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50)

"...진짜 빠르네."

허공을 수놓은 푸른 벼락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말 벼락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 이게 뭔 일인지."

갑자기 웬 여자가 나타나서 그동안 천지신명을 모욕했다면서 볼기짝을 때리질 않나, 천지신명은 나를 구해준 거라고 하질 않나, 거기에 빡쳐서 더 도발하니까 아예 강림까지 해서 이상한 짓이나 하고..

'..근데 보통 벌로 그런 걸 하나?'

차라리 볼기짝을 더 따끔하게 때렸으면 벌을 주려나 보다 싶었겠지만 키스?

당하는 도중에는 정말 머리가 하얘지는 쾌락이었지만 끝나고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거 그냥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런..

-사각..

'아, 아뇨 죄송해요 제가 잠시 실언을 했네요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파도가 생기는 느낌이 들었었다.

아까 느꼈었던 그 쾌락의 파도가.

'휴.'

사과와 함께 말끔히 사라진 파도를 느끼며 그냥 조용히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마차행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마을을 들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슬쩍

옷을 들춰 속옷을 바라보자 약간 젖은 느낌과 함께 밤꽃 향기가 올라왔다.

'...살짝 샜었네.'

아슬아슬하게 절정 직전에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푹신

"아아아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이번에는 검후님과 다른 방을 썼다.

내가 요청하기도 했지만 검후님도 생각할게 있으셨던 모양인지 수락하셨고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두 명 분의 숙박비를 지불하고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뒹굴뒹굴

"행복해.."

이 여관 침대가 상당히 좋았다.

현대의 매트리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할 수 있다면 사서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평범한 침대인데 내가 지금 너무 피로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뒹굴

'...나는 여기 왜 오게 된 걸까.'

검후님에게 들은 이름. 여소천이라는 여인이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천지신명이 아니었으면 어떤 일을 당했을 거라고.

천지신명은 나를 구해준 거라고.

그때는 워낙에 열이 뻗쳐서 계속 욕 하다가 직접 강림한 천지신명에게 꼬리를 말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에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아..'

한숨을 쉬며 잠에 들기 위해 촛불에 다가가던 그때

-지지직

"...?"

갑자기 부르지도 않은 상점창이 나타나더니 이상한 노이즈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대로 멈춰 서서 그 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직 지지직

[..리세요! ..님!]

노이즈 사이로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마침내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용사님! 제 말이 들리시나요!]

'...응?'

상점창에서 들린 의문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 생각했다.

'이건 또 뭐야 시발.'

아무래도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용사님? 제 말이 들리시면 대답해 주세요! 용사니임!!]

갑자기 상점창에서 들려오는 의문의 여성의 목소리.

'..이건 또 뭐야.'

저 목소리를 듣자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용사가 뭔가 용사가. 여기가 판타지 세계인 것도 아니고 무림에 웬 용사가..

'...잠깐만.'

옛날에 잠깐 의심하고 말았던 사실이 생각났다.

'상점창에 왜 판타지 쪽 물건밖에 없지?'

상점창에는 이상하리 만치 무림의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판타지에도 있을법한 그런 물건이 조금 있긴 했지만 물건의 99%가 판타지 세계에만 있을 그런 물건이었다.

무림에서는 중원 전체를 뒤져도 나오지 않을 그런 물건들.

그것들을 보면서 상점창이 판타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당시엔 별로 상관 없는 일이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상점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판타지 세계와 연결된 상점창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렇다면 저쪽은..

[용사님! 제 말 안 들리시나요?! 분명 채널은 제대로 연결된 것 같은데!]

"..."

판타지 세계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순간 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 상점창은 어째서 있는 건지, 그게 왜 하필 나한테 있는 건지, 왜 이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지.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들려요."

이 목소리의 주인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었다.

[들리시는 거 맞죠?! 다행이다.. 분명 채널은 연결 됐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어.. 제가 많이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일단 뭐가 뭔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용사님! 제가 천천히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마침 지금은 간섭력이 널널하니까요!]

간섭력은 또 뭘까.

왠지 지구에서 있던 시절에 소설에서 자주 본 것 같은 무언가였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에르델. 생명의 여신님을 모시는 성국(聖國)에서 성녀를 맡고 있어요.]

"성녀요?"

[네. 여신님을 모시는 몸이자 그분께서 지상에 강림하실 때 사용하실 화신체의 역할을 하는 몸이랍니다.]

성녀가 뭔지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다.

당연히 나도 그게 뭔지 알고 있다.

