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나를 너무 믿어주시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대의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꼭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쓰지도 않을 테지. 눈에 띄기 싫어하는 성격 아닌가. 단순히 작은 문제 몇 가지 해결하겠다고 주변의 이목을 전부 끌어모을 짓을 할 배포가 있다고 보지는 않다만."
"..뭐. 그렇긴 하죠."
내 신변에 위협이 생길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내가 이걸 쓸 일은 없을 거다.
이 세상에서 큰 관심을 받는다는 건 곧 명을 재촉하는 일.
하다못해 본인의 무력에 자신이 있는 무인이라면 당장 일어날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겠지만 주변에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칼 든 일반인 하나 못이기는 나다.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사용할 생각은 없다.
"일단 사양하지 않고 받아둘게요. 다시 만날 수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혹시 그대가 부담스러워할 까봐 말하는 거지만 정말 그대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네. 나도 그대에게 빚이 있으니까."
"제가요?"
순간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의 말이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내가 검후님한테 빚을 지우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빚이 있네. 거의 내 목숨을 구한 정도의 큰 빚이."
"그 정도나..?"
당황하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뭘 말하시는 걸까.
"혹시 제 점이랑 관련된 거에요?"
"으, 응? 그, 그렇네. 그렇지. 음."
눈에 띄게 당황하시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딱히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도 점 외에는 없었다.
이런 몸으로 그녀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자신 있는 점 이외에 줄 수 있는 도움 따위 하나도 없을텐데.
"그렇구나.. 무슨 점이지.. 사소한 것까지 포함하면 은근 많아서 뭐가 뭔지.."
"그, 그대 입장에서는 사소했지만 내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라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네. 괜히 무리하지 말게. 그대가 기억하지 않아도 내가 그대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어.. 일단 알겠어요."
여전히 그녀에게 봐줬던 점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것만 말해주세요. 제 점이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준 거에요?"
그녀와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질문.
그리고 그 대답은
"..주화입마에 걸릴뻔 했던 것을 막아주었네."
'대체 뭐지.'
여전히 나로서는 추측이 잘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
.
.
검후님과 헤어진 뒤 우선 내 점집이 있던 위치로 향했다.
혹시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왔나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었고 보통 내가 그녀와 만나던 장소도 그녀가 점집으로 찾아오는 방식이었기에 이곳부터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래 점집을 운영하던 그곳으로 도착하자
"다행히 멀쩡히 있네."
건드린 흔적 하나 없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소소하게 감동을 받았다.
몇 달 동안 연락을 안 받으면 내가 죽었나 보다 하고 처분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남겨 놓은 걸 보면 내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처분 안 했을 수도?'
정확히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잘 모르지만 그녀의 재력을 생각하면 고작 가게 하나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그렇게 손해 볼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가게가 무사히 있는 걸 확인 했으니 다음엔 당아영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집이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하지만 집을 잘 사용하진 않는다고 했으니 우선 학관으로 찾아가 봤다.
"지금은 방학입니다."
"..여기 방학도 있어요?"
"네. 누구나 휴식은 필요하니까요."
이 학관 방학도 있었구나. 몰랐다.
'그러면 집에 있으려나?'
가끔씩 본가. 그러니까 사천으로 내려간다고 듣기는 했던 것 같지만 어르신들이 보기 불편해서 내려가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은 들었다.
집도 잘 안 쓴다고 듣기는 했지만.. 일단 지금 짐작 가는 곳이 거기밖에 없으니 별다른 수는 없었다.
전에 같이 가봤던 당아영의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헤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다가
'아, 그러고 보니 얼굴 보여주기로 했었구나.'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대체 남정네 얼굴이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고 목숨 걸고 보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뭐 이렇게 꽁꽁 숨기고 다니니까 궁금할 법도 하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나 같아도 궁금할 것 같기는 했으니까.
저번에는 왠지 불길한 기운이 들어서 여행 갔다 온 다음에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그 기간이 훨씬 길어져서 어쩌면 기억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단 오랜만에 왔으니 당아영한테 인사를 하러 가고 있긴 했지만 지금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원래 여소천이 습격했을 때 이딴 세상에서 더는 못살겠다고. 그냥 책이라도 싸 들고 산속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녀님의 말을 들은 뒤로는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산 속에 들어가면 뭐하겠나.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는 만큼 폐관수련에 들어간 스승님을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나오지 말걸 그랬나..'
