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50)

그러고 보니 섬서를 떠난지도 꽤 오래됐다.

원래 오래 될 것 같으면 가끔씩 편지라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광동으로 날려 보내진 상황에서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당아영이 식물도 아니고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당아영이 유일한 탓에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아가씨. 부탁하신 정보입니다."

"수고했어요."

당아영은 종이를 펼쳐 그녀가 부탁했던 정보를 살펴보았다.

개방에 의뢰해 수소문한 '무면금귀'의 행적이었다.

'원래 이런 짓을 안 하려고 했는데 안 와도 너무 안 오잖아.'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하다못해 길어질 것 같으면 편지라도 하던가.

그런 것 하나 없이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의 인내심이 전부 닳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휘에서 마지막 흔적이 있었네요?"

"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꺼진 건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다고 하더군요."

"으음.."

혹시 불한당에게 납치라도 당한 것일까.

그의 연약한 몸을 생각하자 절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다음에 있는 글을 읽었을 때 그녀의 심경은 꽤 크게 변화해 있었다.

[실종 전 일행이 있었음. 성별은 여성이며 동행했던 사신들에게 물어본 결과 부부사이처럼 보였다고 함.]

-콰직

"..."

"아, 아가씨?"

"왜 불러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연 그가 섬서에 도착한 뒤 다시 점집을 운영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도사란 무엇인가.

주로 산속에 은거하여 속세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기인들로 술과 고기를 탐하지 않고 우화등선해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라고 일반 민초들은 생각하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도사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은 그들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당혹감이었다.

정말 제대로 된 도사들이라면 모를까 결국 인간인 이상 욕심은 있을 수밖에 없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사실상 대부분 자신이 도사라고 자칭하는 이들은 말만 도사인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애초에 제대로 된 도사들은 속세에서 멀리 떠나있어서 웬만해선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었기에 생기는 통계의 오류였지만.

* * *

-다그닥

말 발굽이 바닥을 짚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빛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마차만 타고 있는 것도 벌써 며칠째인가.

적어도 2주는 넘었다.

"..."

그제서야 내가 왜 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 속에서 도망쳐서 강호로 나왔었는지 다시 기억이 났다.

'심심해 미칠 것 같아..'

심심해서.

누가 들으면 어이없는 이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아니었다.

지구에서 빵빵한 인터넷으로 온 지구의 엔터테이먼트를 실시간으로 즐기며 살다가 갑자기 인터넷은 커녕 전서구로 편지를 보내는 세상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봐라.

'왜 하필 무림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다음에 저 한탄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하필 이런 몸으로 빙의한 것 다음으로 억울한 게 이거였다.

차라리 판타지였으면 즐길 거리라도 제법 많았을 것 같은데 하필 기술력도 안 좋고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인 무림이라니

만약 처음 빙의 될 당시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무조건 판타지 쪽으로 골랐을 것이다.

그쪽은 적어도 마법으로 돌아가는 수도꼭지는 있을 것 아닌가.

'..뭐. 지금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고 있지만.'

이제 와서 만약에 지구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면 꽤 고민은 해볼 것 같다.

1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추억이나 인간 관계를 쌓은 뒤라서 나 혼자 지구로 돌아가는 건 뭔가 아쉬운 마음이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상점창을 켜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최상단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품이 있었다.

[귀환]

[가격:10000포인트]

'진짜 가격 책정을 어떻게 한 거지.'

1만 포인트.

시간으로는 10000일. 약 27년 정도이고 금으로는 1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웬만한 거대 상단의 상단주 정도는 되어야 만져볼 수 있는 금액 아닐까.

적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모을 수 없는 금액임이 분명하다.

'천지신명님. 어떻게 10년 동안 장사하면서 할인 쿠폰 하나 안 주세요.'

어느새 하루 일과에 포함 되어버린 천지신명 욕하기.

내가 이 몸으로, 이 세계에 갑자기 빙의하게 된 것과 선심 쓰듯이 던져준 이 상점창이 하늘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멋대로 불러와 놓고 돌아가고 싶으면 27년을 기다리거나 금 1만 냥을 내라니

내가 욕을 안하고 베길 수가 없다.

양심 없는 가격 책정도 문제지만 천기를 읽으면서 하늘의 악취미에 놀아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것도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천벌 안 내리는 걸 보니까 익숙해졌나 보다.'

