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50)

"부담 가지지 말거라. 스승으로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스승님이 내 머리를 마저 쓰다듬었다.

"오히려 미안하구나. 네가 곤히 자고 있어 금방 돌아오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거늘 설마 그 잠깐 사이에 깨어날 줄이야."

"아, 아니에요. 스승님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다. 스승이라는 주제에 네가 혼자 있는 것을 그렇게 무서워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한 내 잘못이다."

스승님과 눈이 마주쳤다.

기본적으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 눈 속에서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알아나가자꾸나. 시간은 많으니."

'다른 사람과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유독 혼자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표적으로는 선상에서의 일이라던가.

그때는 상황이 위험한 상황이라 겁을 먹었던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 상황을 모르는 상태로 아무도 없이 혼자 놓이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더욱.

'..그래도 돌아간 뒤에는 거리를 둬야 한다.'

지금같이 둘만 있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도 원래 섬서에서 살고 있었으니 그곳에 지인들이 있을 터.

그 뒤에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해도 너무 과보호 하려 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도 엄연한 성인이니까.

...비록 그 외모만 본다면 성인은 커녕 아직 소년처럼 보이는 외모였지만

외모로 나이를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가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옛 전우 덕분에 이미 익숙해진 일이기도 하고.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외모를 가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나?"

신비한 어둠에 감싸여 모자 안쪽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런 신비한 외형이면 불쾌감을 줄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게 되는 정도.

저런 피풍의를 어디서 구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굳이 저런 신비한 방법까지 써가면서 모습을 감추는 이유가 있나 궁금했다.

그 안에 있는 외모를 아는 입장에서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울 외모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별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냥 얼굴이 추하게 생ㄱ.. 아."

중간에 끊긴 그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추하게 생겼다니. 그가 추한 외모라면 이 중원에 있는 모든 이들이 추남추녀가 되는 것이었다.

-펄럭펄럭

"그러고 보니 이미 제 얼굴 아시죠?"

그가 모자를 손으로 쥐고 조금씩 흔들었다.

흔들거리는 모자 사이로 그의 귀가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변명도 소용 없겠네요. 원래 손님들에게 주로 쓰던 변명이었는데."

"..얼굴이 추해서 가리고 다닌다는 변명을 했었나?"

"네. 솔직히 제일 편한 이유거든요. 의심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요. 제가 못생겨서 가리고 산다는데 어떻게 뭐라 하겠습니까."

"흐음.."

그럴 것 같긴 했다.

본인이 추해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건가?"

"네. 스승님이 해주신 예언이 있었거든요."

"예언?"

"얼굴을 가리고 다녀라. 그 얼굴 때문에 나중에 큰 화를 입을 상이다. 이렇게 말하셨었어요."

"음.."

얼굴 때문에 화를 입을 상이라.

적어도 내가 보기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아니, 이 자의 스승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보았겠지.'

도사이긴 하지만 천기를 읽는 법을 전문적으로 수련 한 것은 아닌 만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에게 천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준 자이니 아마 무언가 뜻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가.. 미안하게 됐군."

"아. 괜찮아요. 별로 신경 안 써요."

과거 본의 아니게 치료(?) 과정에서 그의 얼굴을 봐버린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때를 생각하자 그 순간의 장면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성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녀리고 연약한 몸과 그에 어울렸던 그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후우.'

잠시 자제하기 위해서 스스로 코를 틀어 막아야 했을 정도였다.

분명 정신 수양은 충분히 했을 경지일텐데 그와 만난 이후로 정신을 제어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느낌이었다.

"뭣하면 다시 보여드릴까요?"

그 상태에서 들린 그의 말에는 순간적으로 자제심이 끊어질뻔 했었다.

"그, 그래도 괜찮은가?"

"뭐, 이미 보셨고. 우리 둘밖에 없는데 가리고 다니는 게 크게 의미가 있나요. 얼굴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꿀을 발라 놓은 것도 아닌데."

본다고 닳는 것은 아니겠지만 꿀을 발라 놨다는 말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와 비슷한 매력은 있었으니까.

마치 꿀을 나르기 위해 꽃으로 날아드는 벌처럼 그의 얼굴은 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아. 이런 의미였나.'

