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50)

'차라리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 좋겠다만.'

그가 일어난 다음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대가 취해있는 사이에 죽었던 내 제자가 살아서 돌아왔고 그녀와 싸우다가 혈교의 수작으로 인해 어딘가로 날려 보내 졌는데 나는 우연히 가까운 곳에 떨어져 금방 돌아왔지만 제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하군.'

자세한 설명은 그가 일어난 뒤에 하기로 하고 밖으로 향했다.

나가기 전 거의 깨지기 직전인 거울을 바라보자 평소와 다르게 차갑게 굳어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반가운 만남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불쾌한 만남이기도 했다.

차라리 오늘 일이 내 꿈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그와 술을 마시다 내가 조절을 잘못해 잠에 들었고 그 뒤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피식

'그럴 리가 없겠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며 그를 안은 채 마저 밖으로 향했다.

"우, 움직이지 마라!"

당연하겠지만 바깥도 난리가 나 있었다.

그 정도로 소란이 울려 퍼지는데 주변 문파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최소한 무슨 일인지 와보긴 해야겠지.

자세히 보니 무림맹의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도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날이 밝으면 할 테니 지금은 비켜줄 수 있나?"

"그..으.."

"일행이 많이 지쳐서 말이네."

그러나 내 부탁에도 불구하고 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약간 내공을 내뿜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길을 비켜줄 수 있나?"

진작에 이랬어야 했던 것일까

길을 가로막던 무인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네, 넵! 지나가십시오!"

"고맙네. 내 나중에 직접 찾아가지."

인파를 헤치며 적당한 객잔에 들어온 뒤

아직도 술에 빠져있는 그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후우."

안고 있는 그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맡는 것 만으로도 이성을 유혹하는 음란한 향기.

특별한 향수도 뿌리지 않는 것을 그동안 확인했기에 그가 타고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내 경지에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인데 다른 여인들은 어찌할까.

점장이 왜 그렇게 그에게 달라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행동을 이해해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나는 왜 그를 주점에 데려간 것일까.'

[당신도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야.]

소연이의 환청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치료행위를 하던 그날을 재현하고 싶어서 그를 주점으로 데려갔던 것일까.

그가 주점을 선택한 것이긴 하였으나 그가 술을 굉장히 좋아하다는 것을 알고도 그에게 주점이라는 선택지를 제시한 것은 나였다.

'...하아.'

그의 어깨에 목을 올렸다.

'참자.. 참아..'

무시하기 힘든 유혹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잊지 마라.

나는 죄인이다.

소연이가 살아 돌아왔다고 한들 내가 소연이를 잘못 가르쳐 그가 피해를 입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죄인은 속죄를 해야 하는 법.

감히 그를 마음에 품지 마라.

나에겐 그를 마음에 품을 자격이 없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잊지 마라.

나는 감히 그에게 마음을 품을 자격이 없다.

나는 소연이와 다르니까.

한편 그 시각

-쿠웅!

"커헉!"

쓰러져 있는 상태로 워프 게이트에 휘말린 검화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부딪혔다.

두 다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대처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워프 게이트를 처음 봤고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기에 몸이 멀쩡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무언가를 할 수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으으.."

바닥에 쓰러진 채 바닥에 부딪힌 머리를 만지며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확인 하려던 찰나

"호오. 그대는 누구의 권속인가?"

-흠칫!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의 것으로도, 여성의 것으로도 들리는 특이한 목소리.

-두근두근

단순히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듣는 것 만으로도 몸이 이상하게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인간을 벗어난, 죽은 뒤 되살아난 몸이.

"누, 누구야?!"

나도 모르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몸에 이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얌전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흐음.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꽤 건방진 권속이로구나. 감히 내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황급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목소리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그 자체로 칠흑, 밤을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내 것과 같은 붉은 눈.

나는 본능적으로 이 사내가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내가 되살아난 이유에 이 사내와 관련된 요소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사실도.

