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문제라도 있나? 은혜를 입은 내가 직접 말하겠다는 데."
"아뇨.. 잠깐만.. 이건 읽은 거랑 다른데.. 갑자기 왜.."
여소천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렇게 될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
'...뭐지?'
생각해보면 검후님의 성격 상 나설 가능성은 충분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저렇게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설마 그걸 예상 못한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근데 읽은 거랑 다르다는 말은..
'겨우 이걸 못 읽었다..?'
"어.. 뭐.. 네.. 그렇죠. 문제될 건 없죠..?"
여소천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던 와중에 그녀가 버벅거리며 검후님의 발언권을 인정했고 검후님의 입이 열렸다.
"볼일이 있어 그와 함께 다니면서 그가 내게 여러 점을 봐주었지. 그리고 광동에서 혈교의 잔당들과 싸우던 도중 혈교의 술법에 당해 주화입마에 걸릴 위기가 찾아왔었네."
"혈교..?"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나. 요즘 중원 곳곳에서 혈교의 흔적으로 보이는 이상한 현상이나 괴인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그렇죠."
"음.."
검후님의 말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기 속에서 그가 봐준 점 속에서 주화입마를 이겨내고 오히려 다음 경지로 넘어갈 단서를 얻었네."
"...!"
"그게 정말입니까?"
그들이 눈을 크게 뜨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것도 모자라 검후님 정도의 경지에서 다음 경지로 넘어갈 단서를 찾게 해주다니.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닌..
'잠깐만 그걸 내가 했다고?'
가만히 검후님의 말을 듣고 있던 나까지 덩달아서 놀랐다.
만약 간신히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나도 되물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될만한 걸 내가 봐준 적이 있었나..? 워낙 잡다한 걸 많이 봐줘서..'
어차피 장사도 못하겠다 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검후님밖에 없겠다 온갖 잡다한 점까지 심심풀이 삼아 전부 본 탓에 대체 뭐가 도움이 된 건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아무리 무인들이 사소한 것에서도 단서를 찾는다지만 설마 거기서도 찾을 줄이야.
내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검후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근데 그걸 여기서 얘기하면..'
내게 쏟아지는 시선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한 문파를 책임지는 자들이라고 해도 결국 그들도 무인. 다음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단서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이들이었다.
-꿀꺽
잘못하면 이대로 납치 당하는 거 아닐까 싶은 강렬한 시선들을 느끼며 검후님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망토 때문에 소용은 없었겠지만 다행히 검후님은 이대로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혹시 그 능력을 탐내 그에게 위협을 끼칠 생각이 있다면 미리 말하게. 내 직접 어떻게 될지 보여줄 테니."
검후님의 위협에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를 향한 시선은 다시 확연히 줄어들었다.
'..검후님 사랑해요.'
정말 검후님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중이었다.
여소천은 어떤 반응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혼자만 의자에 안 앉고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부들부들
딱 봐도 불만이 많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일이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대놓고 보여주는 모양새였다.
* * *
"흥~ 흥~"
당아영은 개운한 표정으로 부엌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이상한 약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 약 없는 순수한 음식이었다.
쌓여있던 게 전부 풀린 것처럼 개운한 표정과 반짝거리는 그녀의 피부는 지금 그녀의 상태가 굉장히 좋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달칵
완성된 요리를 도시락 안에 집어넣고 문득 요즘 애인을 둔 여성들에게 유행한다는 한 문화가 생각났다.
도시락에 양념으로 사랑하는 상대의 이름을 적는 거라고 했던가.
꽤 낭만적인 문화라고 생각하며 그의 이름을 적기 위해 양념 통을 들었지만 금방 손이 멈추었다.
'..이름이 뭐지?'
생각해보니 그녀는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무면금귀는 별호인데다 심지어 그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별호였다.
보통 별호나 '당신'이라고 칭했지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곧 서방님 되실 분인데 이름은 알아야지.'
어째서 감춘 건지는 몰라도 오늘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대로 귀여운 토끼 모양을 그려 넣었다.
그 상태로 도시락을 싸 넣은 뒤에 그와 함께 낭만적인 식사를 하는 장면을 기대하며 점집으로 향했고
그녀가 그가 무림맹에 불려갔다는 걸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섬서에 있는 무림맹 본부의 최상층.
정파 무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들만 모인다는 곳에서 나는 간만에 점쟁이다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오른발을 반 발자국만 더 뻗어 보세요."
"오른발 말인가?"
"네. 저도 이것 외에는 읽을 수 있는 게 없는데 혹시 감이 잡히시나요?"
"...으으음."
덩치가 산만한 개방의 방주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만이 아니라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다른 이들도 대부분 이러고 있었다.
[그들이 물어보는 것에 대한 점을 한 가지만 봐준다.]
내가 먼저 기회를 봐서 그들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검후님의 등 뒤에 숨으면 이 상황은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지금 당장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후에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할까?
그러지 못하도록 검후님과 하루 24시간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냥 지금 처리하려고 했다.
