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50)

차라리 산 밖으로 나오기 전, 스승님과 산 속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강호로 나온 뒤에 나름 쌓은 인연도 있는 까닭에 그들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근데 그렇다고 내가 멸망을 어떻게 막냐고..'

애초에 내가 왜 용사로 소환됐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왜 또 천지신명이 가로챘는지도 모르겠고.

'아으으..'

차라리 나한테 뭐 숨겨진 힘이라도 있다고 알려줬으면 그걸 믿고 뭐라도 해보겠는데 그것마저 모르는 상황이니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민해봤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성녀님이 말한 대로 여소천에게 접근해보는 것.

당장 이 상황에 대한 단서를 가장 많이 들고 있는 인물도 그녀였으니 성녀님의 말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역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거에요."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는지 검후님이 재차 물어오길래 걱정하지 말라고 변명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내가 어제 겪은 일을 말해도 될지는 아직 고민 중이었다.

쉽게 믿기 힘든 말이기도 하고 그러려면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도 말해야 하는데

'왠지 이건 말하면 안될 것 같아.'

내 미래를 볼 수는 없지만 뭔가 점쟁이로서의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왠지 그녀에겐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이 몸이 원래 내 몸도 아니라는 것도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도사니까 어쩌면 악령 취급 당할 수도 있고..'

그리고 실제로 잠을 많이 못 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가. 그러면 잠시만 이리로.."

-스륵

그런 내 말을 믿은 건지 검후님이 내 몸을 끌어당기더니

-포옥

"괜찮나? 혹시 불편하면 말하게."

내 머리를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흔히 무릎베개라고 불리는 자세였다.

"...검후님?"

"옛날에 제자가 이렇게 해주는 것을 좋아했네. 정작 어느 정도 큰 다음에는 부끄럽다며 피했지만."

"..."

"자존심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아뇨.. 딱히 그럴 것 까지는.."

스승님 때문에 익숙한 일이라 딱히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높은 경향이 있는 중원 사람들 특성 상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지만..

'편하네..'

나는 딱히 그런 건 없었다.

볼을 통해 그녀의 허벅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보기만 할 때는 체감이 잘 안됐는데 이렇게 직접 느껴보니 상당한 위력이었다.

'그래도 스승님이 더...'

항상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느껴지던 스승님의 수준도

'...이건 넘을지도.'

이번 만큼은 예외였다.

이성적인 매력으로서도, 편안함으로서도 이번 만큼은 스승님도 한 수 접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누운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저기.."

"졸리다면 자도 괜찮네. 나는 불편하지 않으니."

제자를 키우셔서 익숙한 것인지 모성애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위해서 입을 연 것이 아니었다.

"여소천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잠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마침 지금 옆에 있는 검후님은 그녀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여소천 말인가?"

"네. 그때.. 여러모로 특이한 분이셨어서."

참고로 검후님한테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냥 천기를 읽던 도중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것 때문에 경고하려고 오신 거라고.

어차피 검후님은 직접적으로 천기를 읽는 방법은 모르시니까 적당히 둘러댄 변명이었다.

당연하지만 키스한 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내 몸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까지 지울 수는 없었기에 여관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자꾸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얘기하시긴 했지만.

'오늘은 박박 씻었으니까 괜찮겠지.'

"여소천.. 특이한 자지. 중원에서 볼 수 없는 푸른 머리카락도 그렇고.. 반로환동했다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도 그렇고.. 도사 답지 않은 괴팍한 성격도 그렇고. 여러모로 비밀이 많은 자네. "

"성격이 괴팍해요?"

"음.. 입이 굉장히 험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편이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얼버무리다가 괜히 화를 내기 일수였지. 덕분에 옛날에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놀리는 게 하나의 놀이로 자리 잡기도 했었네. 실제로 외형은 소녀다 보니 귀여운 면도 있었고."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츤데레?'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검후님의 설명과는 거의 유사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유용한 정보는 아닌 만큼 일단 접어두고 다른 걸 질문하기로 했다.

"그러면 혹시 좋아하는 거나 싫어하는 건 아세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네. 아마 천기로 얽힌 인연이라 또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으음.."

검후님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잠시 후 입을 여셨다.

"그건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하나 있네."

"오, 뭐죠?"

"그대는 무영신투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무영신투.

20년 전 혈교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 중 한 명이자 그 이후엔 곧바로 무림 공적으로 지정되어버린 극과 극을 순식간에 오간 괴짜.

"들어는 봤어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온갖 문파나 세가들의 보물, 비급 등을 훔쳐 달아나서 무림 공적으로 지정됐다고.."

"그렇지. 근데 그자가 훔쳐간 물건은 그것만이 아니었네. 우리들의 물건도 훔쳐 달아났지."

-쩌억

입이 떡 벌려졌다.

설마 이 사람의 물건을 훔칠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일 줄이야.

"뭘.. 훔쳐갔어요?"

"각자의 애병. 그러니까 아끼던 무기를 훔쳐갔네. 그것도 천마에 의해 혈교주가 죽고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날에."