'..그래. 뭐. 뱀파이어도 있는 마당에.'

무림에 뱀파이어가 나온 시점에서 성녀가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딨겠는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러면 성녀님이 저를 왜 용사님이라고 부르시는 거죠?"

나를 왜 용사라고 부르는 걸까.

내 무력은 굳이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고 그렇다고 다른 특출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천기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이게 그렇게 큰 능력인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판타지 세계에도 천기라는 게 있을 지가 의문이다.

[그야 용사님이 용사님이니까요!]

"저한테는 특별한 능력 같은 것도 없는데요?"

[용사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용사가 된 이후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랍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멋진 말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데요.

"하아..그러면 제가 질문해볼 테니까 거기에 대답해 주세요."

[네! 무엇이든 물어봐 주세요!]

"일단.. 당신이 말하는 성국이 있는 곳. 그러니까 이 '상점창'이랑 이어진 곳은 지금 제가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맞나요?"

사실 답을 예상하고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몰라서 해본 말이었다.

알고 보니 먼 서역에 있다거나 그런 거면 또 상황이 애매해 지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내가 예상한 것이었다.

[네. 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 용사님이 계신 세계.. 용사님의 말로는 무림으로 불리는 곳과 이곳은 다른 세계입니다. 아. 용사님은 있는 행성이 다르다고 하는 편이 알아듣기 쉬우실까요?]

"아뇨.. 이해 했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

"성녀님은 제가 이곳과는 또 다른 세계 출신이라는 걸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제가 어째서 이 세계에 왔는지도 알고 계신가요?"

상점창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짐과 동시에 가지게 된 것이다.

몸 주인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능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의 빙의와 상점창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은 당연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네. 용사님이 이곳과는 다른 세계. '지구'라는 차원에서 오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 몸이 원래 용사님의 몸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용사님이 가장 의문을 느끼고 계실 용사님이 이 세계로 오게 된 이유는 말이죠..]

상점창 너머로 잠시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용사님을 소환하던 도중에 그쪽 세계의 신이 용사님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너네 때문이잖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뒷목이야."

나는 뒷목을 부여잡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설마 내가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이쪽 세계로 납치 당한 데에 저런 이유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아니 근데 저를 왜 소환하려고 했던 건데요."

생각해보니 결국 납치범만 바뀌었을 뿐이지 저쪽이나 천지신명이나 내 입장에선 전부 납치범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내 의사는 상관 없이 멋대로 나를 소환하려 했던 거니까.

[요, 용사님도 동의 하셨었어요!]

"..제가요?"

[네! 지금은 비록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지만.. 용사님은 원래 저희한테 소환되기로 합의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그건 아무래도 차원장벽을 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한 것 아닐까..]

그나저나 이건 좀 충격이었다.

내가 원래 저쪽 세계로 가기로 했었었다니.

"그쪽 세계에 용사로 소환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마왕을 잡기 위해 개고생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희 세계의 마왕은 이미 소멸한지 오래거든요!]

'응...?'

"그러면 용사가 왜 필요한데요?"

[그, 그건..]

뭔가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용사는 마왕을 잡기 위해 소환되는 것일텐데 마왕이 소멸한 지 오래라면 굳이 용사를 소환할 필요가 있나?

왜? 어디에 써먹을려고?

"..혹시 일부러 마왕이 없다고 거짓말하는.."

[아, 아니에요! 마왕은 제대로 소멸했다고요!]

"그러면 용사가 왜 필요한 건데요."

[..후우. 알았어요. 설명해 드릴게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어요.]

그 뒤로 성녀는 자신들의 세계에 있던 일을 설명했다.

내용은 대충 상점창에서 나도 읽어본 적 있는 것과 비슷했다.

마왕. 제대로 된 명칭은 '죽지 않은 자들의 왕' 으로 그의 언데드 군단과 대륙의 모든 생명체들간의 긴 전쟁이 이어졌었다.

죽어도 죽지 않고 계속 부활하는 언데드들과의 치열한 전쟁은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고 끝내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이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과 그의 군단은 완전히 소멸했고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너무나 긴 전쟁이 이어졌던 만큼.. 인구가 절대적으로 너무 부족해졌어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의 피해는 단숨에 복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륙의 생명체들의 숫자가 90%가랑 감소했고 개중에는 아예 멸종해버린 종도 많다.

[그래서 회의를 한 결과.. 다른 세계에서 용사님을 모시고 와 인구를 늘리기로..]

"그건 종마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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