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250)

특징이 너무 내가 아는 그것이었다.

실제로 상점창에서 뱀파이어들에 대한 언급을 꽤 자주 해주기도 했으니까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사님이 계신 '무림' 세계와 이쪽 세계 간의 차원 장벽이 약해졌고.. 그 때문에 아직 남아있던 언데드들의 사념이 그곳에서 부활한 거에요. 일부 뱀파이어들만 부활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현재 상황을 보면 뱀파이어 로드도 부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니까..]

"그거 때문에 이 세계가 멸망한다?"

[..그가 부활에 성공했다는 건 곧 다른 군단장들도 부활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죽지 않은 자들의 왕'까지 부활할 수 있다는 소리예요. 만약 정말 그가 부활에 성공한다면..]

그녀가 말을 하다가 말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질 말은 나도 알 수 있었다.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도 한번의 패배 이후 더 벼르고 있을 언데드 군단과.

"..."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성녀님의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멸망..'

성녀님의 말에 따르면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출현한 뒤에는 모든 게 늦는다.

존재 자체 만으로 모든 언데드들이 큰 폭으로 강화되기 때문에 전쟁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소멸하지 않는 한 언데드들은 죽지 않는다.

막대한 신성력을 쏟아부어서 소멸 시켜버린다면 모를까 무의미한 소모전이 반복되고

끝내 그를 소멸 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저주를 막지 못하면 이겨도 이기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 세상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나도 죽는 건가?'

완전히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남성이다.

성녀님의 세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본다면 내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는 힘든 상황.

"..그의 부활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그가 부활하기 전에 그 세계에서 활동 중인 군단장. 뱀파이어 로드 바르슈타인을 완전히 소멸 시킨다면 가능이야 하겠죠.]

"그러면.."

[하지만 그자는 교활한 자. 이미 이쪽 세게에서 한번의 패배를 겪었던 만큼 다시 소멸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을 거에요. 실제로 저희도 그자의 영혼을 8조각으로 베어버린 뒤에야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엔 소멸 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소멸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뭐하네요.]

"...후우."

한번 소멸했으면 그냥 곱게 갈 것이지 왜 굳이 다른 세상까지 와서 다시 행패란 말인가.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 세계의, 무림의 전투력이 어마어마 하다는 걸.

판타지 세계에서도 막아낸 언데드 군단을 무림이 막지 못하고 고전할 거라는 생각은 전투력만 고려한다면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세계에는 신성력이 없었다.

[그 세계의 성녀가 혼자 나름 고전 중이긴 한 것 같지만 그 무한한 물량의 언데드들을 계속 혼자 막을 수는 없을 거에요. 그녀가 뚫리는 순간 뱀파이어 로드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왕을 부활시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온 중원이 죽음으로 물들겠네요."

이 세상에 있는 힘의 대부분은 내공이다.

판타지 세계에 있는 신성력 같은 힘 따위는 없었다.

"..잠깐만. 이 세상에 성녀가 있어요?"

[네? 아까 만나 보셨잖아요.]

"아까..?"

그녀의 말을 듣자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여소천.

"..그 사람이 성녀라고요?"

아무리 봐도 성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 상상 속에 있는 판타지의 성녀와 그녀의 이미지가 쉽게 매치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당연히 세계가 다른 만큼 용사님이 생각하시는 분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성녀, 성자라는 이름의 정의는 신을 모시는 몸이자 동시에 그 신이 지상에 강림할 때 사용할 화신체의 역할을 하는 몸.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도 성녀라고 부르는 게 맞아요.]

"아.."

그런 의미의 성녀라면 납득이 갔다.

아까 하늘에게 몸을 뺏긴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들어맞았으니까.

[제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랍니다. 그 세계의 성녀와 신이 움직인 덕분에 간섭력이 꽤 넉넉하게 쌓였어요. 이렇게 채널도 연결할 수 있었고요.]

'..잘 된 거라고 해야 하나..'

채널이 연결된 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 세계에 닥치고 있는 위기를 알게 됐으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저는 뭘 해야 할까요."

이 세계가 곧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1.멸망을 막는다.

2.멸망하기 전에 이 세계를 뜬다.

1번의 경우에는 마왕이 부활하지 못하게 막는 쪽이 될 것이고 2번의 경우에는 1만 포인트를 서둘러 수급 하는 쪽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왕의 부활을 막는 법 따위 모르는 데다 1만 포인트를 수급 하려고 해도 현재로서는 돈을 왕창 버는 것 밖에 답이 없었다.

무려 금 1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느 쪽이나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

지금은 저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흠흠. 의지해 주시니까 기쁘네요. 그러면 앞으로 용사님이 하셔야 할 일들을 말해 드릴게요. 우선..]

