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이 생명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하늘에게 빌 뿐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유성이를 불쌍히 여긴다면 부디 화산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해주소서.
그리고.. 부디 들어간 뒤에도 엄한 이들이 아니라 좋은 이들을 만나 제가 없더라도 유성이가 잘 살아갈 수 있기를..
-피식
빌고 나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들어간 뒤 엄한 이들이라.
설마 도사들이 유성이를 상대로 무슨 일을 저지르겠는가.
정말 걱정도 팔자였다.
* * *
-챙! 챙!
-콰아아아앙!!!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충격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스승과 제자. 산 자와 사자(死者). 살리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한쪽은 사랑하는 이 둘을 살리고자 애쓰고 있었고
한쪽은 증오하는 배신자 둘을 죽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검화의 몸에 심어진 뱀파이어들의 힘이 생전의 그녀보다, 방금 전까지의 그녀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이 싸움의 승패를 뒤엎을 정도였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수련을 했다면 모를까, 차가운 죽음 속에 머물렀던 그녀는 생전의 경지인 절정 그대로였으니 그녀의 스승과는 하늘과 땅보다 더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말도 되지 않는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고 성립하고 있는 이유는 검후에게 있었다.
사랑하는 이 둘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검후의 이기심이 그녀의 손속에 자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질끈!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인가.'
검화의 힘이 모조리 빠진 뒤 제압해서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그녀의 당초의 계획도 이제 와서는 요원해 보였다.
점혈로 제압하려 했던 검화는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고 지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검후도 그것을 눈치챘다.
이대로 다시 한번 그녀의 힘이 전부 빠지는 것을 기다리다가는 피해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용서하거라.'
결국 검후는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전처럼 목은 아니었다. 이번에 그녀가 노린 것은 제자의 두 다리.
지금 그녀의 모습은 하나만 없앤다고 순순히 쓰러질 것 같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내린 결정이었다.
-서걱!
주변으로 매화향이 퍼져나가며 철퍼덕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후는 차마 그 장면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두 다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제자가 입을 열었다.
"결국 당신도.. 나랑 다를 거 하나 없어.."
시기, 질투, 분노, 울분, 열등감. 그리고 배신감.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그녀의 말이 검후의 귓가로 더욱 더 깊게 파고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그 아이를 속이고.. 자신까지 속여가며 그 아이 곁에 간신히 머물고 있는 당신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연아."
"그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이 순간 검화는 검후를 스승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있었다.
"당신은.. 나랑 다를 거 하나 없어.. 당신이 나의 사랑이 뒤틀렸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당신도 마찬가지야."
"..."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 하는 사랑이라니. 이것만큼 우스운 사랑이 또 있을까."
검화가 말한 둘의 사랑은 대칭점에 서있었다.
검화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솔직했고
검후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없었다.
아주 잠시만 현실을 직시하더라도 수많은 모순의 덩어리가 그녀의 감정으로 들이닥쳐 그녀를 망가트릴 위험한 사랑.
검후가 현재 하고 있는 사랑은 그런 종류였다.
"이제 보니 술집에 온 것도 유성이를 취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었네. 이유가 없으면, 맨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면 그 짓 하나 할 자신이 없는 거야?"
-꽈악
검후는 그녀의 제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검을 움켜쥐었다.
바닥이 이상한 문양으로 빛나고 있었다.
점장은 숨어서 마법진을 정비하며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미 준비는 거의 다 완료 되었고 기회만 본 다음 발동하면 됐다.
지금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저자들이 마법진을 피하는 것.
급하게 개조한 지금은 아무리 조절을 한다고 해도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마법진의 빛이 외부에 나타나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은 마법진의 빛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설마 피하진 않겠지.'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다.
일반적이라면 빛을 보자마자 반응하여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육체를 단련한 검사들.
마냥 안일하게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빛을 보고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 범위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방금 그 이상한 수작은 그대가 부린 것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변명은 듣지 않겠네.]
'..바로 이승 하직이야.'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그 전에 저 남자를 한번만 따먹어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이미 목숨을 걸었는데 뭐가 더 무섭겠는가.
"너도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있어. 분명 기회가 올 테니까."
"네."