그제서야 그의 스승이 했다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의미였을 것 같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녔다간 상당한 여난에 휩싸였을 거라는 의미.

실제로 그가 소연이를 만났을 시절에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었으니..

'...현명하신 분이구려.'

속으로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의 스승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그래서, 보여드릴까요? 보고 싶으면 말하세요. 저도 밖에서 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

"..나 말고 그대의 얼굴을 본 이들이 없나?"

"아마 없는 걸로 기억해요. 아, 보여주기로 약속한 사람은 있네요."

-흠칫

얼굴을 보여주기로 약속한다니

말만 들어도 어딘가 불길하게 들리는 울림이었다.

나야 내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그의 얼굴을 본 것일 뿐 그가 내게 얼굴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그런 약속을 했단 말인가?"

"네. 저를 많이 도와준 친구거든요. 원래 안휘까지 여행 갔다 온 뒤에 보여주겠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네요."

"'친구' 말인가?"

"네. 친구요. 제가 맨날 가리고 다니니까 얼굴이 엄청 궁금했나 봐요."

"혹시 여성.. 아니네."

그 친구가 혹시 여성인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이게 무슨 추한 질투란 말인가.

그가 친구라고 했으면 친구인 것일텐데 혼자 괜한 오해를 하려는 것은 좋지 않았다.

-우르릉

"오늘 따라 날씨가 이상하네요. 날씨가 맑은데 자꾸 어디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

그때 밖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구름 하나 없이 화창한데 천둥 소리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많은 마찰을 겪고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등을 맞대곤 했던 전우.

[이 씨발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숫자만 더럽게 많아 가지고..!]

[...]

곤륜의 도사라는 이가 입이 너무 험해 나와 잦은 마찰을 겪고는 했지만 그래도 소중한 전우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의외로 속이 여린 인물이라는 걸 우리들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유독 신투가 그녀를 자주 놀렸었다.

그가 그녀를 놀리면 분노한 그녀가 검을 빼들고.. 그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도망가고..

치열한 전쟁 속에서 가끔씩 느낄 수 있었던 활력소 중 하나였다.

본인은 자신이 우리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우르릉!

그래. 이 번개 소리였다.

전장에서 이 소리가 울릴 때 그곳을 바라보면 푸른 벼락을 두른 그녀를 찾을 수 있었..

"..응?"

"..저기 갑자기 구름이.."

하늘을 바라보자 익숙한 구름과 푸른 번개가 보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상징.

"..여소천?"

구름 속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20년 전과 거의 변하지 않은, 전우의 기운이.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운과 함께

-흠칫

엄청난 양의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적의가 향하는 곳에는..

"히, 히익.."

그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움직임은 빨랐다.

허공섭물로 그를 최대한 마차 뒤쪽으로 보냄과 동시에 밖으로 나와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푸른 벼락에 휩싸인 그녀가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그녀의 뒤쪽으로 보이는, 구름까지 이어진 푸른 벼락의 궤적.

오랜만에 만난 전우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서로 대화는 필요 없었다.

무인에게는 무인의 방식이 있다.

-스으으

벼락의 속도를 그대로 머금은 푸른 빛의 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별도의 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나 나나 휘두르는 검 하나하나에 깨달음의 정수가 녹아있는 경지.

더 이상 초식이란 형(型)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다.

-채앵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맑은 검명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콰지지지직!!!!

푸른 벼락이 매화의 향을 태우고 있었다.

-카가각

"오랜만이에요 검후!! 그 사이에 하나도 안 늙으셨네요!"

"그러는 그대는..  오히려 더 어려졌군!"

-카앙!

검을 휘둘러 그녀를 떨어트렸다.

그녀도 예상 했다는 듯이 가볍게 착지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몇 년 만이죠? 15년 정도 지났나요?"

"20년도 더 지났네."

"아하. 벌써 그 모기들을 정리한 뒤로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었나요? 곤륜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모르고 있었네요."

20년.

분명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 둘 모두 전혀 늙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아하하, 당연히 잘 지냈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다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였지만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피로를?'

잠도 자지 않고 3일 밤낮으로 싸울 때도 쌩쌩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피로감을 느낄 정도라니.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그대가 이곳에는 왜 있는 건가?"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였다.

검을 잡으며 그녀를 향해 경계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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