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러니까 그냥 친구 관계라는 말인가?"
"네. 안 그래도 어제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근데 갑자기 제가 출근해 놓고 무림맹으로 끌려갔다고 하니 화들짝 놀라서 따라온 거죠."
"그런가.."
"네. 그런 거에요."
나는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검후님에게 당아영과의 관계에 대해서 변명했다.
'섹스한 걸. 그것도 첫 경험을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한 사람한테 어떻게 이걸 얘기해.'
얼마나 큰 실례인가.
비록 내 잘못에서 비롯된 거긴 하지만 차마 그걸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놓고 이곳에서 또 여인을 탐했단 말인가?]
[거, 검후님. 그게 아니라요..]
[변명은 듣지 않겠다 색마.]
[-서걱!]
"...절대 말 못해."
"음?"
"아, 아닙니다."
검후님이 악인에게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아는 만큼 차마 내게 그녀의 검이 향하게 만들 수 없었다.
물론 이렇게 숨기다가 들통나면 더 큰일 나겠지만..
'지금 안 숨기면 지금 죽을 수도 있어.'
그것도 일단 지금을 살아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검후님에게 변명을 하고 검후님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렇게 검후님과 헤어진 뒤
"후우우우.."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나 혼자니까 당분간 휴식을 취해도 아무도 건들 사람이 없..
"어떻게 잘 속아 넘겼네요?"
-화들짝!
"까, 깜짝아!"
뒤에서 기습적으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여소천이 내 등 뒤에서 나를 놀래키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누가 보면 죄라도 지은 줄 알겠어요."
"보통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걸면 놀라거든요?!"
"그러면 무공 수련을 하시면 되겠네요. 뒤에서 누군가 오는 기척을 감시하면 되지 않겠어요?"
"단전 고쳐주실 거에요?"
"아니요?"
"그러면 말을 마세요.."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내 단전이 망가져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아아.."
다시 탁자에 고개를 파묻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쉴 시간이 나왔는데도 쉬지 못한다니.
오늘은 아무래도 운수가 나쁜 날인 것 같았다.
"...저기요. 우리 대화 좀 하죠."
여소천에게 접근하라.
그게 내게 성녀님이 남긴 단서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 여소천에게 말을 걸며 생각했다.
어째 주변에 전부 여자 뿐인 것 같다고.
"저는 딱히 당신이랑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요?"
"좋던 싫던 앞으로도 여러모로 얽힐 것 같은 사이잖아요? 당신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해하지만 언제 까지고 이렇게 담을 쌓고 있는 건 별로 도움이 안될 거라고 생각해요."
"ㅇ, 왜 저랑 당신이 얽힐 것 같은데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여소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성격 진짜 새침하네.'
"다른 세계의 성녀님한테 들었거든요. 이 세상이 지금 위험하다고."
"...하! 그 음흉한 여자 말이라면 믿지 마세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못 믿을 여자니까."
예상은 했지만 여소천은 그 성녀님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신을 모시는 성녀라서 그런 걸까.
'조금 수작..을 부리기는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비록 상점창에 장난질을 조금 치긴 했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데 큰 도움을 준 장본인이었기에 나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내 쪽에서 못 믿을 쪽은 이쪽이었다.
종마 신세를 면하게 해준 건 고맙긴 하지만 이 험한 세상에 혼자 툭 던져 놓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아마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딱히 위험하지 않나요?"
"그럼요! 다름 아닌 제가 있는데 그런 순리를 거부하는 뒤틀린 망자들 따위 산더미로 몰려와도 얼마든지.."
"천지신명님의 이름을 걸고?"
"..."
여소천의 입이 다물어졌다.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다루는 방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자존심과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지만 천지신명과 관련된 일이라면 굉장히 민감해 한다.
당장 저번에 나를 찾아온 이유도 내가 그동안 천지신명을 향해 저지른 무례한 행동들에 대한 벌로 온 것 아니었던가.
성녀님의 언급에 따르면 그녀가 이 세상의 성녀 비슷한 존재라고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천지신명님에게 맹세코 이 세상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꽈악
여소천이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다는 감정이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녀의 대답을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조금 위험해요."
불행하게도 말이다.
"..위험해요?"
"무, 물론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아요? 어딘가에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흡혈귀의 왕은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어요. 제가 다른 망자들을 막고 있으니까."
"그러면 지금 중원 곳곳에서 들려오는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는요?"
"그, 그건.. 발악이죠 발악!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니 부하들을 시켜 뭐라도 해보려는 수작.."
