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50)

기운이 흩어지는 것도 모자라 심각할 경우에는 주화입마까지 올 수 있었다.

"읍.. 크흡.."

간신히 비명을 틀어 막고 인상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웃으면서 내 손을 치웠다.

"비명을 참을 필요 없다. 당연한 고통일 뿐이니."

"으으윽..!"

"자, 어린 뱀파이어여. 다시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기대하도록 하지. 부디 나를 실망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우득 우드득

"꺄아아악!!"

몸이 비틀리는 고통 속에서

깊디 깊은 지하 안쪽에 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째액 짹

귓가로 들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창문 틈새로 눈가를 파고드는 햇빛.

"으음.."

나는 개운한 감각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내 몸이 멀쩡한지 확인하고 그에 대한 잠깐의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주변을 둘러보자

"일어났나?"

"어우 깜짝아!"

검후님이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몸을 뒤쪽으로 뺐다가

-쿵

"악!"

머리를 벽에 찧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으으.."

"괘, 괜찮나?"

"혹 난 거 같아요.."

"내, 내가 봐주겠네. 어서 모자를.."

"노, 농담이에요!"

농담이었는데 진짜로 내 모자를 벗기려 드는 모습에 기겁하며 손을 저었다.

그 정도로 세게 박은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아플 뿐이지 혹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 머리는 찧어서 아픈 것보다는 다른 이유로 아팠다.

"그것보다는 숙취 때문에.."

"...아."

-지끈지끈

이 몸으로 빙의한 뒤에 아무리 술을 퍼마셔도 숙취에 시달리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걸까.

중간부터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걸 보면 필름이 제대로 나갔던 것 같다.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평범한 물음이었다.

필름이 끊긴 뒤에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은 일상적인 질문에 불과하니까.

나도 특별히 무언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 아무 일도 없었네! 절대 아무 일도 없었네!"

"..."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반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몸을 살펴봤다.

설마 술에 취해서 다시 한번 사고를 쳐버린 것일까.

간신히 없던 일로 하자고 했는데 또 사고를 쳤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게 분명해 오싹한 감정으로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씻은 것 같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정말 별 일 없었나?'

검후님의 반응이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던 것 같은 반응이라 의심했는데 의외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거기 술맛이 정말 좋던데. 오늘 밤에 또 가볼까요?"

필름이 끊기기 전 남아있는 기억 만으로는 그곳의 술 맛이 정말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다녔던 주점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절로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흠칫!

"오, 오늘 또 말인가?"

그러나 검후님은 꽤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음에 안 드셨어요?"

"아, 아니.. 나도 좋았지만.. 어제 그대가 기절한 사이 무인들이 난동을 부린 탓에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피해가 꽤 큰 모양이라."

"저런.."

내가 당한 적은 없지만 일단 점집을 운영해봤던 입장에서 왠지 모르게 공감 가는 이야기였다.

이 세상에서 무인들의 난동은 그야말로 자연 재해 같은 거라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데다 나 같은 일반인들은 닥쳐오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자연 재해 같은 존재였다.

"그쪽 점장도 참 불쌍하네요. 뭘 잘못했다고 하필 거기서 무인들이 난동을 부렸대."

"그, 그러게나 말일세."

어째서인지 검후님이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청뢰검 여소천.

과거 혈교를 상대한 영웅 중 한명이자 곤륜의 기인으로 알려진 그녀는 가는 곳마다 구름과 푸른 벼락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해 한창 혈교와의 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는 싸우는 내내 모든 무사들이 하늘에 뜬 구름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구름과 푸른 벼락을 몰고 다니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전장을 누비며 활약한 그녀였기에 목격담이 적을 것 같지만 워낙 많은 전장을 돌아다닌 탓에 그 목격담이 제법 알려졌고 그녀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모두 말한 그녀의 특징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푸른 색이었다.]

중원에서 보기 힘든 것을 떠나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머리색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구심을 표했지만 목격담은 계속 이어졌고 그저 특수한 무공을 익혔겠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소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는데

[약관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생각보다 어린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젊다는 표현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말에 그녀가 곤륜에서 은거 중이던 신선일 거라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나갔었다.

반로환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신체가 전성기이던 시절, 높은 확률로 20대의 젊은 시절의 외모를 띄게 되니 그보다 더 어리게 보인다는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느낌을 받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깐 말이 나왔다가 이내 그녀를 향한 모욕이라고 생각해 금방 사그라들은 목격담이 하나 더 있었는데

[입이 굉장히 험했다.]

그녀가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것.

혈교인들을 베는 순간은 물론이요 아군을 구출하거나 지원하는 순간에도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그 험한 입에 피해를 본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소문은 제대로 퍼지지 못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백 번 양보해서 다른 문파라면 모를까 곤륜의 도사가 입에 욕을 달고 산다니. 쉽게 믿기 힘든 말인 것은 물론이요 괜히 퍼지기라도 했다간 보복이 돌아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아는 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오가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녀의 욕을 직접 들은 아군 중에서도 혼란스러운 전장의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금방 뇌에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덕분에 어지간히 본인의 기억력에 자신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계속 머릿속에 남겨두기 힘든 장면이었다.