그때였다.

-우르릉

허공에서 익숙한 먹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지금은 먼지만 한 크기였지만 나는 그게 어떤 먹구름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녀님도 그걸 모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 오늘은 여기서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잘 들으세요! 그 세계의 성녀를 이용하세요! 그 성녀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콰릉!

많이 급했던 것일까

먹구름이 손바닥 크기도 되기 전에 나타난 푸른 천둥이 그대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곳을 직격했다.

-지직.. 지지직..

"..저기요?"

망가진 TV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그곳에 대고 입을 열었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허공에 나타난 먹구름을 바라봤다.

'..혹시 나까지 혼내는 건 아니죠?'

괜히 성녀님과 대화했다고 나까지 피해를 보는 것 아닐까 싶어 속을 졸이고 있었지만

-스륵

"휴.."

다행히 그건 아니었는지 금방 흩어져 사라졌다.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을 두드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갑자기 여소천이 습격했고, 하늘한테 이상한 짓을 당했고, 휴식을 좀 취하려니까 다른 세계의 성녀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서 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소천을 이용하라고 했고.

'그런데 그건 또 저쪽 주장이란 말이지..'

아직 한쪽의 입장밖에 듣지 못했으니 어느 쪽이 내게 더 이득일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저쪽이나 이쪽이나 똑같은 납치범들이었으니까.

이쪽은 적어도 종마로 굴릴 생각은 안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그 대신 살아남는 게 힘든 상황이고

저쪽은 최대한 오래 살려서 종마로 굴릴 생각인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냥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대체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휘말리게 된 걸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양자택일을 강요한단 말인가.

"하아.."

한숨을 쉬면서 그냥 침대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자세라도 편하게 하고 싶었다.

'..만약 진짜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세상이 멸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것 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능력도 없는 내가 살아남기는 요원한 일인데다 정말 만약에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성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쳤을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그녀의 목적은 나를 불러오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정말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만 생각해보자.

세상이 멸망한다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목숨을 잃을 거다.

이때 내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스승님이었다.

만약 이 세상이 멸망해서 스승님이 죽는다면?

'...'

매번 괴팍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무려 10년 동안 함께하며 돌봐주고 길러주신 분.

그런 스승님이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든 1만 포인트를 모아서 나 혼자만 다른 세계로 도망간다고 하면.. 이 세상에 남은 스승님은?

갈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 세상이 곧 멸망할 것 같으니까 나는 튄다고?

'그런..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렇다면 결국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멸망을 막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의 편린도 알지 못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는..

여소천.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 * *

"..제자야."

"예. 스승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거짓 없이 대답해줄 수 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원래 스승님이 엉뚱한 짓을 자주 하셨으니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들어 본 스승님의 표정은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보통 질문은 아닐 것 같은 분위기.

"..예. 뭐. 말씀하십쇼."

물론 그렇다고 내가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스승님이 대체 어떤 질문을 하려고 저러시나 싶어 잠시 숨을 죽일 정도였는데 의외로 스승님의 질문은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네가 원래 있던 곳에서 연애를 해본 적 있느냐?"

"...예?"

연애 해본 적 있냐니. 무슨 애들도 아니고.

또 스승님이 장난을 치려고 저러시나 싶었지만 스승님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없습니다."

"..그러면 정을 나눠본 경험은?"

"연애에 이어서는 교접입니까? 그것도 없습니다."

고지식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섹스는 서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연애도 해본 적 없는데 정을 나눠본 적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가."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알 것 없다."

평소처럼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부채로 가려진 곳 뒤에는 왠지 웃고 있는 표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나? 오늘 따라 말이 없군."

"네? 아.. 괜찮아요."

다시 검후님과 함께 섬서로 돌아가는 마차에 탔지만 나는 더 이상 전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어제 들은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며 온갖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으니까.

'멸망..'

살면서 내가 특별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멋대로 다른 세계로 끌려온 게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걸로 딱히 이득을 볼 수 있는 삶을 살아왔던 것도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특별하다 기 보다는 특이한 일을 겪은 쪽에 가까웠다.

미래를 볼 수 있지만 정작 내 미래는 볼 수 없는 반쪽 짜리.

'역시 많이 아는 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야..'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통하는 말이지 지금 내 어깨 위에 있는 짐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다지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다.

굳이 내가 희생까지 해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성격은 절대 아니었지만..

'스케일이 보통 커야지..'

무려 멸망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인구가 몇억은 될텐데 그 사람들이 전부 죽어가는 걸 내버려두고 혼자 지구로 돌아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