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50)

앞길이 막막했다.

저번에는 그래도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방패라도 있었는데 이번엔 그것도 아니었다.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번엔 내가 주도적으로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걸 어떻게 뻔뻔하게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단 말인가.

'책임.. 져야겠지..?'

서로의 위치를 비교해 봤을 때 내가 책임진 다기 보다는 내가 사천당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는 형태일 테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지긴 져야 할 거다.

'근데 언젠가 산 속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 그 전에 멸망할지도 모르는 세상이고.. 그것부터 막아야.. 아으..'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구에서도 아랫도리 잘못 놀리다간 좆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힐끔

아직 옆에서 잠들어있는 당아영을 바라봤다.

-코오..

"..."

새삼스럽지만 생긴 건 참 예뻤다.

내 눈이 익숙해진 스승님의 외모와 비교하면 조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상위 0.1%쯤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검후님이나 당아영이나 외모, 신분, 재력, 무력 하나 부족한 점 없는, 만약 잡을 기회가 생긴다면 무조건 잡아야 할 일등 신붓감인 건 맞다. 나도 알고 있다.

나도 정말 배부른 소리라는 거 알고 있는데..

'연애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푸욱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내 처지는 스승님 몰래 강호로 나와 즐길 거리를 즐기고 있는 데다 갑자기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니 멸망을 막거나 이 세상을 탈출해야 하는 입장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라도 절대 연애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란 말이다.

하루가 급한데 언제 연애를 하고 감정을 교류하고 결혼을 한단 말인가.

만약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멸망하면 다 끝장인데.

'나 진짜 어떻게 하지..'

당아영과 어떻게 잘 해결 된다고 하더라도 검후님과의 관계도 또 문제다.

그런 말을 해 놓고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사고를 쳐?

'..절대 알게 하면 안돼.'

나를 향해 색마라면서 검을 휘두르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만.

검후님도 처녀였고.. 당아영도 처녀였는데..

그러면 나는 정파의 영웅이랑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난 여인의 첫 경험을 동시에 가져간 남자가 되는 건가?

'색마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데?!'

자세한 상황이고 뭐고 정리하면 저렇게 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쯤 되면 산으로 튀는 것도 가능할까 걱정되는 수준이다.

산 속까지 뒤져서 찾아오는 거 아닌가..

'아으으으.."

-벅벅

꼬여도 제대로 꼬여버린 상황에 머리를 쥐어 뜯었다.

진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이렇게 될걸 모르지도 않았을텐데 그걸 뭐가 좋다고 넘어가 가지고 이런 사단을 만든걸까.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았었다.

그렇게 내가 전날의 나를 욕하고 있던 순간

-스륵

"으응.."

당아영이 졸린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참고로 우리 둘 모두 알몸이었다.

"흐아암.."

막 일어나 눈을 비비고 있는 당아영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피부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피부에서 아주 윤이 나는 게 정기를 제대로 쪽 빨아간 것 같았다.

..실제로 쌩쌩해 보이는 그녀와 다르게 나는 기력이 꽤나 허한 상태였으니까.

"아.. 먼저 일어나 있었네요?"

"다, 당 소저.. 그게.."

"배고프죠? 잠깐만 있어봐요. 제가 맛있고 몸에 좋은 걸로 제대로 차려줄 테니까."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벗어나는 모습에 참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원래 저런 성격인 건지.. 아니면 어제 있던 일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당아영은 쌓여있던 무언가가 풀린 것처럼 굉장히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적당히 씻은 뒤 옷을 입고 식탁에 앉아 당아영이 해준 식사를 먹고 있었다.

"이번엔 힘 좀 써봤는데 어때요? 먹을 만 해요?"

힘을 썼다는 당아영의 말처럼 음식 맛은 상당히 괜찮았다.

웬만한 객잔보다 솜씨가 좋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맛있네요. 이걸로 장사해도 되겠어요."

"에이.. 뭘 장사까지야.."

"진짜에요. 매일 먹고 싶은 ㅁ.."

별 생각 없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황급히 삼켰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으려던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구에서 자주 들어본 프로포즈 멘트 중 하나였다.

'하마타면 큰일날뻔 했네.'

