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왜 여기서 나와?!'
굉장히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누가 불렀나 했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어디로 가야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상황이었으니까.
"그, 그분이 저를 불렀다고요?"
"네. 아주 큰 일을 해낸 사람이니 직접 치하 해줘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물론이고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문인, 가주들도 부르겠다고 하셨죠."
"네...?"
잠깐만.
잠깐만잠깐만잠깐만잠깐만.
"제가.. 뭘 했는데요..?"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검후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용한 점쟁이라 그분의 목숨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셨다고.."
"...어?"
순간 머리가 멈춰버렸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었다.
검후님이 내게 목패를 주시면서 했던 말.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빚이 있네. 거의 내 목숨을 구한 정도의 큰 빚이.]
검후님은 내게 생명의 은혜에 준하는 빚이 있다.
사실 나도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모른다.
원래 점이라는 게 별 생각 없이 봐준 사소한 미래에도 크게 변화할 수 있는 거라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녀에게 빚을 입혔는지조차 나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근데 저 말 때문에 이곳에 불려와 버렸으니..
'검후님?! 무슨 짓을 하신 거에요?!'
물론 그분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해보자는 각오도 이 정도로 거물 앞에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당장 내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각오는 무슨 각오.
무림맹주도 모자라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문인, 가주들도 온다는 말에 머리가 하얘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결국 이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 명에게 있었다.
'여소천..!'
그녀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해 이 판을 짠 게 분명했다.
검후님이 내게만 해준 말을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천지신명에게 사랑 받는 몸. 원한다면 그 정도 정보를 얻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르게 본신의 무력도, 사회적 지위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 몸을 사리느라 정보 사용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필요 없을 거다.
당장 나는 괜찮은 정보를 물고도 괜히 몸을 사리느라 그냥 그대로 가만히 날려 먹은 전적도 많았기에 그녀를 향한 질투심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엿 먹이는 이 상황까지 합쳐져서..
'복수할 거야..'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는 감정이 만들어졌다.
우선 지금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갑자기 끌려오신 분들은 많이 불편해 하시겠죠?"
"으음.."
"..하아."
그래. 내가 검후님의 목숨을 일단 구했다고 친다면 그건 분명 정파의 무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고 충분히 칭찬해 줄 수 있는 말이다.
근데 문제는 그들이 한 문파나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것과
안 그래도 바쁠 터인 그들을 여소천이 강제로 끌고 온 상황이니..
'..첫 인상부터 꼬인 거 같은데.'
그들이 내게 마냥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래도 무려 검후님의 생명의 은인이니 좋게 봐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억지로 끌고 온 게 문제지.. 억지로..'
칭찬이라는 것도 원할 때 해줘야 좋은 칭찬인 거지 강제로 시키면 칭찬할 일이 맞다고 해도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혹시 그분들은 언제쯤 도착하세요?"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저만 인사라도 따로 드릴 겸 먼저 나와 있었으니까요."
"..."
가슴에 올라간 추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맹주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와아아..'
방 안에 들어가자 마자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날아왔다.
맹주님을 제외하면 방에 있는 사람은 총 8명이었는데 그중 두 명은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었다.
'검후님..'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방식으로 재회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굉장히 반갑게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가장 의지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여소천..'
나는 망토 안쪽에서 그녀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망토 모자 안쪽의 얼굴은 어둠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녀가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머지 6명.
그들이 보내는 시선은 각양각색이었으니까.
호기심, 불만, 불편함, 기특함, 등등 온갖 다양한 감정들이 전해지는 시선들이었다.
내가 그 무거운 시선들에 짓눌려 몸이 굳은 사이에
-짝
"다들 시선에서 힘을 좀 빼도록 하지. 누누이 말했지만 그는 무공 하나 익히지 못한 일반인이니 혹여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괜한 짓은 하지 말아주게."
검후님의 도움 덕분에 이 숨 막힐 것 같은 시선들이 훨씬 줄어든 게 느껴졌다.
'응?'
근데 검후님의 말을 들은 뒤에도 내게 대놓고 부정적인 감정을 보내는 이가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자 짙은 색의 흑발과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잘생긴 외모가 눈에 띄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처럼 보였지만 그걸 감안해도 굉장히 곱게 늙었다는 감상이 들 정도의 외모였다.
