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250)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상한 부분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목소리였나?'

방금 전까지도 만취해서 혀도 꼬이고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상태였는데 지금 숫자를 세는 목소리는 너무나 또박또박 했다.

차갑고, 무심하게 느껴지는, 사무적이라고도 느껴지는 목소리.

단순히 의미 모를 숫자를 세는 행위였지만 어딘가 위화감을 느낄 정도의 장면이었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 사이에 술이 전부 깼나..?'

내가 이 사내를 만난 것이 그가 만취한 이후였기에 평상시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하긴 했었다.

"1.."

"손님..? 그러니까 그 숫자가 대체 무슨.."

"끝."

저렇게 말하고 그는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정확히는 드러 눕는 것 보다는 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뒤로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별로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

지금 나는 이 상황에서 엄청난 의문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다 잡은 줄 알았던 물고기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다니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다시 정신이 나갔다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가능성 높은 이야기였다.

"하.. 됐다. 그냥 이대로 바로 침대로 데려.."

망토를 벗기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침대로 데려간 뒤에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그를 들어 올리려 팔을 뻗자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오싹

여기서 들려선 안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스승님. 스승님은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오신 겁니까?"

평소 스승님이 아끼시던 구슬을 만지작 거리며 마루에 누워계신 스승님께 말을 걸었다.

"이런 거라니 무엇이 말이더냐."

"전부 말입니다. 천기를 읽는 것도 그렇고, 매번 짐승들을 잡아 오시는 본신의 무력도 그렇고, 불을 다루는 주술이나 부적 등등.. 익히신 기술이 상당히 많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기술이라.."

스승님이 숨을 쉴 때마다 두 거대한 덩어리가 위 아래로 조금씩 움직여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었다.

하루 이틀 본 장면이 아니라 이제 옛날과 같은 큰 자극은 없었다.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레 잡다한 기술을 많이 익히게 되는 법이니라."

"스승님이 그렇게 오래 사셨습니까? 대체 얼마나 오래 사셨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여인의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그러면 나이 많은 티를 그만 내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쯧. 오늘 밤에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렇게 잠깐의 휴식이 끝난 뒤에는 집을 청소해야 했다.

"스승님. 혹시 요즘 머리카락에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풉!"

"요즘 따라 금색 털이 자주 보이는데 우리 집에 이게 나올 곳이라고는 스승님의 머리카락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날 어째서인지 온몸에 힘이 없어 이불 밖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스승님이 짐승을 잡아오셔서 금방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소, 소, 손님이 왜 여기 계세요?"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 그, 그럴 리가요! 저, 저는 갑자기 손님이 사라지셨길래 이분이라도 잘 보살피고자.."

등 뒤에는 분명 게이트로 저 멀리 날려 보냈을 남자의 일행이 서있었다.

두 여자 중 스승쪽.

아까 나와 그를 두고 경쟁한 그 여자였다.

'분명 마법진은 작동 했는데?!'

분명히 확인했다.

마법진이 작동했고 두 여자 모두 이 자리에서 사라진 게 확인이 됐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분명 도착 좌표를 교란 시켜 놔서 아무 곳이나 랜덤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

'..설마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법진이 작동해 날려 보내지긴 했지만 그곳이 하필 이 근처였다는 생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시발.'

내가 정말정말정말정말 운이 없다면 말이다.

랜덤으로 날려 보냈는데 하필 근처에 떨어진다니. 이건 신의 농간이 분명하다.

"글쎄. 내 눈에는 그대가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만."

"하하.. 오해죠. 당연히 오해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손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했다.

생각해라.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꿀꺽

"손님. 제가 전부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진정하시고.."

"침대로 데려간다고 했던가?"

아.

"..."

거기부터 들었구나.

이건 또 어떻게 변명해야..

'아.'

"하하.. 이미 날도 늦었고 손님이 쓰러져 계시길래 많이 피곤하실 거라 생각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자리를 제공해 드리려고 한 것 뿐 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목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호오."

