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생각해보면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뱉은 말과 행동에 나는 크게 반응하고.. 결국 나중에 알고 보면 별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는 결과가 대부분이었다.
"...후우."
내공을 순환 시켜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일단 지금은 이런 식으로 내가 의도적으로 억누를 수 있지만 만일 그렇지 않은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날은 오면 안됐다.
절대로.
* * *
-다그닥
검후님과 다시 말을 튼 뒤에는 그나마 지루한 마차 여행이 덜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대화 하나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은 정말 너무 심심했으니까.
"그대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꽤 즐기는 것 같군."
"그래 보여요?"
"내가 대화를 거부할 때 까지만 해도 거의 다 죽어가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훨씬 괜찮아졌네."
"흠.."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지구에 있었을 때는 혼자 있어도 딱히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꽤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로 추정되는 것들은..
우선 처음 이 몸에 빙의했을 당시, 다 죽어가는 몸으로 혼자서 죽어나가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을 수도 있고
10년 동안 스승님과 함께 지내면서 혼자 있는다는 상황 자체에 처할 일이 거의 없던 덕분에 내성이 없어진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이 몸이 원래 그런 성격이었을 수도 있고.'
흔히 정신과 몸은 별개라고 하지만 결국 정신이라는 것도 몸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애초에 내 몸도 아닌 전혀 모르는 몸에 빙의한 상황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영향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든 정신이 깃든 곳은 몸이니까.
'건강한 몸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 다는데..'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망토 덕분에 체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아래에 어떤 몸이 있는지 아는 만큼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몸이라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 되는 것도 이해한다.
육식동물에게서 살아남을 생존을 높이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리를 짓는 초식동물로 비유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외로움을 느낄 만 하네..'
그렇게 생각하자 이런 성격인 것도 이해가 됐다.
본능적인 방어기제와 비슷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걸 아시는 분이 대화도 안 나눠주고 혼자 방치해 두셨어요?"
"읏.."
가벼운 장난으로 약간 삐진 척을 해봤다.
그냥 조금 놀릴 정도로 해본 장난이었는데 의외로 검후님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미, 미안하네. 잠시 깊게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랬네. 만일 내 행동으로 그대가 상처를 입었다면 어떻게든.."
'어우.'
얼굴빛까지 바꿔가며 격렬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나도 당황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장난이었어요. 겨우 그 정도로 제가 상처를 입겠어요?"
"그, 그런가?"
"네. 그냥 앞으로도 계속 같이 대화나 나눠 주세요. 저는 검후님이랑 대화를 나누는 것 만으로도 좋으니까."
"읏.."
아직도 오해가 끝나지 않은 건지 여전히 얼굴이 붉었다.
"제가 섬서에서 점집 운영했던 건 기억 하시죠? 그때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저는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아."
그날은 어째서 인지 더 이상 검후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우르릉
분명 하늘은 맑은데
이상하게 천둥 소리가 들리는 하루였다.
* * *
스승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부스륵
"..."
시원한 바람 소리와 벌레들의 소리가 들리는 깊은 밤의 숲 속.
나는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스승님..?"
습관적으로 내가 자던 곳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평소 스승님이 계시던 자리.
항상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 자리는 텅 빈 상태로 차가운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스승님..?"
재차 스승님을 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 어느 곳에서도 스승님은 보이지 않았다.
"..."
밤의 차가운 냉기가 몸을 집 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부스럭
침상에서 일어나 집 안을 둘러보며 스승님을 계속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스승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냉기만 느껴질 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
-스륵
그나마 아직 내 온기가 남아있는 침상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온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도 아주 조금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갑게 식어버릴 그런 힘없는 온기.
"...싫어."
이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거의 다 죽어가는 몸으로, 혼자서 뒷골목에서 썩어가다가, 험한 일을 당할뻔 하기도 했다가 간신히 저항했던 기억들.
잠에 들기 위해서는 주운 천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잠에 든 사이에 누군가가 접근하여 이상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어야 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웬 부랑배 두 명이 나를 들쳐 매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온 힘을 다해서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른 덕분에 주변의 이목이 끌려 그 둘이 나를 버려두고 도망간 기억은 아직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아니, 악몽은 꿈이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딴 세상, 이딴 몸으로 혼자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상태로 지구에 있는 내 방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도저히 놓을 수 없었던 그 희망의 끈과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더한 악몽이었다.
오히려 꿈은 달콤한 편에 속했다.
내가 지구에 있었을 때의 꿈을 꾸었으니까.
"아아.. 아으.."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숨이 가빠지고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을 만난 뒤 간신히 잊고 있던 현실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다시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이딴 세상에, 이딴 몸이 된 이후로 혼자 있던 시절의 기억은 전부 악몽이었으니까.
"스승..님..."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깊은 산 속이지만 집 밖에서 괴한이나 짐승이 나타날 것 같았고, 벽장이 열리면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야가 좁아지고 숨은 가빠지며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패닉 상태.
-부들부들
몸이 계속 떨리고 눈물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금방 오실거야 금방 오실거야 금방 오실거야 금방 오실거야..'
머릿속으로 계속 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이 몸을 진정 시키기 위한, 나 스스로를 안도 시키기 위한 자기 세뇌.
그런 불확실한 말로 쌓여가던 벽에는 순식간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만약 스승님이 나를 두고 가버리신 거라면?'
그럴 분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나는 아직 스승님의 정체조차 알지 못한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는 마음이 공포라는 감정에 잡아먹혀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가지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불 속에서 흐느끼며 아무 말이나 하는 것 뿐이었다.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그 말을.
.
.
.
-저벅저벅
발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발소리가 아닌 인간의 발소리.
"스승님?!"
나는 그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불 밖으로 나와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달려 나왔다.
"이 시간에 어째서 깨어 있.."
-와락
스승님이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나는 스승님에게 안겨 들었다.
"스승님.. 스승님.. 어디 갔었어요.. 가지 마요.."
"...제자야?"
"저한테 싫은 점이 있으면 바꿀게요. 저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바꾸고 원하는 게 있으시면 뭐든지 할 테니까.. 그러니까.."
-울먹울먹
이미 차오른 눈물에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간신히 참고 내뱉은 마지막 말은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용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절박함에 의존해 내뱉은 나의 본심.
그 말을 내뱉은 뒤 나는 스승님을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벗어나지 않도록, 벗어나지 못하도록.
스승님의 심장 고동이 들릴 정도로 몸을 완전히 밀착했다.
겨우 말을 내뱉은 뒤 아무 말도 없는 스승님을 보며 불안감을 느끼다가
-쓰담쓰담
"그래.."
머리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잠식하고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 스승이 너를 버리고 갔을 것 같아서 불안했느냐?"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시니까.."
"네가 이렇게 불안해 할 줄 알았다면 미리 말을 하고 갈 것을 그랬구나."
-스윽
스승님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적당한 크기의 짐승이었다.
"내일 먹을 식량이다."
"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고기가 먹고 싶다고."
"!"
그러자 며칠 전 스승님에게 투정을 부렸던 것이 생각났다.
산 속인 것은 좋지만 너무 풀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고기도 먹고 싶다고.
"그러면.. 저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라. 달밤에 마실을 나가는 도중에 잡아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짐승이니."
보기에 상당히 날쌔 보이는 짐승이었다.
스승님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처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는..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