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앉아주세요!"
-쿵!
"..깜짝아."
내 어깨를 꾹 누르며 다시 의자에 앉히는 당아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거칠어지면서 눈에 이상한 빛이 돌았던 것 같았다.
"아하하.. 조,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식사 거리를 가져올 테니까."
"네.."
"거기! 꼭!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네."
말을 끊어가면서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에 손을 무릎에 모으고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그 상태로 머릿속에서 양을 세면서 기다리고 있자 당아영이 금방 요리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메뉴 자체는 평범한 전과 고기였지만 내 시선은 음식에 향해있지 않았다.
-흔들흔들
"여전히 술 좋아하죠?"
"그럼요!"
유리에 담겨 탐스러운 붉은빛을 반사하고 있는 술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탁자 앞으로 상체를 내밀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술이었다.
저게 설마 차는 아닐테니까.
"그쪽이 돌아오면 같이 마시려고 준비했던 건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돌아와서 이렇게 늦게 마시게 되네요.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저 혼자 먹을뻔 했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술만 관련되면 이런 다니까."
아마 당아영이 내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내 시선은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스윽
당아영이 손으로 들고 있는 술병을 내 시선 밖으로 움직였다.
내 고개도 술병이 움직이는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풋."
"왜 웃어요!"
"아뇨.. 그동안 하나도 안 변했다 싶어서요."
이제 당아영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다 풀렸는지 내가 평소에 알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도 일부러 그런 거예요. 당 소저가 어색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괜히 자존심을 세워봤지만
"그러면 이 술은 다시 넣어 놔도 될까요?"
"..마시게 해주세요."
"푸흣."
괜히 자존심 세웠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검후님이랑 같이 다닐 때는 아무래도 어른(?)이시다 보니 감히 자존심을 세울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당아영은 친구처럼 느껴져서 어린애 취급 당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장난이에요. 원하는 만큼 드시면서 여행 중에 있던 얘기나 해주세요. 술은 많이 있으니까."
-쪼르르
비어있던 내 잔에 술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투덜대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대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대체 이 술은 어떤 맛일까.
"저기 근데 이 술이 조금 독하니까 천천히.."
-벌컥
"마셔야?!"
당아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을 내 입에 기울였다.
당아영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잔에 담겼던 액체는 목으로 넘어간 뒤였고
"으응.."
알코올이 식도를 자극하며 몸 전체로 짜르르한 감각을 퍼트리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한 뒤에
-파하
"이거 술 맛 좋네요!"
탄성을 뱉으며 당아영을 향해 다시 잔을 내밀었다.
당아영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천천히 마시라고 했잖아요! 조금 따랐으니까 망정이지 잔을 다 채웠으면.."
"그러면 더 좋죠! 저는 독한 술도 좋아하는데요!"
"하..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회포는 풀어야죠. 앞으로는 정말 조금씩 드세요. 여기 기껏 만든 전이랑 수육도 좀 드셔 보고."
"네에!"
"..벌써 효과가 조금 도는 거 같은데."
독하긴 정말 독한 술이었는지 정신이 약간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술이 쎈 몸으로 한잔도 안마셨는데 벌써 이 정도로 취하는 술이라니
대체 어떻게 돼먹은 술일까.
"당 소저는 술 안 드셔도 돼요?"
"..저는 따로 먹을 거에요."
그러면서 당아영은 새로운 술병을 하나 더 꺼냈다.
겉으로 보이는 색이 똑같은 걸 보면 아마 같은 술인 것 같다.
왠지 이쪽 술이 약간 분홍색으로 보이는 것 같긴 했지만 뭐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겠지.
-냠
당아영이 만든 전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입에 들어온 음식물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사이 당아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동안 편지 한통 못 보냈는지."
"아. 그게 말이죠."
당아영한테 대충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검후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고 그냥 어떤 검사랑 일행을 맺게 됐는데 그 사람은 안휘에 찾는 사람이 있어서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그 사람 여자에요?"
기습적인 당아영의 질문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여자가 맞기는 했지만 왠지 여자라고 하면 여자랑 단 둘이 여행을 다니게 된 셈인데 그러면 그것 가지고 또 뭐라고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아뇨. 남자요."
"흐음.."
그리고 뭐 일행의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비록 치료..를 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건 검후님과 내 문제지 당아영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니까.
"뭐, 계속 얘기해 보세요."
"그래서 안휘까지 도착을 했는데.."
이후에 있던 일은 거의 그대로 말했다.
일행이 사람을 만나러 간 사이에 내가 흡혈귀한테 납치를 당했고 그걸 일행이 구해주러 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저 먼 광동까지 날려 보내진 상태였다고.
그리고 내 진실 어린 설명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그걸 믿으라고요?"
차가운 불신이었다.
"그치만 사실인데요?"
"..하. 그게 사실이라고요."
"네. 진짜에요."
일행의 성별을 속인 것 말고는 전부 진실만 얘기했다.
"..."
당아영은 한참을 침묵한 상태로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면..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있어요?"
뭔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미처 질문 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그녀의 입은 열린 뒤였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많은 감정이 담긴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각사각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친구 사이.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녀와 나의 관계였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내가 그녀에게 진 빚이 있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일단은 저 정도였다.
"..친구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무슨 말 실수를 한 것 일까 걱정됐다.
"혹시 제가 무슨.."
"..있잖아요. 당신이 저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요."
-저벅저벅
당아영이 내 말을 끊으며 맞은편의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텁
의자에 앉아있는 내 앞에 서서 의자의 등받이를 잡는 그녀의 모습에서 약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한테 거짓말은 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네?"
"저 알고 있어요. 당신 일행이었다는 그 사람. 여자인 거. 그리고 보통 사이도 아니라는 것도."
"...!"
이미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것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 서야 그녀가 이렇게 기분이 상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친구라고 해 놓고 거짓말을 한 것에 기분이 상한 것이리라.
'근데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건 뭐지?'
설마 치료 행위에 대한 것까지 아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설마 그것까지 알 거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뭔가 오해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저기 근데.."
그래서 그것을 정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쉿."
그녀가 검지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손가락을 떼서 내 어깨에 올렸다.
"당신.. 저랑 헤어지기 전에 했던 약속은 기억 하죠?"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했던 약속.
"..당연히 기억하죠."
잠깐 잊기는 했지만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얼굴을 보여주기로 했던 것.
"갔다 와서 보여주기로 약속했었죠."
"..잘 기억하고 있네요."
-스윽
"그런데요.."
그녀의 손이 아래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이제 와서 얼굴은 별로 상관 없어요."
-번쩍
"?!"
순식간에 내 허리에 감긴 그녀의 팔이 나를 안아 들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몸이 들리면서 다리가 균형을 잡기 위해 버둥대던 그 순간
-츄읍
"으읍!"
내 입 안으로 당아영의 혀가 파고들었다.
얼마 전에 당했던 일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며 그때의 쾌락이 떠올랐다.
-추릅 츕 추읍
"으으읍!!"
"츕.. 발버둥.. 치지 마세요.."
몸은 갑작스럽게 들린 상황, 입은 영문도 모르고 유린 당하고 있는 상황.
내 몸은 본능적으로 나를 안아 들고 있는 그녀의 몸에 매달리는 선택을 내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