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50)

[아, 아니에요! 원하지 않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용사님이 성교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저희는 용사님을 데리고 온 책임에 따라 극진한 대우를 약속..]

"퍽이나 그러겠다!"

물론 나도 성욕이 없는 건 아니다.

몸은 작다고 해도 건강한 성인 남성이고, 매일 아침에도 건강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저건 진짜 아니야.'

인구가 부족해서 다른 차원에서 종마까지 데리고 올 지경의 세상이다.

섹스를 정말 평범한 쾌락으로 즐길 수 있을까?

잘못하면 지하실에 감금돼서 죽을 때 까지 정액만 쭉쭉 뽑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용사님!! 이제 와서 이러시면 안되죠!! 이거 계약 위반이에요!! 용사님도 동의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계약 기억 못해요! 계약서 가져오던가!"

[용사님이 계약서는 필요 없다고 하셔서 안 만들었는데요?!]

"그러면 유감이고요! 저 말고 다른 용사나 찾으세요!"

[아, 안돼요!!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영혼이 흔한 게 아니라고요?! 용사님도 어떻게 찾은 건데..!]

"제가 알 게 뭐예요!"

하렘? 그래. 남자라면 한번쯤 꿈꿔볼 만한 것이긴 하다.

여러 여성에게 씨를 뿌리는 것도 생물적으로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겠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저 세계에 있는 여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막말로 오크 같이 생긴 여자들 뿐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에요!! 오크라니 말이 좀 심하시네요! 제대로 용사님의 심미안에 맞는 외모라고요?! 용사님의 이상형에 맞는 외모라고 자신할 수 있는데..!]

"이제 기억도 읽어요?!"

[앗.. 방금 건 잊어주세요.]

잠시 한숨을 쉬며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해봤다.

이쪽 세계로 오지 않았다면 저 세계에서 종마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종마 신세는 면한 지금은..

"..하아."

적어도 성적으로 괴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어디 갈 때마다 일이 생기는 세상이니까.

과연 어느 쪽이 나을까.

죽을 때 까지 정액을 뽑히면서 사는 삶이냐 산 속에서 지루하게 살다가 늙어 죽거나 재미 좀 보려다 눈먼 칼에 맞아 죽는 세상이냐.

"..."

두 손으로 눈을 감싸며 생각했다.

그냥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용사니임!! 비록 구두계약이지만 계약은 지켜 주셔야죠!! 용사님이 그렇게 나오시면 이쪽도 곤란해요!!]

"심신미약상태에서의 계약은 무효예요!!"

[저희 쪽에서 준비한 선물도 지금까지 잘 쓰고 계시면서 그러시기에요?!]

"선물은 무슨 선ㅁ.."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그녀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상점창의 존재.

원래(?) 저쪽 세계로 가기로 되어있던 내가 이쪽 세계로 오게 됐는데 왜 이런 게 있는 거지?

"..혹시 그 선물이라는 게 이 상점창 말하는 거예요?"

[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낯선 세계로 떨어지신 용사님을 위해 저희가 기껏 있는 간섭력 없는 간섭력 다 끌어모아서 드린 선물인데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시면 저희가 뭐가 되나요!]

이건 조금 놀랐다.

설마 상점창이 저런 이유로 생긴 것일 줄이야.

"근데 선물이면 그냥 물건으로 주지 그랬어요."

[직접적으로 물건을 건네드리는 건 간섭력의 소모가 너무 심해서.. 이런 식으로 우회해야 그나마 제대로 된 물건을 드릴 수가 있어요. 저희도 마음 같아서는 성물까지 다 퍼드리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성물까지요?"

[네. 드릴 수만 있다면 온갖 강화마법과 보호마법이 달려있는 7대 용사님의 성검도 흔쾌히 드렸을 거에요. 그 정도로 용사님은 저희에게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저건 조금 탐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성검인데 이런 몸이라도 어디서 비명횡사할 가능성은 훨씬 줄여주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저희는 용사님이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 '은둔자의 망토'를 구매하신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비록 허미트씨가 본다면 자신의 망토가 이런 곳에 쓰이고 있다는 것에 꽤 회의감을 느끼실 수도 있지만..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저희는 용사님이 최우선 목표를 '생존'으로 잡아주시길 바라고 있거든요.]

'은둔자의 망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망토의 이름이었다.

스승님의 예언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구매하긴 했지만 솔직히 2000포인트의 값을 하고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얼굴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통풍, 방한, 보온의 기능을 전부 갖춘 만능 망토이긴 하지만..

"이 망토가 그만한 효력이 있어요?"

성녀님이 저렇게 말할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반쯤은 컨셉질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구매한 것도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수수께끼의 점쟁이.. 같은 느낌으로.

실제로 나름 장사할 때는 잘 먹히긴 했는데 요즘은 장사도 안하고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검후님이랑 같이 다니다 보니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저 정도 반응이라니

사실 내가 모르는 기능이라도 있는 걸까?

[어..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조금 곤란한데.. 그 망토 덕분에 위기를 자주 넘기셨어요.]

"아 정말요?"

[네. 그 망토가 없었으면 용사님은 아마 지금쯤..]

"지금쯤?"

[..이건 노코멘트로 할게요.]

"쳇."

뭐, 기껏해야 싸움에 휘말려서 죽는 것 정도일 거다.

이 세상에서 그거 외에 당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내가 계약 위반을 했다고는 하지만 저것도 일단 저쪽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이쪽도 인생이 걸린 일인데 그것 좀 거절했다고 심술이다.