너무 조마조마해서 원래 뛰지 않는 심장이 뛰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내 가게를 부수고 있는 두 여인들의 싸움을 지켜본 결과
-서걱!
'됐다! 지금이 기회야!'
제자 쪽의 다리가 잘려나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보아하니 아직 뱀파이어로서의 힘을 다루는 게 어색해 보이는데 감을 찾아 다리를 복구하기 전에 서둘러 먼 곳으로 보내버려야 했다.
"됐어! 부점장! 지금이야!"
"넵!"
내 신호에 맞춰 부점장이 마법을 개시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그려지며 이 난장판의 원인인 두 여인을 범위 안에 들였고..
"자, 잠깐만! 왜 저 남자까지 들어있어!"
쓰러져있는 사내까지 마법진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 부점장을 닦달했지만 돌아온 대답을 듣고 힘이 턱 빠져버렸다.
"예? 같이 보내는 거 아니었습니까? 일행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빼야 한다는 말을 안 했었다.
부점장은 당연히 저 셋이 일행인 만큼 같이 보내려는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안돼! 여기서 날려 보내면 어떻게 찾아..!'
이미 도착 좌표 관련 술식을 망가트려놔서 시전하는 우리도 저들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른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다른 지역까지 날아갈 수도 있는 광범위한 무작위 이동 마법으로 개조된 뒤였으니까.
"빠, 빨리 취소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기서 취소를 어떻게 합니까!"
"이러면 저 남자까지 같이 간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부점장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마법이 계속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기운을 철저히 통제한 만큼 우리 외에 다른 자들이 낌새를 눈치챌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마법이 시전된 이상 멈추기도 요원한 일이라
'어, 어떡하지? 이대로 놓쳐야 하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도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데굴
쓰러져있는 그 남자가 한 바퀴 굴러서 마법진의 범위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혹시 기운이 새어나갔나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당신은.. 나랑 다를 거 하나 없어.. 당신이 나의 사랑이 뒤틀렸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당신도 마찬가지야."
정작 더 기운에 민감해야 할 두 여자들은 서로에게 바빴으니까.
'뭐, 뭔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속으로 하늘이 나를 돕는다고 생각하며 마법진의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잠시 후 마법진이 별다른 문제 없이 완성되었고 완성된 마법진이 작동하며 빛을 내뿜었다.
"이건?!"
스승 쪽의 당황한 표정과 함께 시야를 가릴 정도의 강력한 빛 사이로 카가각 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무언가가 검에 의해 갈라지는 소리.
'..에이 설마.'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설마 그 순간에 검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 마법진을 손상 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제발 그렇게 믿었다.
-슈우우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고 마법진이 있던 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돼, 됐다!!"
"성공했습니다!"
성공이었다.
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 남자는?!"
두 여자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아까 남자가 있던 위치로 서둘러 달려갔다.
혹시라도 마법진에 휘말렸거나 그 전에 싸움의 여파 때문에 어디 다친 곳이 없나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크게 다쳤으면 바로 따먹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도 다쳐서 죽어가는 사람을 범할 정도로 악인은 아니었다.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아아.. 다행이다.. 손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자
-탁
"...?"
어딘가 무심하게 느껴지는 손짓으로 내 손을 튕겨냈다.
한순간 내가 방금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얼이 빠져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뇌가 인식하는데 성공했고
'방금 내 손을 쳐낸거야?'
그 사실을 깨닫자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참히 따먹힐 예비 성노예 주제에 이게 무슨 건방진 버릇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본인의 처지를 실감 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추릅
입안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침을 애써 삼키며 정신 조종 마법을 준비했다.
우선 이 이상한 망토부터 벗길 방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 상태에서 다시 사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자
-탁
-빠직
또다시 겁도 없이 내 손을 쳐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손님. 제가 손님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다치신 곳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데 잠시만 몸에 손을 좀 닿게 해주시겠어요?"
"..."
"..손님.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저도 힘을 쓸 수밖에 없어요?"
"...5.. 4.."
사내가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손님? 뭐 하세요?"
"3.."
"하. 그렇게 숫자 조금 세봤자 뭐 바뀌는 거라도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손님을 지켜줄 수 있는 그 여자들은 멀리멀리 날아간 지 오래라고요?"
"2.."
그는 내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