮을걸요?"

"정말요?"

"네.. 아마 뭐라고 하시지는 않을 거에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스승님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사이에 기다리라던 스승님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도 걸리면 엄청 혼날게 뻔히 보이는데 그 와중에 결혼?

-부들부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시지만 불같이 화내실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마, 만약 반대하시더라도 제가 설득 할게요."

"정말이죠?"

"무, 물론이죠. 소저를 1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는데. 그떄 가서 그럴 수는 없죠."

솔직히 말하자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당장 시간을 버는 것만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 말고는 도저히 생각나는 수가 없었고 만약 제대로 변명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결혼까지 해야 할 상황이니까.

그리고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결국 검후님의 귀에 소식이 들릴 수밖에 없을 거고

'...그대로 끝이야.'

미래고 뭐고 그 순간 내 인생은 끝장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당아영을 막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거다.

카드 돌려막기와 비슷했다.

당장 있는 빚을 변제하기 위해 다른 빚을 만드는 일차원적인 짓이었지만 지구에서 괜히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겠는가.

당장 급한데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덜덜

"근데 몸을 왜 그렇게 많이 떠세요? 혹시 추우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몸살 기운이 있어서.."

버는데 성공한 시간 동안 무엇이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머리가 아파왔지만 지금 당장은 살았다는 안도감도 몰려왔다.

'그래.. 일단은 조금만 쉬자..'

안 그래도 오늘은 힘든 일이 많았고 이제 간신히 하나 해결한 상황이니까 오늘은 이만 쉬려고 했지만

"저기.. 근데 있잖아요.."

"...?"

"그러면.. 혼인은 미뤄졌지만 지금은 거의.. 약혼 관계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당아영의 말에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그.."

'대답 잘 해야 해.'

지금 이 대답에 따라서 방금 전에 기껏 번 시간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최선의 답안을 찾기 시작했다.

부정은 일단 탈락이었다.

간신히 한숨 돌린 상황을 더 악화 시킬 수 있는 답변이었다.

'이것도.. 대답을 미루면..'

순간 결혼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대답을 미룰까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위험했다.

당장은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녀가 폭주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또 기다리라는 답변은 영 좋지 못했다.

그러면 남은 답안은 하나였다.

"..네. 그렇죠."

긍정.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당근과 채찍 같은 느낌으로 선택한 긍정이었다.

이쯤에서 한번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꽈악!

내 대답을 들은 순간 그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잔뜩 격양된 표정의 당아영이 내 눈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그러면.. 약혼 관계면요.."

"..."

"해도.. 되죠?"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맑아 보였던 그녀의 눈이 어느새 정욕에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붉게 물든 볼이 그녀의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붉은 노을 때문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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