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믿고 싶었다.
* * *
-저벅저벅
'무림맹이라..'
상당히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았다.
소연이의 일이 있던 뒤 이후에 '단유성'을 찾는 일을 제외하면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적었던 것도 있었지만
화산의 검을 익힌 무인일 뿐 내가 화산의 장문인인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를 부를 일도 없었다.
만약 부른다고 해도 급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거절했을 것이다.
현 무림맹주를 포함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인, 방주, 가주들도 전부 나와는 다른 세대의 인물이다.
괜히 죽지 않고 남아있는 노괴(老怪)가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면 그들이 불편해할테니 가급적이면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화산의 장문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 호출도 가급적이면 거절하려고 했지만..
'여소천..'
20년 동안 만나지도 않다가 얼마 전 만난 옛 전우로부터 온 부름은 쉽게 무시하기 어려웠다.
나 또한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으니까.
그날 무슨 이유로 그와 나를 찾아왔고, 어떤 수로 나를 제압했으며, 내가 쓰러진 사이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특히 그날 이후로 그가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별 일 없었다는 그의 말은 믿기 힘들었다.
그를 추궁하고 싶진 않았기에 넘어갔었지만 여소천은 아니었다.
원래 좋은 사이도 아니었고 자주 마찰을 빚었던 만큼 옛 전우라고 해도 검을 휘두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서로 마찰을 빚었을 때 비무로 해결을 보는 일도 허다했었다.
물론 가급적이면 말로 해결해보려고 하겠지만.
-벌컥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탁자 위에 앉아있는 여소천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검후. 문을 열기 전에 인기척을 내는 예의는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기감으로 다 느끼고 있지 않았나. 굳이 기척을 감추지 않았으니 다 파악하고 있었을텐데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알고 있는 것과 그걸 티를 내는 건 별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대에게는 딱히 예의를 챙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어머 우연이네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도사들이 해도 되나 싶은 언쟁이었지만 오히려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우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라고 다른 이들에게 평소에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이 거친 쪽은 여소천이지.
"한번 늙었다가 젊어진 부작용인가요? 몸만 안 늙었지 여전히 말투는 할머니 같네요. 옛날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여전한 걸 보면 본인도 스스로 늙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건가요?"
"..반로환동은 그대도 하지 않았나?"
"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늙었다가 젊어진 게 아니라 애초에 늙은 적이 없다고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외모 그대로였어요? 당신이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탁자 위의 여소천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약관의 젊은이보다 어린 것처럼 보이는 외모.
키에 비해 발달한 특정 부위는 확실히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상이었기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의자가 아니라 탁자에 앉는 그 특유의 버릇은 여전한거로군. 그래야 간신히 다른 이들과 눈높이가 맞을테니."
-빠직
이번엔 여소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흐흠. 제가 고작 그런 걸 신경 써서 이런 버릇이 있는 것 같나요? 저는 그냥 이 위가 편해서 그런 거라고요?"
"그러면 탁자에서 내려와 보지 않겠나? 못 본 사이에 키가 자랐는지 한번 봐주도록 하지."
"으그윽.."
어려 보이는 외모라고 했던 만큼 그녀의 키는 좋게 말해도 크거나 평균 정도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유독 옛날부터 키 얘기에 민감했고.
나라고 남의 아픈 약점을 파고들고 싶지는 않지만 먼저 도발을 건 것은 저쪽이었다.
그리고 나도 반로환동 전에도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늙은 것은 아니었다.
"자, 부끄러워할 필요 없네. 피차 안 늙는 처지 아닌가. 20년이나 지났어도 키가 전혀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지."
"자, 자랐거든요?! 당신이 그렇게 무시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제대로 자랐어요?!"
"호오.. 그러면 더더욱 확인해 봐야겠군."
"으윽.."
그녀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자 그녀가 내 눈을 슬며시 피했다.
"정 일어나기 싫다면 그냥 내가 기감으로 그대의 몸을 훑어봐도 된다만?"
"그, 그건 안돼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면 어쩌자는 건가?"
"애, 애초에 당신이 제 키가 왜 궁금한 건데요! 당신이 제 키에 보탬이라도 하나 준 거 있어요?! 20년 동안 하나도 안 큰 거에 보태준 거 있냐고요!!"
조금 건드려줬다고 결국 자폭했다.
옛날부터 이런 성격이라 다른 동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곤 했었다.
하루하루 지쳐가는 전장 속에서 놀리는 맛이 있는 동료의 존재는 꽤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시, 실컷 놀려 놓고 이제 와서요?"
"더 하고 싶은가?"
"..아니에요."
오랜만에 만나도 역시 여소천은 여소천이었다.
가끔씩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그 분위기도 금방 깨진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굳이 이곳으로 불렀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라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텐데."
궁금한 점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이게 제일 궁금했다.
왜 하필 이곳으로 부른 걸까.
그녀도 나도 딱히 들릴 이유가 없는 이곳을.
"아. 딱히 당신에게 용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주된 용무는 다른 쪽이고 당신은 그쪽에 필요해서 부른 거지 용건 자체가 검후. 당신에게 있지는 않아요."