* * *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곤륜산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거처.

그곳에선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냥해 보이는 신비스러운 외모였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본 이들은 그녀를 향한 환상이 금방 부서지곤 했다.

그녀가 다른 이들과 격리된 이 공간을 혼자 사용하고 있는 것에는 단순히 그녀의 곤륜에서의 위치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으니까.

"!!"

-벌떡

한참을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가 크게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께서 무언가 할 말이 있으시다!'

그녀는 서둘러 달려가 한 물건을 그녀의 손으로 가져왔다.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8개의 한자가 그려진 목패 한 묶음.

그녀는 그 물건을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우우웅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천기가 움직이며 상승하는 것인지 하강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기류가 몰아쳤다.

아무리 곤륜이 하늘과 가까이 살며 신선이 되고자 수행하는 도사들의 땅이라고 하더라도 명백히 인세(人世)를 벗어난 모습이었다.

-파직

그리고 그런 천기의 기류 속에서 한 줄기의 푸른 번개가 그녀의 정수리로 꽂혔다.

그러자 천기의 기류도 금방 사그라 들었고 어느새 그녀의 주위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천기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감히!"

그녀는 감았던 눈을 치켜 뜨며 그녀가 전해 들은 인물에 대한 정보에 분개했다.

일개 점쟁이 주제에 천기를 우롱하고 더 나아가 하늘까지 모욕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천지신명께서 베풀어준 은혜도 모르고 자신 주변의 좁은 세상의 모습만 보며 하늘을 욕하는 꼴이라니

가만히 뒀으면 큰일이 났을 운명인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게 누구인데 저런 배은망덕한 짓이란 말인가.

'용서 못해.'

교육이 필요했다.

하늘께서도 내가 그를 처단하게 만들기 위해 계시를 내리신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교육'이 조금 필요하다는 뜻만 전해주셨을 뿐.

-스릉

지금 한가하게 산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교의 그녀를 견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속세에 별다른 관심도 없이 마교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니 잠시 시선을 다른 쪽으로 거둔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콱 늙어 죽어버렸으면.'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늙어서 썩어 죽어버린다면 좋겠지만 그 괴물이 자연사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미련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 괴물 때문에 하늘께서 여간 곤란해 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

그러니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도움을 드려야 할 때다.

배은망덕한 이방인에게 제 분수를 알려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 * *

"와. 피해가 엄청 커 보이네요. 엄청 싸웠나보네."

"그, 그렇군."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검후님과 함께 사고가 있었다는 어제의 그 주점을 찾아가 보았다.

확실히 피해가 엄청 커 보였다.

건물의 거의 절반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으니 당분간 제대로 된 장사를 하기는 글렀다고 볼 수 있었다.

"아이고 그 여자가 경고만 하랬더니 다 부셔 놓으면 어떡해!"

그 와중에 한 남자는 주점에서 떨어진 나무 조각을 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튼 이 거대한 주점이 무너진 상황에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법 엇갈리고 있었다.

평소 주변 상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꼴 좋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상인들도 있었고 그런데 저 주점 덕분에 근처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제 어쩌지 라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진짜 위험한 세상이야.'

하룻밤 사이에 저 커다란 주점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내가 만약 건축가였다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장난 아니었을 것 같다.

열심히 설계하고 건축 해 놓으면 뭐하겠는가. 무림인들이 칼 몇 번 휘두르면 무너져 내릴 나무 조각인데.

참사의 현장을 확인한 뒤 검후님과 나는 그 자리를 나왔다.

잠깐의 일탈도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어쩌다 보니 안휘에서 광동까지 날아와 버린 것 아니던가.

섬서로 돌아가려면 갈 길이 멀었다.

"이대로 바로 섬서까지 갈까요? 아니면 또 중간에 어디를.."

"..바로 섬서로 가지."

"뭐, 그러죠."

비록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어제 술을 즐길 만큼 즐긴 덕분에 당장은 술 생각이 별로 안 났다.

굳이 욕심이 있다면 관광 욕심이 있긴 한데..

'..어딜 가도 또 사고가 터질 것 같단 말이지.'

가는 곳 마다 자꾸 무슨 일이 터지니 놀러 다니는 게 조금 두려워졌다.

검후님같은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으면 걱정이 줄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사고가 계속 나니까..'

정파의 최고 고수를 보디가드로 쓴다는 호화로운 상황에서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정말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인지.

그냥 섬서로 돌아가서 다시 점집이나 운영하면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당아영도 보겠네.'

왠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 것 같았다.

산에서 탈출해 이 세상으로 나온 뒤 검후님 이전에는 섬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

점집 차리는 것도 도와주고, 가끔씩 질 나쁜 손님들 상대로도 지켜주고, 나를 걱정해 줘서 나름의 호신술까지 가르쳐 준 고마운 사람이다.

정작 호신술은 한번도 써먹을 기회를 못 보고 있지만.

'많이 기다리고 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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