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50)

"그런데 제 얼굴 안 보이는 거 맞죠?"

"..네. 내공을 집중해서 뚫어보려고 해도 잘 안되네요."

'..대단한 물건이네..'

여소천의 경지로도 못 뚫는 가림막이라니

그녀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물건이었다.

-쿵!

그 순간 다른 방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당아영의 아버지와 당아영이 나왔다.

당아영의 아버지가 먼저 성큼 성큼 걸어 나왔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여소천은 방 문이 열리자 마자 빠른 순발력으로 벽쿵 상태를 해제하고 떨어진 상태였다.

"대화는 잘 나누셨.."

-덥석!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책임지게."

"...네?"

"내 딸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되돌리긴 늦은 것 같으니 그대가 책임지란 말일세."

"아,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거절은 거절하겠네. 식을 올릴 거라면 예산은 전부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 걱정 말고 어서 준비를.."

"아니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해주시라니까요?!"

"서방님.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제 쪽에서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어서 식을 올릴 날짜부터.."

"소저는 또 징그럽게 왜 그래요?!"

갑자기 책임지라고 하는 당아영의 아버지와 나를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당아영에게서 기겁하며 떨어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난장판 속에서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여소천이 눈에 들어왔다.

"..."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소매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 저기..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제가 방금 전까지 대화 중이었어서.."

"..도망 안칠 거죠?"

-뜨끔

사실 이대로 도망칠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던 건 사실이라 약간 찔리는 느낌이 있었다.

"에, 에이. 저를 뭘로 보고. 이따가 집에 갈 테니까 그때 가서 얘기하죠."

"..객잔에서 자는 건 아니겠죠?"

"무, 물론이죠."

"..."

당아영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주변에 당아영의 아버지도 여소천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당아영이 가장 무서웠다.

-꿀꺽

마음 같아서는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 덜덜 떨면서도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세요."

"ㄴ, 네!"

다행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서 떨어졌다.

당아영의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은 상태로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휴우우우.."

위기(?)를 헤쳐나갔음에도 몸에 남은 미약한 떨림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뭔가 이쯤 되면 또다시 여소천의 이죽거림이 날아 들어올 타이밍이라고 적당히 예측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여소천이 있던 쪽을 바라보자

"...뭐하세요?"

-화들짝

"뭐, 뭐가요?!"

그녀가 그녀의 소매를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워낙 빠르게 팔을 내린 탓에 왜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나 입에 닿아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갑자기 옷을 얼굴에 가져다 대시길래.."

"시, 시끄러워요! 입 다물어요 이 색마!"

"제가 뭘 했다고 색마에요?!"

"당신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생각해보면 색마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 게 맞아서 더 서러웠다.

"..하아."

"흐흠. 그러게 자중했어야죠. 역사적으로 아랫도리를 잘못 놀리다가 치정극으로 사람 몇 명 죽은 사례가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몰라요 그런거.. 알고 싶지도 않아.."

진짜 하필 건드려도 정파의 영웅이랑 봉황을 건드리다니.

꼭 두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 걸리기라도 했다간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차라리 내가 뭐 엄청 강하거나 유명해서 둘을 감당할 힘이라도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니니까 문제지..'

이 상황에서는 색마라는 말이 맞았다.

진짜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고 과거의 나에게 묻고 싶다.

검후님이야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아영 때는 정신이 깨어있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혹시 말할 거 아니죠?"

"뭘요?"

"그.. 제가.. 당아영이랑 검후님에게.. 양다리를.."

"아아.."

여소천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지어졌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검후도 모자라서 독봉이라.. 수배가 떨어져도 할 말은 없겠네요. 그렇죠?"

"그.. 그게.."

"수배가 떨어지지 않더라도 사천당가와 화산파가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찾을 거고.. 독봉과 검후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겠죠. 이야 인생 정말 재밌겠어요. 과연 얼마나 도망 다닐 수 있을지."

"히이익.."

도망가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저걸 어떻게 따돌리고 도망간단 말인가.

들키는 순간 섬서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끌려가는 거 확정이었다.

"지금 제가 여기서 그 두 명 중 한명한테만 얘기해도 바로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지금 당신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뭐,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원하는 거라.."

여소천이 턱을 괴며 고민에 잠겼다.

-꿀꺽

시간이 지날수록 실시간으로 내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대체 어떤 요구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불안했고

그녀가 내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나를 엿 먹이려는 의도로 펑 터뜨려버리면 내 인생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대체 어떤 꼴을 당하게 될 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소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만약 거부하면 최대한 빌어 보기려도 하려고.

그리고 잠시 뒤 여소천의 입이 열렸다.

"그러면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부탁이요..?"