그 결과 검후님, 여소천, 그리고 장인어른(?)을 뺀 모두가 내게 점을 본 뒤 각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무서운 면은 있어도 결국 이 사람들.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파다.
이런 식으로 빚을 지워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다.
"헤엑.. 헤엑.."
나는 굉장히 힘든 척 연기를 하며 탁자에 엎드렸다.
사실 별로 지치지는 않았지만 나름 생색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저들은 점에 대해 잘 모르니까 '점을 보는 게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구나' 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하는 연기였다.
사실 별로 안 힘든 게 들키면 더 봐 달라고 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런 나를 여소천이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망토 안쪽에서 그녀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내 도발을 보고 반응할 여소천의 모습이 내심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데서 망토를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아쉬운 대로 참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아영의 아버지가 나를 향해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
"..점 보실 겁니까?"
"..마음이 복잡하군."
"네?"
"능력이 있는 자라면 데릴 사위나 며느리로 데려와 당문으로 편입 시키는 방식은 지금의 당문이 있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막상 그 대상이 내 딸이 된다고 하니 가주로서의 나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내가 충돌하고 있어."
"하..하.."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관계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지금은 무슨 관계냐고 물어볼 테니 거기에 대답을 해야 하는데..
'왜 하필 오늘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오늘 관계 정리를 제대로 하고 왔어야 했는데
아니 어제 그런 짓을 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속으로 멍청했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물론 그대의 능력이 사실이라면.. 내 딸을 넘볼 자격이 있다 못해 넘치지. 예지를 넘어선 예언에 가까운 능력이라면 아마 다른 세가의 자식을 끔찍히 아끼는 영감들도 앞 다투어서 자신의 딸을 내걸 거야."
"그,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닙니다. 보기보다 제약도 많고.. 제대로 써먹기도 힘든.."
-쿵!
그 순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요! 지금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어르신들께서 진솔한 대화를.."
"비키세요! 저는 지금 제 연인을 찾으러 온 거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나온다니까요..!"
익숙한 목소리와 실랑이를 하는 대화가 들렸고
점점 쿵쿵거리는 소리가 문 밖까지 다가오다가
-벌컥!
"아악! 안돼!!"
문이 열리면서 직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 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당아영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순간 이게 현실이 맞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소저가 왜 여기.."
-와락!
"걱정했잖아요! 갑자기 무림맹에 끌려갔다고 들어서..!"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내게 다가온 당아영이 나를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쪽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글이글
"..아영아?"
눈앞에 그의 아버지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이쪽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저씨들과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는 걸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검후님.
그리고
"...흐음."
재밌어 보인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소천이 보였다.
* * *
사천당가의 가주. 당아윤은 갑자기 나타난 당아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빠가 왜 여기 있어요? 아빠가 저지른 일이에요? 그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영아. 그게 아니라.."
"다시 그이한테 손이라도 대봐요. 아빠고 뭐고 다시는 얼굴도 안볼 거에요."
"크흠."
당아윤은 딸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제일 좋다고 하던 녀석이..'
무림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사천당가의 가주였지만 그도 그의 피가 이어진 가족에게는 아버지일 뿐이었다.
"혹시 그의 능력 떄문에 그러는 거라면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다. 네가 아니더라도 당문에는 조건 좋은 여식들이 많고.. 너는 봉황이라는 이름과 그 나이에 절정에 오른 재능까지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의 능력은 물론 대단하지만 나는 네 재능이 결혼 생활 때문에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게 걱정되는구나. 더군다나 혹시나 임신이라도 한다면 무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하지 않느냐."
"이제 와서 능력은 아무래도 좋아요. 만약 그가 능력을 잃는다고 해도 사랑할 거니까."
"...제대로 빠졌구나."
당아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도 한참 때의 젊은 나이에 저런 열정적인 사랑을 해본 적이 있기에 그의 딸을 마냥 나무랄 순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다른 남자에게 딸을 넘겨주기 싫다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의 어디가 그렇게 좋더냐. 들어나 보자꾸나."
얼굴은 보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소문을 확인해 보면 나름 입은 잘 놀리는 것 같았기에 대체 어떤 말로 딸을 꼬드겼나 확인하고자 했다.
'놈팽이같은 놈.'
그리고 당아영의 입이 열리며 나온 대답은 그의 정신을 잠깐 동안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야해요."
"...응?"
"몸도 야하고.. 목소리도 야하고.. 하는 짓까지 하나하나가 전부 야해요. 그냥 돌아다니는 미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얼굴은 가리고 다녀서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다녔으면 진작에 어디 끌려갔을걸요?"
"아영아..?"
"정말..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사랑만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그이가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 체력이 안될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 있다고요."
"....."
"하아.. 하아.. 그 작은 몸 위에 올라타서 옴짝달싹 못하게 손을 묶은 다음에 무참히 범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그동안 몇 번이나 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스스로의 몸을 껴안은 당아영의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