"자아. 우선 말해보지 않겠느냐? 네 주인이 누군지."

나와 마주친 사내의 눈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빛을 바라본 순간 정신이 어딘가 몽롱해지며 아름다운 그 외모에 정신이 빠져드..

"무슨 수작이야."

정신이 간섭 당하는 듯한 느낌에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응?"

내가 당연히 그의 질문에 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어딘가 충격을 받은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떻게 내 매혹을 깨부순 것이지?"

"매혹..?"

"분명 시전에 실패한 것은 아닌데..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사내의 눈이 빛났고 아까와 비슷한 감정이 몰려왔다.

-피잉!

쓰러진 상태로 검을 들어 사내를 향해 쏘듯이 날렸다.

조준이 미숙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검은 사내의 머리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 벽에 박혔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한테는 유성이 뿐이니까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마."

"...흐음.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리가 없을텐데.."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게 무슨."

"뭐, 좋다. 평범한 권속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축하한다 어린 뱀파이어여. 그대는 이 죽지 않는 자들의 군단. 제 3 군단장. 뱀파이어 로드 바르슈타인의 시험에 통과했다."

-딱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여전히 내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 뿐이었다.

뱀파이어니, 죽지 않는 자들의 군단이니, 맥락상 바르슈타인이 사내의 이름이라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말들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혼란도 잠시

-착

"이, 이게.."

"눕거나 엎드려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실례겠지. 작은 호의일 뿐이니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하반신을 바라보자 스승님에 의해 깔끔하게 베어졌던 다리가 언제 잘렸었냐는 듯 말끔하게 회복되었다.

신의라고 해도 상당한 수술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그것을 저 사내는 손가락을 튕기는 행동 하나로 해결했다.

"자, 우선 앉아라. 물어볼 것이 많으니."

사내가 말하자 내 앞에 붉은 의자가 나타났다.

보면 볼수록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장면들.

사술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나는 상황이었다.

"내가.. 왜 당신과.."

"내가 그대를 인정하긴 했다지만 그것이 그대의 무례를 끝없이 봐주겠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싹

사내의 몸에서 나온 기운이 몸을 훑자 순식간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이 경종을 올렸다.

이 사내에게 계속 반항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알았어."

"존댓말은 하지 않는 건가?"

"나는 아직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내 기운을 본 뒤에도 그런 반응이라니. 아주 당돌해. 하지만 그런 점도 마음에 드는군. 오랜만에 괜찮은 장난감을 찾은 기분이야."

사람을 멋대로 장난감 취급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쁠 만도 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의 힘이라면 그것도 이해가 갔다.

스승님과 비슷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는 영역.

그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보일 만도 했다.

"자, 다시 묻지. 그대의 주인은 누구인가?"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몸을 휘감았다.

만일 거부했다간 모처럼 얻은 새로운 삶을 이대로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주인이라는 게 뭔데."

그가 의미하는 '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노예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음? 그대를 살려낸 자가 있을 것 아닌가?"

"나를 살려낸 사람..?"

"그가 설명해 주지 않은 건가? 아니.. 근데 설명하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알게 될 터인 것을.."

그의 말을 듣고 내가 막 되살아났을 때를 생각했다.

음..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유성이밖에 없어.]

"...모르겠어. 깨어난 뒤에는 혼자였어."

"되살리는 과정에서 사고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드물지만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아. 하지만 권속이 주인을 잃은 뒤에도 움직인다라.. 흥미롭군."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다. 원래 대로라면 그대의 주인이 설명해 주었어야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친히 내가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대는 이 중원이라는 세상에서 나고 자랐겠지? 그리고 그 뒤에 모종의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을 거고?"

"..응."

"쉽게 말하자면 우리들. 중원의 언어로는 흡혈귀(吸血鬼), 혹은 혈마(血魔)라고 불리는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이 중원이라는 세상이 아니라."

"..."

잠시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새외무림을 말하는 건가?"

"아니. 아예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 다른 차원. 이 별과는 다른 별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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