"음.. 생각해보니까 소원이 좋겠네요. 그냥 제가 뭘 요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엇이던 따르는 걸로. 어때요?"

"..."

소원권이라.

내 스스로 족쇄를 하나 차는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감수해야 하는 요구였다.

"...소원으로 소원을 늘리는 건 안돼요."

"와 그건 생각 못했네요."

"제 목숨과 관련된 것도 안되고요."

혹시 모르니 보험은 깔아두고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계약 성립이네요. 잘 부탁해요."

"하아아아.."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신세가 참 처량했다.

아랫도리를 잘못 놀렸다가 이게 무슨 신세일까.

진짜 멸망만 아니었으면 그냥 다 떄려 치우고 산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산 속으로 들어가도 다시 잡혀 나올 것 같다는 게 문제지.

'내가 사라지면.. 아마 당아영이랑 검후님이 나를 찾으려 할 거고.. 검후님이라면 모를까 당아영은 분명 검후님을 견제할 거 같은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아영이 검후님을 향해 '그쪽은 내 서방님이랑 무슨 관계길래 찾는 거냐'라고 한 마디라도 하는 순간 다 끝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둘을 관리하면서 절대 서로 그 사실을 못 알게 해야 해.'

흔히 말하는 어장 관리였다.

다리를 여러 개 걸친 사람이 서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교묘하게 관리하는 것.

정말 쓰레기 같은 짓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들키면 인생이 끝장나는 상황이었으니까.

'나, 나중에. 나중에 직접 밝히고 사과하자.'

우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검후님은 평소에 화산파 안에서만 지내시니까 외부의 소식을 접할 일이 거의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물론 불시에 나올 때도 대비해야겠지만 그건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내가 주로 신경 써야 할 상대는 당아영이었다.

검후님과 달리 집 안에서만 지내지도 않고 학관까지 다녔을 정도로 사교성도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검후님과 달리 아직 관계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상태이기까지 했다.

그녀와 사고를 친 게 당장 어제였고 오늘 도망쳐 나왔다가 이 상황까지 온 것이었으니까.

'...여소천만 없었으면... 아니다.'

그녀가 장인어른(?)을 부른 탓에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진 것도 있긴 있었지만 그녀가 없었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근데 오늘 저는 여기 왜 불렀던 거에요?"

"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거요? 그냥 당신이 관심 많이 받는 걸 싫어하는 거 같아서 골탕 먹이려고 불렀던 거에요. 거창한 이유까지는 없어요.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도 조금은 있었는데.. 검후 때문에 생각했던 대로 안 풀렸네요."

여소천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원래 당신이 제 질문에 어버버하는 걸 파고들어서 곤란하게 만들 속셈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대답해 버리면 당신의 가치가 더 올라가잖아요? 당신이 그 재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더 용이해질 거고."

확실히 검후님이 말한 내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주화입마를 치료하고 다음 경지에 올라갈 단서까지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미래 예지 능력은 알려지기만 한다면 농담이 아니라 중원 전역의 무인들을 몰려오게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게 여기에서만 퍼져나간 이야기라서 다행이에요."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손님이 늘어나는 건 좋지만 그 정도의 과분한 관심은 사양이었다.

하물며 무인들이라는 무서운 손님은 더더욱.

그러니 그 이야기가 이곳에서만 오고간 대화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

"...어."

"...?"

"제가.. 아까 사람을 시켜서.. 회의를 지켜본 다음에 나온 내용을 소문으로 멀리 퍼뜨리라고 지시를 내려놨었거든요.."

"...네?"

"근데.. 제가 깜빡하고 지시를 철회하라는 이야기를 전달 안했던 거 같은.."

여소천의 말을 듣고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 미쳤어요?! 제정신이에요?! 그걸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다고요?!"

"지, 진정하세요. 어차피 당신 옆에는 독봉이 있잖아요?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는 접근도 못할 거에요. 여차하면 그냥 사천당가에 몸을 의탁하면 웬만한 고수들도 건들지 못할 거고요."

"미쳤어 미쳤어..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 저도 설마 검후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죠!"

"애초에 근본적인 원인은 당신한테 있잖아요..!"

"..."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건지 옆으로 고개를 피한 여소천을 바라보며 속으로 빌었다.

이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면 늦었겠지만

제발.

제발 멀리 퍼지지 않기를.

이렇게 빌고 또 빌었다.

* * *

-저벅저벅

"그러고 보니 아영아. 너는 그자가 검후님의 목숨을 구한 것을 알고 있느냐?"

"그 사람이 검후님을요?"

"그래. 그 능력을 이용해 검후님에게 알려준 것 중 검후님의 주화입마를 치료하고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는 단서까지 얻을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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