-삐질삐질

간신히 생각해낸 변명을 내뱉은 뒤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여인의 반응을 살폈다.

계속 해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보아 절대 순순히 속은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숙이고 있지?'

생각해보니 이쪽에서도 조금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남의 매장에서 신나게 치고 박고 싸운 게 누군가.

주인으로서 그들을 내쫓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이자 꼭 해야 하는 의무 아니던가?

이쪽은 엄연한 피해자고 저쪽은 남의 장사를 망쳐버린 가해자였다.

그래. 이쪽은 좀 더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손님. 오늘 일행 분과 싸우시느라 저희 매장이 입은 추정 손해액이.."

그리하여 입을 열었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일세."

손님이 내뱉은 말에 자연스럽게 내 말은 끊길 수밖에 없었다.

"..뭐죠?"

"사람들 다른 위치로 이동 시키는 진법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런데.."

-흠칫

방금 전까지 웃음을 짓고 있던 여인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릉

"그대들도 혈교의 잔당들인가?"

어느새 그녀의 검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꿀꺽

혈교.

이 세계로 건너오면서 로드께서 차지한 세력이라고 들었다.

과거 이 세계를 거의 지배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이 세계의 마왕 비슷한 존재를 잘못 건드려 멸망했고 그 뒤 집단을 재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우연히 로드께서 이 세계로 건너오게 만들어줬다는 것은 들었다.

그 뒤 당연히 로드께서는 혈교를 차지하셨고 이후 우리의 원래 세계에서 함께했던 뱀파이어들도 불러와 세력을 넓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이 여인이 말한 것으로 추정해 봤을 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뱀파이어에게 원한이 있고

그 뱀파이어가 워프 게이트를 이 여인 앞에서 사용한 적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시발.'

나는 이제 큰일 났다는 소리였다.

"소, 손님. 혈교라니 그게 무슨.."

-푹

시치미를 제대로 떼기도 전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스윽

소리가 들린 곳을 내려다보자 눈에 익은 검이 내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그래. 그래도 죽기 전에 최대한의 반항 정도는..'

어차피 죽을 목숨인 것은 정해져 있었지만 이대로 순순히 죽을 수는 없었다.

재생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해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해 그대로 뻗었지만

-서걱

그것보다 내가 보는 세상이 반전 하는 것이 더 빨랐다.

'아..'

까맣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위험한 남자한테 잘못 빠져버렸다고.

* * *

"..혈교의 잔당이라면 살려둘 수 없네."

목을 잃고 쓰러진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떠한 수작을 부리려고 할 때 눈에 나타난 붉은 빛은 명백히 혈교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였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나는 상대가 혈교라면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그들을 상대로 베푸는 자비는 자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교만과 방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절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이 세상에 오래 살아있어 봐야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뿐이니까.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그대의 자리가 있기를 바라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를 내뱉은 뒤 몸을 돌렸다.

소연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신도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야.]

'..다를 것 없다라.'

내가 방금 벤 여인은 그를 노렸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어서 안될, 세상에 이로울 것 하나 없이 존재 만으로 피해만 끼치는 혈교의 잔당이기에 벤 것이지

절대 그런 종류의 사심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소연이와 다른 인간이라고.

"..."

바닥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밟으며 부점장이라고 불리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점장이라는 여인이 죽자 그 자리에서 실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기습을 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는 주술인가.'

현재 내가 본 정보 만으로는 이런 종류의 주술일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외에는 아는 정보가 없으니까.

'혈교에는 정말 별에 별 주술이 다 있군.'

그래도 죽은 자를 향한 예의로 죽은 뒤에도 감기지 않은 눈을 감겨준 뒤 싸늘한 시체로부터 등을 돌렸다.

-철벅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밟으며 쓰러져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번쩍

"괜찮나?"

"이히히.."

"..괜찮아 보이는군."

이 상황에서도 술이 깨지 않았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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