아하 그냥 또라인줄 알았는데 그레이트 또라이였구나!

"그걸 가만히 뒀어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영웅이라고 불린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영웅이자 신투라고 불리는 자. 그를 쫓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네. 그리고 당시에는 그보다는 갑자기 나타난 천마에 다들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분노할 기력도 없었지. 그 압도적인 무위를 보고 어떤 무인이 자신의 무기에 시선을 두고 있을 수 있겠는가."

뭐랄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틈을 노리고 무기를 훔쳐갈 줄이야.

"그러나 여소천만은 예외였지. 다른 이들이 그가 자신의 무기를 훔쳐 달아났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며 체념할 때 그녀는 정말.. 감히 입에도 담기 힘든 욕설들을 내뱉으며 분노했지. 잡히기만 하면 사지를 조각 내버린다는 말이 그나마 순할 정도로."

"..그 검을 정말 아끼셨나 봐요?"

"아마도 그랬겠지.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잘 때까지 본인의 검을 끌어안고 자는 이가 그렇게 흔치는 않으니까."

"흐음.."

정확히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는 조금 생각해 봐야겠지만 나쁘지 않은 정보였다.

잘하면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정보.

"그리고 그 이후에 있던 일도 나름 재밌는 일화이다만, 들을텐가?"

"그 다음에 뭐가 또 있어요?"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지."

검후님이 그때 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신투에게 그녀가 아끼던 검을 빼앗겼다는 걸 안 그녀는 처음에는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었네."

[아니야, 아무리 걔가 미친놈이라지만 설마 이럴 때에도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 분명 잠깐 장난만 치는 걸 거야. 금방 돌아오겠지.]

1단계. 부정.

"이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분노하기 시작했고"

[아아아악!! 그 개자식!! 잡히기만 해봐!!!! 동료고 뭐고 혼자서 숟가락도 못 들게 만들 거야!!! 뼈를 조각조각 내버려서 꽃밭에 뿌려버릴 거야!!]

2단계. 분노.

왠지 익숙한 단계였다.

"그 다음에는 협상을 하나요?"

"아니, 울음을 터뜨렸네."

"...네?"

"주변에 누가 있던 간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더군. 중간 중간에 허공을 향해서 지금이라도 나오면 용서해 주겠다고 제발 나오라고 말을 건네는 것도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네."

"하..하.."

예상 밖이었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녀를 놀렸을 때도 눈에 눈물이 거의 맺혀 흘러내리기 직전까지 갔던 것 같았다.

차가워 보이는 성격이지만 의외로 울음이 많은 걸까.

아무튼 다음에 만났을 때는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드디어 섬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와.. 진짜 얼마나 오랜만에 와보는 거지.."

원래 내가 운영하던 점집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온 뒤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 떠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래 나가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기치 않게 몇 달이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내 가게는 잘 있으려나.. 당아영도..'

말이 내 점집이지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당아영이 가게를 빌려주고 있던 상황이라 당아영이 무사하지 않으면 나도 끝장이었다.

그래서 원래 가끔 편지 하기로 했던 거였는데 갑자기 그렇게 먼 곳으로 훅 떨어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둘 다 무사히 있으면 좋겠는데..'

어느 쪽을 먼저 들러야 하나, 이 시간에 당아영이 원래 뭘 하고 있었나,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도중

"이제 당분간 작별이겠군."

검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감정이 억눌린 것처럼 느껴지는 덤덤한 목소리.

"정말 가시게요?"

"그대에게도 그대의 일이 있고 내게도 내 일이 있지 않나. 그대에게도 이곳은 편한 곳일테고."

"그렇..죠."

그래도 나름 둘이서 다니면서 정이 든 만큼 이제 와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약간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같이 다니기만 할 수는 없는 것도 맞는 말이라 아쉽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일개 점쟁이고 그녀는 무려 화산파의 검후가 아니던가.

있는 위치의 무게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히려 지금까지 같이 다니던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나중에 여소천에게 접근할 때 도움이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오랜만에 돌아왔으니까...'

당장은 오랜만에 안부나 전하고 일단 쉬고 싶었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할게 많아 피곤한 상황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다시 만나고 싶나?"

"그럼요. 제가 검ㅎ..아니 신 소저한테 얼마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아직도 갚을 빚이 많아요."

평소처럼 검후님이라고 부를뻔 했다가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 호칭을 바꿨다.

"빚이라.."

아까부터 묘하게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던 검후님의 표정에 약간 금이 갔다.

그녀도 나랑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일단 이걸 받아두게."

그녀가 내게 목패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뭐죠?"

"나와 연이 있다는 일종의 증표 같은 것이라 생각하게. 만일 내게 볼일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화산으로 오게. 미리 언질은 해둘 테니."

"..오."

듣고 보니 꽤 귀한 물건이었다.

무려 화산파의 검후와 연이 있다는 증표라니. 써먹기에 따라서 온갖 곳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악용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런 물건을 선뜻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반쯤 장난삼아 물었지만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네."

"...네?"

"그걸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무고한 자들을 핍박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데나 써도 괜찮네. 그대가 그럴 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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