"그런데 제가 그쪽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와 주시게요?!]

"아뇨 그냥 말하시는 걸 보면 아직 포기 안 하신 것 같아서.."

나를 이쪽 세계에 뺏겼다고 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미련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10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아직 나를 다시 부를 수 있는 수단이 있으니까 저러는 것 아닐까.

[흐흠. 용사님을 간악한 신에게 빼앗긴 뒤 용사님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상점창을 한번 열어보시겠어요?]

"..이거 열면 바로 불려가는 거 아니죠?"

[저희도 아쉽지만 그건 아니.. 아, 아무튼 열어주세요. 그것 만으로 무언가가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상점창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눈에 띄는 변화가 한 가지 있었다.

항상 최상단에 있던 10000포인트 짜리의 '귀환' 바로 옆에 새로 진열된 상품.

[소환]

[가격:10000포인트]

[그 상품을 구매하시면 저희들의 세계로 넘어오실 수 있게 돼요!]

"이건 또 왜 이렇게 비싸?!"

[이 '상점창'의 매커니즘이 용사님이 확보하신 간섭력을 저희가 가공하는 형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허.."

귀환이랑 똑같은 1만 포인트라니.

이것도 27년 아니면 금 일만냥이라는 소리였다.

"..근데 저 '귀환'은 지구로 귀환하는 건 맞아요?"

[그럼요! 전혀 곡해 없이 용사님이 살아오신 행성 '지구'로 귀환하는 상품이에요! 저희가 목록을 준비하면서 용사님의 염원을 읽어 용사님이 가장 원하시는 상품을 하나 만들어지게 했었는데.. '귀환'은 그 결과물이에요. 용사님이 가장 원하시는 거죠.]

내가 지구로의 귀환을 가장 원했다라..

그러고 보니 처음 막 빙의 됐을 때는 못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땐 거의 죽어가는 몸이라 포션 사느라 바빠 상점창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뭐죠?]

"왜 '소환'이랑 '귀환'이 구매 버튼이 겹쳐져 있죠?"

두 상품의 [구매] 버튼이 서로 겹쳐져 있었다.

하나만 누를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어느 쪽이 귀환이고 어느쪽이 소환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아하하.. 오류가 발생했나 보네요. 저는 잘 모르는 일..]

"이거 정상화 안 하면 대화고 뭐고 그냥 끊을 거예요."

[아, 알았어요! 고쳤어요! 고쳤으니까! 부디 그것 만은!!]

진심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느껴졌다.

순간 깜짝 놀랐을 정도로.

[자, 고쳐졌죠?! 제대로 나눠 졌죠?! 확인 되셨죠?! 그러니까 끊으시면 안돼요! 도망가시면 안돼요?!]

"아, 알았어요. 확인 했어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얼굴까지 보였다면 눈에 핏발이 섰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휴.. 다행이다.]

내 대답을 들은 뒤 조금 안심한 목소리를 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한테 그렇게 집착하시는 이유라도 있어요..?"

인구가 부족해서 종마 목적으로 용사를 소환하려고 했다는 건 알겠지만 저렇게 까지 할 정도로 나한테 가치가 있을까.

남자가 멸종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해도 인구가 늘어나기는 할..

[했어요.]

"...아.."

남자가 멸종했구나..

그러면.. 그럴 수 있지.

응..

['죽지 않은 자들의 왕'.. 감히 입에 담기도 불경한 표현이지만 그가 생명을 초월한 죽음의 지배자의 자리까지 올라간 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그는 심장에 성검이 박혀 소멸하는 와중에도 이 세상에 저주를 걸었고.. 그 결과..]

"..."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게 되었죠..]

뭔가 함부로 입을 열기 힘든 분위기였다.

나야 지금 말로 전해 듣는 입장이지 저쪽은 그걸 실제로 겪었던 사람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라고 했을 테니 그 과정에서 잃은 동료도 많을 거고.

"그.."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저..

"힘..내세요?"

심심한 위로를 보낼 뿐.

[...]

잠시 생각에 잠긴 것인지 삭막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뭐 도와드릴까요?"

[아 그러시면 계약서 하나만 사인해 주시면 기운이 날 것 같..]

"멀쩡하네요?!"

진짜 무서운 여자였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서 건넨 위로까지 기회로 삼으려 들다니.

저쪽도 그만큼 상황이 간절하다는 뜻이겠지만.

[흐흠. 일단 용사님이 저희 쪽으로 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시고 계시는 건 알겠어요.]

"어.. 그렇죠."

섹스가 기분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죽을 때 까지 정액만 뽑히는 정액탱크로 전락하는 인생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용사님에게도 그 세계에서 넘어오셔야 할 이유가 있답니다.]

"..이유?"

[네. 그 세계는 말이죠..]

[곧 멸망할지도 모르거든요.]

.

.

.

"..멸망한다고요?"

[네.. 푸른 초목은 말라 비틀어지고.. 숲을 뛰노는 동물들은 생기를 잃은 채 자연의 거름으로 돌아갈 것이며.. 대지는 핏빛으로 물들겠죠.]

저주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저 말이 경험담처럼 느껴졌다.

[용사님도 이미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 그 세계에 나타난 흡혈귀들이.. 저희 세계에 있던 뱀파이어들과 같은 이들이라는 것 말이에요.]

"..그렇죠."

강시라고 하기에는 많이 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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