평상시에는 안 이래서 다행이지 평상시에도 이랬으면 아마 꽤나 골치 아팠을 거다.

"혹시 방금 하려던 말.."

"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흐음.."

가느다랗게 뜬 당아영의 눈을 피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굉장히 곤란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고 해야 하나.

"호, 혹시 밥좀 더 갖다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열량 소모가 좀 커서.."

"..뭐.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을 가져다 주었다.

근데 그 밥의 양이..

"...좀 많아 보이는데요."

"에이 많이 먹어야 또 힘을 쓰죠."

"네...?"

귓가에 당아영의 속삼임이 들려왔다.

"오늘 밤에도 기대.."

"저, 저 일하러 가볼게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은 상태로 망토를 순식간에 걸치고 당아영의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오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쿵!

문을 닫고 내 점집으로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오늘은 반드시 객잔에서 자자고.

.

.

.

-툭툭툭

일하러 가본다면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점집을 바로 운영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특별한 물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방치된 덕분에 먼지가 꽤 많이 쌓여있었고

"아이고 허리야아아.."

몇 시간 동안 혼자 고생한 끝에 간신히 먼지를 치우고 가게를 열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제 일 때문에 허리가 안 좋은 상태에서 혼자서 청소를 하니 허리가 굉장히 아팠다.

아픈 허리를 달래기 위해 잠시 뒤쪽 공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진짜 이걸 어떻게 하지..'

청소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거기서 딱 잘라서 거절하거나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어제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텐데 괜히 유혹에 넘어가서 이 사단이 벌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되돌릴 수 없어서 문제지.

'상점창에 왜 시간을 되돌리는 물건은 없을까..'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은 물건이었다.

귀환이나 소환처럼 1만포인트라는 터무니없는 가격만 아니라면 웬만하면 살 수 있을텐데.

정작 중요한 도움은 못 되는 상점창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여소천도 만나야 하는구나.'

상점창 생각을 하니까 또 그 생각이 났다.

여소천과 가까이 있으라던 성녀님의 말.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고 지금의 나로서는 유일한 단서가 그것 뿐이었기에 여소천과 접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곤륜의 도사라고 했었는데.. 그러면 곤륜에 있으려나?'

땅이 워낙 넓은 세상이다 보니 사람 찾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여자들밖에 없네.'

어째 주변에 꼬이는 게 전부 여자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그 순간

-똑똑

"계십니까?"

누군가 점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없는 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찾아온 손님인데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허리를 두드리면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끼익

"누구세요..?"

"아, 무면금귀..맞습니까?"

"보시다시피..?"

새삼스럽지만 내 외모는 소문을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징적인 것이었다.

망토 안쪽이 어둠에 뒤덮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외모가 어디 흔할까.

'손님인가?'

처음엔 손님이라고 생각했던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무림맹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산 속에서 뛰쳐나와 강호를 즐긴지 약 1년 반.

나는 졸지에 무림맹으로 끌려가게 생기게 되었다.

무림맹.

정파의 문파들이 모여있는 거대한 조직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중원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직이다.

저 먼 곳에 있는 마교와 사파, 황실의 입김이 강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중원 땅 대부분에 그 영향력이 미치는 거대한 세력인데..

'거기서 왜 나를 불러?!'

그런 데서 나를 부른단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나 뭐 잘못했나?!'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불려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의도로 불려간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로서는 여러모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내가 최근에 무슨 짓을 했더라 나 뭐 잘못한 거 있었나. 최대한 빨리 생각해야..'

눈앞의 사내를 그대로 세워두고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혹시.. 뭐 때문에 불려가는지 아시나요..?"

혹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저도 그것까지는 잘.."

눈앞의 사내도 명령만 수행할 뿐 아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네. 부른다면 가야죠.."

그냥 순순히 가기로 했다.

어차피 반항한다고 안 데려갈 것 같지도 않았고 괜히 반항하다가 한대 맞기라도 하면 그게 더 손해였다.

까짓거 그 무림맹에서 설마 나 같은 일개 점쟁이를 데려가서 죽이기라도 하겠냐는 생각도 어느 정도 깔려 있었고.

여기가 마교도 아니고 대놓고 섬서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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