산 속에서 지내던 10년 동안에는 정말 평화롭게 살았던 것 같은데 어째 나오자마자 일이 끊이질 않는다.
알고 보면 내 인생에 어떤 마가 낀 것 아닐까. 속세에서 지내면 온갖 사건 사고가 꼬이는 그런 마가.
'..에휴. 됐다.'
어차피 내가 산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멸망의 시곗바늘은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라 별로 다를 건 없었을 거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산 속에서 있다가 멸망을 맞이하면 했겠지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산 속에서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뱀파이어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신세 한탄을 해봤자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다는 소리였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소천을 찾아서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 뿐인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원.'
놀렸다고 삐져서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도망가버린 탓에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복수한다고 했으니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게 언젠지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복수할지도 모르니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일단 당아영이랑 인사나 하자..'
이럴 때는 그냥 순수하게 얘기가 잘 통하는 당아영이 그리웠다.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나 풀고.. 술이라도 마시자고 해봐야겠다.
요즘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상황이라 휴식이 필요했다.
-똑똑
"계세요?"
어느새 도착한 당아영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오...]
거의 정오가 다 돼가는 시간인데 갓 일어나기라도 한 듯 졸음기가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당아영은 집에 있던 모양이었다.
"저에요. 무면금귀."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별호였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좋아하는 별호는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이름을 밝힌 적이 없어서 이렇게 말해야 했다.
[아...]
내 목소리를 알아 들었는지 잠깐 낮은 탄성이 나오다가
-우당탕!
[자, 잠깐만 기다려요!!]
잠이 완전히 달아난 목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내부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당아영은 급하게 집 안에 남겨져 있는 흔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 답게 재빠른 몸놀림 덕분에 어지럽혀져 있던 물건들은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남에게, 특히 절대 그에게는 들켜선 안되는 물건들도 있었다.
당아영은 만일 그가 이것들을 보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고.
'..그것도 보고 싶은데.'
그 물건들을 장롱 안으로 밀어 넣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며 머릿속에서 그가 이것들을 봤을 때 일어날 상황을 생각했다.
만약 도망간다고 하면 그대로 뒤에서 잡아버린 뒤에 겁에 질려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를 안아 들고 싶었다.
순간 이런 욕심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위험한 상상이야.'
-드르륵
재현된다면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니 조용히 장롱을 닫았다.
이제 전부 치웠나 주변을 둘러보자 정작 가장 중요한 물건이 침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수련을 받던 당시에 대신 세탁해준다는 명목으로 받아왔던 그의 옷가지들.
시간이 지난 만큼 그 향이 많이 옅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의 옷가지들이 배게에 입혀진 상태로 수상한 액체로 여기저기 젖어있는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얘는 절대 들키면 안돼.'
-드르륵
다시 장롱을 열고 그것을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 * *
-우당탕!
'..치울게 많나 보다.'
한참 동안 안쪽에서 난장판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온 뒤
-끼익
"드, 들어오세요.."
묘하게 얼굴에 뭔가를 바른 티가 나는 당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저, 저는 잘 지냈죠. 아하하.."
'대체 안에서 뭘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당황하지?'
대체 짐을 얼마나 어질러 놨으면 이렇게 당황한단 말인가.
평소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로 집은 어지럽히고 사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이, 일단 들어오세요."
"실례할게요~"
나눠야 할 이야기도 많으니 우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도 느꼈지만 혼자서 살기에는 굉장히 큰 집 내부의 풍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철컥
'?'
어떤 쇳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와 비교하며 달라진 점을 찾기 시작했다.
'벽지를 새로 했나?'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저번에 왔을 때는 밤이라서 집을 제대로 둘러볼 시간도 없었기도 했고.
"왜, 왜요? 혹시 무슨 문제 있어요?"
"네? 아뇨. 딱히 문제는 없는데."
"그, 그러면 다행이고요.."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어째서인지 몸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단 여기 앉으세요. 식사는 했어요? 마침 저도 점심은 안 먹어서.. 혹시 괜찮으면"
"네. 같이 먹죠."
그녀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네, 네?"
그러나 당아영은 본인이 제안한 것 치고는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요? 같이 먹자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혹시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했지만
"아뇨아뇨아뇨. 별 일 아니에요. 아하하..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조금 어색해서.."
"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몇 달 만에 만났으니 기억이 흐릿해질 만도 하겠지.
나와 다르게 그녀는 이곳에도 친구가 많은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식사는 나중ㅇ.."
그녀가 이제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