그리고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 저런 특징을 가진 가문 하나가 있었는데..
'...사천당문..'
독과 암기를 주로 다루는 가문이자 당아영의 가문이었다.
-이글이글
나를 향한 타오르는 시선을 보며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사천당가의 가주로 추정되는 사내.
나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상황이니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꽤 노골적인 적의였기에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나 생각해 보았고
한 가지 불안한 추측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왠지 당아영이랑 닮은 것 같은데.'
당연히 같은 사천당가니 용모가 비슷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 수준을 넘어선.. 정말 피가 진하게 섞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부모 자식처럼.
'...당아영이 지금 나랑 동갑이고. 이 세계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나이를 한번 생각해보면..'
얼추 나이대가 맞았다.
당아영이 현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난 독봉이라는 것과 눈앞에 있는 사내가 사천당가의 가주라는것까지 생각하면 추측의 가능성이 훨씬 올라갔다.
그 재능을 물려받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일 경우엔 눈앞의 사내가 당아영의 아버지라는 뜻이었고
예전, 하다못해 어제라면 모를까 하필 오늘은 만나기 좀 많이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그야 당장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오늘 당장 그 아버지를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삐질삐질
'모르겠지. 모를 거야. 당장 어제 있던 일을 어떻게 알겠어. 응.'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써 내게 쏟아지는 적의로부터 눈을 돌렸다.
다행히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건 그와 나만이 아니었고
"자, 그러면 당사자까지 왔으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죠?"
그 말고도 내게 신경 쓰는 사람은 많이 있었다.
나는 망토 안쪽에서 여소천과 시선을 마주치며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할 방법은 없었다.
'쫄지 말자.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애초에 검후님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이유로 그에 대해 치하하겠다는 명분으로 온 상황.
내가 무례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내게 해가 될 것은 없었다.
.
.
.
취소하겠다.
만약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않으려고 했을 거다.
"..고맙네. 부디 앞으로도 정파 무림을 위해 더 노력해주면 좋겠군."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그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 또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처음엔 대체 나를 여기로 끌고 와서 대체 무슨 엿을 먹이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다.
압박을 넣는 건지 대놓고 꼽을 주려는 의도인 건지 내 능력에 의문을 품게 만드려는 건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짝짝짝짝
"와아아. 박수~"
불러 놓고 한다는 게 겨우 이런 악수회였다.
그것도 무려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문인, 가주라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이다.
'뭐지? 무슨 의도지?'
이 영혼 없는 악수를 이어나가며 속으로 여소천의 의도가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손에서 약간의 통증이 올라왔다.
그래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해보자
"..만나서 반갑군. 한번 만나보고 싶었네."
사천당가의 가주가 눈앞에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평소에 내 딸아이에게 신세를 많이 지는 것 같더군."
"딸아이라면.."
"당아영.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말게."
'시발.'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이 다가왔음을 깨닫자 흐르는 식은땀이 더 많아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하하.. 그렇죠. 평소에 소저한테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저를 많이 도와주신 은인이시죠."
"..나중에 한번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군. 다음에 본가로 불러도 되겠나?"
"...불러만 주신다면 최대한 빨리 방문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보지."
장인어른(?)은 그렇게 말하시고 자리로 돌아가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분이 이 악수회의 마지막 차례였는지 더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아..'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듯이 앉았다.
방금 그것 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피로를 느낀 상황이었다.
아직 그녀와의 관계 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 나온 상황에서 그 아버지를 만나게 될 줄이야
만약 저분이 어제 당아영과 내게 있던 일을 알았으면 지금 나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혹시 알고 부른 건 아니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소천을 보며 그녀가 나와 당아영 사이에 있던 일을 알고 이런 판을 마련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자, 이제 인사는 적당히 끝난 것 같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죠?"
-흠칫
그 순간 이어진 여소천의 말에 속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영웅. 검후님의 목숨을 구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나의 가장 위험한 부분을 노렸다.
나는 내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검후님의 목숨을 구했는지 모른다.
그저 검후님이 말해준 덕분에 알고 있을 뿐이지.
'이, 이건 어떻게 변명해야..'
여소천의 말에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는 사이 한줄기의 빛이 내려왔다.
"그건 내가 대신 설명하도록 하지. 내가 당사자니."
검후님이 직접 입을 여셨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