"흠?"
대놓고 곁다리 취급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취급이라 딱히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점쟁이를 이쪽으로 불렀거든요. 알고 보니까 유명하다고 소문이 많이 났던데요? 얼굴 없는 돈 밝히는 귀신이라고."
"자, 잠깐만."
"감사 인사는 해야죠? 무려 정파의 영웅, 검후의 목숨을 살린 사람인데."
그를 무림맹으로 불렀다는 말도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것보다 앞에 했던 말이 더 당혹스러웠다.
내 목숨을 구해줬다.
그가 내 이름을 쓰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붙여준 이유이지만 아직 이것을 다른 이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여소천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
"...아."
여소천의 푸른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있던 일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이용해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낭패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소천의 모습을 보면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그를 향한 악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쯤은 지금 상황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너무 많은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고 무림맹에 불려오는 것은 굉장한 관심이었다.
정말 무림맹에 왔다가 가는 게 아니라, 최소한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될 테니까.
"..누구를 불렀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의 위치는 하려고 한다면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문인, 방주, 가주들도 부를 수 있는 위치였다. 물론 적당한 명분은 준비해야겠지만.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마음 같아서는 전부 부르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다 부르는 건 한계가 있더라고요. 7명 정도 왔네요."
"..."
"아, 맹주는 당연히 불렀어요. 그 양반이 가기 전에 후계자 교육은 시켜 놨는지 깍듯하게 말은 잘 듣더라고요. 혹시 저를 모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탁
내가 이마를 짚게 만들었다.
"이, 이쪽으로 가는 게 맞겠지?"
안내해주던 사람과 헤어진 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아래층에는 나름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위쪽 층에는 사람도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다르게 해석하면..
'그만큼 이쪽에는 중요한 사람들만 있다는 뜻이겠지..'
-꿀꺽
금방 결론에 다다랐지만 오히려 목이 더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출세를 바라는 젊은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일개 점쟁이.
직급이 높은, 중요한 인물들과 만나는 건 오히려 꺼리는 것이었다.
괜히 만났다가 이상한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그런 게 없더라도 괜히 얽히는 것 만으로도 여러모로 곤란하게 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니까.
'안내해줄 거면 끝까지 안내해주기라도 하지..!'
뭐라나, 나 혼자 오라고 했다나. 그런 말을 하더니 자기는 쏙 빠져버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를 부른 사람이 내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은 인물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냥 조용히 살다가 산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였지만 이제 멸망을 막는 것도 목표에 반쯤 포함된 만큼 나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에 부딪히는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를 잘 사용해야 한다.
멸망을 막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러기 위해서 우선 알아야 하는 건..
'그래서 나를 왜 무림맹에서 부른 건데?!'
첫 단추부터 끼워야 하는데 바늘은 커녕 실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잠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상태에서 일자로 되어있는 복도를 계속 걸어가자 문이 살짝 열려있는 방이 보였다.
가슴을 졸이면서 문 안쪽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자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향해 말하는 한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무면금귀라고 불리는 자입니까?"
"네, 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그분이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로 부른 것은 아니니까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봤다.
30~40대 정도의 외모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남궁연. 부족하지만 본 맹의 맹주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사내의 자기소개에 나는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
.
.
-어버버버
"매, 매, 맹주님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의 무릎을 꿇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괜히 그랬다가 황실의 권위에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도 있고요."
아 그런가.
아무 생각 없이 무릎을 굽히고 있다가 그의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다시 무릎을 폈다.
상상 이상으로 높은 사람을 갑자기 만난 탓에 나도 모르게 무릎부터 꿇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겨우 그거 가지고 권위에 도전?'
모르긴 몰라도 맹주쯤 되면 정치적으로도 신경 쓸 부분이 많은 모양이었다.
정파 무림의 정상에 있는 사람이니 당연하겠지만.
"저기 근데.. 왜 저한테 존댓말을.."
"하하, 안 그래도 가끔 군사한테 꾸지람을 듣고는 합니다. 맹주쯤 되면 조금 위엄 있는 말투를 쓰는 게 어떠냐고. 그런데 말투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더군요. 신경 쓰지 마시죠. 원래 이런 성격이니."
"네, 네.."
"생각하던 무림맹주와는 달라 실망하셨습니까?"
"아, 아뇨! 그럴 리 가요!"
생각하던 이미지와 다른 것은 맞았지만 실망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생각했던 이미지는 좀 더 할아버지 같고 성격도 좀.. 딱딱한 성격을 생각하긴 했었는데 예상 외로 유순해 보이는 성격의 중년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면 편해졌지 실망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아, 지금 당장은 당신이 왜 불려왔는지가 제일 궁금하겠군요. 몸이 많이 굳은 걸 보면 긴장을 꽤 하셨나 봅니다."
"하..하.. 아무래도.. 처음 오는 곳이니까.."
"우선 당신을 부른 건 제가 아닙니다. 다른 분이지."
"네..?"
"청뢰검 여소천. 아십니까?"
-움찔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몸이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