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 정 이해하기 힘들다면 아주 아주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유독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을 받아들여 하기 어려워 하는 모양이더군."
"..알았어."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 뒤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단이니, 차원의 생명을 건 싸움이니, 그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어난 일이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 오갔다.
"쯧. 육체가 재구성 됐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대로 살아났다면 아주 낭패를 볼뻔 했지. 그 신의 탕녀가 내 가슴에 쑤셔 박은 상처가 남아있었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테니까."
'은근 수다스럽네.'
처음 느껴지던 특유의 위압감은 어느새 사그라들어있었다.
그 뒤로도 설명은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종족. 죽지 않은 자(Undead)에 속하는 새로운 종족이었다.
피를 주식으로 삼으며 피를 마실수록 강해지고 머리가 베이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하는 괴물.
그게 내가 이해한 지금 내 몸의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흡혈은 어떻게 했나? 분명 엄청난 충동이 몰려왔을텐데."
"..안 했는데."
"..그 충동을 버텼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감각이 떠올랐다.
유성이를 만나기 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피를 빨고 싶은 충동이 몰려왔었었다.
하지만 유성이를 생각하며 참았었다.
내가 꼭 피를 빨아야 한다면 그건 유성이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그러면 지금까지 피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건가?"
"응."
"허어.. 어떻게 육체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지."
그렇게 심각한 일인 건지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한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되겠군. 내 피라도 마셔라. 내 친히 그 정신력을 봐서 내려주도록 하지. 영광으로 생각해도 좋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탁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굳히며 그 손을 쳐내 버렸다.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거부하는 건가? 내 피를 마시는 것은 뱀파이어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일텐데."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거짓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두근
내 의사와 관계없이 몸이 그의 피를 원하고 있는 것은 맞았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그 피를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유성이 외에 다른 남자는 손도 닿기 싫어."
그가 남자였으니까.
유성이 외의 남자였으니까.
내가 유성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만큼 나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자리도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말을 들은 것인지 그가 입을 열었다.
"아 이 몸이 남성이라서 불편했던 건가?"
"..."
"그렇다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나. 괜히 불편하게 했군. 잠시만 기다리게."
-딱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화가 끝난 뒤에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됐나?"
'...응?'
그동안 살면서 봤던 제일의 미녀는 스승님이었는데
그런 스승님과도 견줄 수 있을, 어쩌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절세미녀가 그곳에 있었다.
"바, 방금 이게 무슨.."
"다른 뱀파이어들이라면 모를까 이 몸은 생명조차 초월하신 죽음의 지배자인 '그분' 께서 직접 만드신 몸. 고작해야 생명 번식을 위한 시스템에 불과한 성별의 틀에 얽매여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몸에 정해진 성별 같은 건 없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섞여있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를 향한 적의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인피면구라도 쓴 거야?"
"그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가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렸다. 말하지 않았는가. 내게 정해진 성별 같은 것은 없다고."
"그, 그러면 지금은?"
"그대가 이 몸이 남성의 모습을 취했을 때 불편해 했기에 친히 여성의 모습을 취해준 것이지. 어느 쪽이 진짜냐는 의미 없는 질문은 삼가도록."
그녀의 말에 목 끝까지 올라왔던 질문을 다시 삼켰다.
실제로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을 생각해보면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긴 했지만 그녀는 남성이니 여성이니 그런 정해진 성별이 없는. 말 그대로 무성의 존재인 것 같았다.
-힐끔
눈을 흘겨 뜨며 그녀의 외모를 바라보았다.
정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절세 미녀였다.
그녀의 외모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냐. 이 몸의 아름다운 외모에 넋이 나간 것이냐?"
"..."
보통 저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물론 충분히 자신 있을만한 외모이긴 했지만.
"뭐, 자존심 상해 할 필요 없다. 이 몸에 비하면 발끝을 겨우 따라올 수준이지만 그대의 외모도 충분히 뛰어나니."
"고마..워?"
"음음."
이건 칭찬일까 욕일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를 이상한 말이었다.