"그러니까 그걸 막아야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답답했다.
망자들을 막는 건 그녀의 능력이라고 치더라도, 중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이들도 충분히 개입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왜 혼자만 고생해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을 요청하면 그 죽음의.."
그 순간이었다.
-텁
"안돼!!"
여소천이 다급한 손길로 내 입을 틀어 막았다.
"...?"
"아. 그,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그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끄덕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괜히 내 입을 막았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내 입을 떠나갔다.
"..잘 들으세요. 그자. 그러니까.. 한 개념을 초월하여 손 아래에 두고 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은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각하는 이들의 존재 만으로도 힘을 얻어요. 물론 한 두 명 정도로 큰 힘을 얻지는 않지만 그게 수백, 수천 명쯤 되면.. 절대 무시할 수 없어요."
처음 보는 것 같은 그녀의 진중한 모습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당신이야 그 음흉한 여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곤 해도 그걸 당신이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다른 문제에요. 가급적이면 그 이름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마세요. 물론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일도 없게 하고요."
"...알았어요."
그제서야 여소천은 내게서 조금 거리를 두며 손을 그녀의 소매에 닦았다.
아마 내 입을 막는 동안 내 침이 손바닥에 묻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러면 성녀님은 저한테 그 이야기를 왜 한 걸까요..?"
"뭐, 그 여자가 있던 세상에서는 그자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었을 테니 그 사실조차 까먹었을 수도 있죠. 아니면 한 명 정도는 더 늘어나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나."
"...그런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 동안, 세계의 명운을 걸고 이어진 전쟁이었으니 그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이 그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는 저 제약이 의미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검후나 다른 사람한테 말하진 않았겠죠?"
"어.. 아마도 없을 거에요."
"다행이네요. 당신의 그 머리가 여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 이외에도 기능을 하고 있을 줄이야."
"...네?"
순간 내가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 되묻자 여소천이 다시 얼굴을 붉히며 팔을 휘저었다.
"바, 방금 말은 실수에요! 잊으세요!"
"어.. 네.."
여소천의 말을 듣고 생각한 건데 이 몸이 얼굴이 참 잘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나도 거울도 봤고 물에 얼굴도 비쳐본 적 있으니까 상당히 뛰어난 외모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말을 들을 정도인가?'
아무래도 여자한테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인지는 남자인 내가 평가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키도 작고 생긴 것도 어려 보이는 꼬맹이인데 말이다.
'...키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눈앞에 있는 여소천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왠지 불안한데요."
"그쪽이랑 저랑 어느 쪽이 키가 더 클까요?"
"하."
여소천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제가 더 큰 게 당연하죠."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나 저나 비슷해 보이는데요?"
"...자. 똑바로 보세요."
-쿵!
여소천이 나를 벽으로 밀치고 손을 벽에 짚었다.
흔히 벽쿵이라고 부르는 자세.
"이래도 비슷해 보여요?"
"..."
가까이 붙자 약간이지만 여소천쪽이 눈높이가 더 위쪽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물컹
내 가슴팍에 닿는 여성 특유의 신체 부위가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네. 그쪽이 더 크네요."
"훗. 다음부턴 조심하시길."
"고작해야 1~2cm 더 큰 거 가지고 유세 부리지 말아주실래요."
"다른 세계의 단위로 얘기하셔도 저는 그게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요."
"쳇."
마음 같아서는 이 자세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팔을 치워주지 않아 꼼짝 없이 갇혀있는 상황이었다.
"..."
"..."
"..어차피 얼굴도 안보이면서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뇨. 이계에는 참 신기한 기술이 많다 싶어서요."
"이 망토는 제 세계의 물건은 아니긴 하지만요.."
그래도 참 신기한 망토긴 했다.
얼굴을 어둠으로 감싸 보이지 않게 만들어 신원 노출을 막아주는 것도 그랬고 부가 기능으로 통풍, 보온, 방한 전부 완벽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크기도 큼지막해서 내 몸집도 가려주는데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가리지 않은 내 몸은 작고 마른 편이라 이 험한 세상에서는 시비가 걸리기 쉬운 편이었으니까.
괜히 객잔에서 일하는 점소이들이 그렇게 시비에 휘말리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내 쪽은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었다.
몸집도 가려줘, 얼굴도 가려줘, 아무리 치안이 좋지 않은 세상이라고 해도 쉽게 건드리기 힘든 외모였다.
생각해봐라. 애초에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요술을 부리는 상대를 상대로 시비를 걸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 같아도 웬만해서는 건드리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