예전에는 조금만 욕해도 바로 구름 소리로 협박했었는데 요즘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일까?

-까득

'어떻게 더 괜찮게 욕할 방법이 없을까..'

재깍 재깍 반응이 돌아오던 때와 다르게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었다.

아까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심심해서 미칠 것 같은 상태.

천기모독을 할 이유는 충분했다.

'아.'

지구의 기억까지 뒤져가며 생각해보던 중 꽤 괜찮아 보이는 기억이 떠올랐다.

딱히 즐겨보던 건 아니었지만 제법 유행했었고 임팩트가 꽤 있었던 탓에 아직 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근데 이거 해도 진짜 괜찮나.'

혹시 했다가 정말 화나기라도 했다간 수습이 안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에이 설마.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그렇게 고생을 끼쳐 놓고 장난 좀 쳤다고 설마 죽이려 들겠는가.

심호흡을 한 뒤 생각하고 있던 그 대사를 날렸다.

'인세에 간섭도 제대로 못하는 허접♥'

[...]

왠지 불안해서 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응.

하늘을 놀리는 것을 포기한 뒤 다시 주위로 눈을 돌렸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검후님 하나였다.

그러면 진작에 검후님이랑 놀았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

그날 이후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 나와 대화를 거의 나눠주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말을 걸다 보면 어느 정도 대화를 해주기는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날 정말 제대로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혹시 내가 술에 취한 사이에 검후님에게 어떤 실례라도 저지른 것일까.

제대로 알 지를 못하니 뭘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럴 때 필요한 게 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검후님. 우리 대화 좀 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모름지기 대화로 풀어야 하는 법.

내가 선택한 것은 정면 돌파였다.

"..내가 지금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있다가.."

"그렇게 대화를 넘기기만 하신 게 벌써 2주째예요."

"..."

"혹시 저 싫어하세요?"

"아, 아닐세! 절대 아닐세! 내가 그대를 왜 싫어하겠는가!"

그냥 해본 말인데 반응이 엄청 격렬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을 정도로.

"아, 아뇨.. 검후님이 계속 저와 대화를 회피하시는 것 같길래.. 이제 제가 불편하신 건가 했죠."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내 말이 저렇게 볼을 붉힐 정도로 충격이었던 것일까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제가 불편하거나 그런 건 아닌 거죠?"

"무, 물론이네."

"다행이네요."

그녀가 괜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같이 다니면서 본 바로는 거짓말을 하면 티가 팍팍 나는 성격이었으니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딱히 문제가 없으면 같이 대화 좀 자주 해주세요. 저한텐 검후님밖에 없는걸요."

"...응?"

앞으로도 섬서에 도착하려면 멀었고 마차에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계속 혼자서 멍만 때리고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네? 지금 마차에 우리 둘 뿐이잖아요."

"아.."

검후님이 묘한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나?'

내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 * *

소연이를 만난 뒤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이후로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그와 이어질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조금이라도 덜 괴롭기 위해 그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섬서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부터 헤어졌다간 그가 섬서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섬서까지만 함께 가고 그 이후에는 제대로 거리를 두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매 순간 순간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가끔씩은 반드시 잊어야 할 그 치료의 날에 대한 기억도 떠올라 더더욱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번만 더 해보고 싶다는 심마의 유혹이 뇌리에 겉돌았고 결국 섬서로 가는 동안에도 그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있기에 그와의 대화를 회피하는 방향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미 생각 이상으로 중증이었던 모양이다.

"혹시 저 싫어하세요?"

저 말을 들은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그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한 행동이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내 이 행동으로 그가 나에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그 짧은 순간에 온갖 걱정과 의문이 차올랐다.

크게 당황해 손을 휘저으며 어떻게든 변명한 결과 다행히 그도 크게 낙심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딱히 문제가 없으면 같이 대화 좀 자주 해주세요. 저한텐 검후님밖에 없는걸요."

이 말을 들은 순간에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응?"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을 정도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인식한 뒤에는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열기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해소하고 싶은 그런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열망이 하복부로부터 올라왔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이런 뜨거운 열망을 향해 찬물을 부어버렸다.

"네? 지금 마차에 우리 둘 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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