그리고 외모 이야기는 둘째 치더라도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꿀꺽
"질문.. 하나만 해도 돼?"
"무엇인가?"
"그러면.. 생..식기도 있어?"
"하?"
내 질문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생식기가 있다면 교접이 가능하며 성욕도 있다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경쟁자가 될 수도 있어.'
그녀도 유성이를 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억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여성을 잠재적으로 유성이를 노릴 지 모르는 연적으로 보고 있다.
그게 설령 다른 종족일지라도.
그 정도로 유성이는 매력적인 남자고 설령 기존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성이를 본 뒤에도 그 마음이 그대로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 지. 그 방향성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역시 그대는 내 상상을 항상 뛰어넘는군. 설마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는데 말이야."
"..곤란한 질문이야?"
"아니. 뭐, 딱히 숨기고자 할 정도로 민감한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대가 이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군. 이 몸은 죽음의 지배자인 '그분'께서 만드신 몸. 좋게 말해봐야 번식 행위에 불과한 그런 저급한 행위를 위한 기관이 있을 이유가 있나?"
그녀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경쟁자가 된다면 정말 곤란할뻔 했다.
외모도 외모, 무력도 무력, 그녀의 휘하에 있는 뱀파이어들의 수를 생각해보면 재력까지 완벽할 강력한 경쟁자였을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뭐, 굳이 구현하려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
"아, 아니야! 그러지마!"
그 후로 잠깐의 소란이 있었지만 소란을 잠재우고 마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자, 이제 이 몸이 남성이라는 오해도 풀렸으니 괜찮겠지. 자, 어서 마시거라."
그녀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그녀가 유성이가 아닌 남성인 것도 아니고, 잠재적 경쟁자라는 문제도 해결 되었지만 여전히 망설임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또 불편한 점이 있나?"
당연한 이유였다.
"피를 빨아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피를 빤다는 불경한 행위를 이제 와서 하란다고 갑자기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죽기 전에는 도사였던 몸이다.
그게 아무리 몸이 피를 갈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직도 본인의 처지를 잘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대가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난 이상 흡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지금까지는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버틴 모양이지만 언제 까지고 흡혈 없이 버틸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역시.."
"아까 뱀파이어는 흡혈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지. 지금 그대에게 내 피는 영약이나 마찬가지다."
방금까지 있던 거부감이 단번에 확 트일 정도의 말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보통 영약도 아니지. 아마 지금 그대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영약도 내 피보다 뛰어날 수는 없을 거야. 아직 미숙한 뱀파이어인 그대에겐 말이지."
-꿀꺽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흡혈의 거부감을 훨씬 낮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전혀 거부하지 못하도록.
"아까 그대가 이곳으로 왔을 때의 상황을 보면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것 같더군. 그에게 복수해야 하지 않겠나?"
"...!"
머릿속에 한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님.
어릴 적부터 부모처럼 따른 분.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까드득
이제는 증오스러운 배신자일 뿐이었다.
나를 죽이고, 그 공백 동안 유성이를 탐한 끔찍한 배신자.
부끄러움도 모르고 손자뻘은 되는 아이와 정분이 난 창녀.
분명 유성이도 그런 여자는 마음에 들어하지도 않을 거다.
스승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봤자 결국 당사자는 없는 혼자만의 주장.
유성이가 그런 할망구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협박 당해서 억지로 따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구해주어야 한다.
스승님에게 강제로 사로잡힌 유성이를.
유성이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보통 힘으로는 안된다.
스승님을 이길 수 있는 그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피를 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
그러니 강해지기 위해서 흡혈 따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물론이다. 자, 결정이 섰다면 입을 벌려라. 직접 입 안으로 넣어줄 테니."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자 그녀가 검지 손가락을 뻗어 내 쪽으로 뻗었다.
-또옥
그녀의 가느다란 고혹적인 손가락에서 피 몇 방울이 흘러내려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피들이 내 목으로 넘어간 순간
-쿠웅
"크흡?!"
심장에서 갑자기 격통이 몰려왔다.
"으읍!"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틀어 막았다.
영약을 흡수하는 도중 입을 열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