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250)

스승님에게는 닿을 수 없지만

유성이와 나에게는 닿을 수 있는 검이었다.

"같이 죽자."

유성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 둘이 살아있을 가치는 없다.

죽으면 기억도 돌아올 거야.

죽어서 영원히 함께하자 유성아.

유성이가 반응도 하기 전에 검이 내질러졌다.

사랑하는 유성이가 아프지 않도록. 바로 죽음으로 향할 수 있도록 정확히 목을 노렸다.

"네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러나 바로 옆에서 스승님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

내게 있던 검이 스승님의 공력에 이끌려 내 손을 벗어나고 내 몸도 스승님의 팔에 끌려가며 마지막 반항도 실패로 돌아갔다.

-버둥버둥

"유성아!! 유성아아아악!!!!!!!!!!"

"내 너를 마지막까지 믿었거늘 정녕..!"

바로 뒤에서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시야에는 유성이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승님이 나를 붙잡고 유성이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내가 유성이와 함께하지 못하도록.

스승님이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지금 유성이에게 닿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간신히 얻은 두 번째 삶이다. 아무것도 못하고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쿡

"아.."

그 순간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점혈에 의해 정신을 잃는 감각.

전과 달리 지금의 나는 팔도 하나밖에 없고 나를 붙잡고 있는 사람도 스승님이다.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정신을 붙들고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성..아..."

감겨가는 시야 속

그때와 똑같은 상황의 유성이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의식이 깊게 가라 앉았을 때

-쿠구구구구

몸 어딘가에서 불길한 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앙!!!!!

핏빛의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때 잘라 비어버린 내 한쪽 팔에는

핏빛의 붉은 팔이 원래 자신의 자리였다는 듯 자리 잡고 있었다.

* * *

마법진을 준비하면서 두 여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제자쪽이 사내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을 때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었다.

'미친년아 그걸 왜 죽여!!'

지금 하고 있는 고생도 전부 저 남자를 한번만 따먹어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저 남자가 죽는 순간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스승은 그걸 원하지 않았는지 금방 제자의 폭주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검을 뺏고 몸을 제압한 모습은 할 수 있으면 진작에 해주면 안됐나 싶을 정도로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동안 날뛰면서 힘이 빠져서 쉽게 제압할 수 있던 거겠죠."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괜히 우리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었다.

쉽게 제압 할 수 있는데 안했던 거라면 수리비가 엄청나게 늘어난 우리만 손해였으니까.

'..설마 일부러 엿 먹이려고 주점을 부수게 놔둔 건 아니겠지.'

의심이 시작되니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스승은 제자를 무사히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손가락을 세워 빠른 손놀림으로 몸 어딘가를 찔렀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금방 제자의 몸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저것도 하나의 기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점혈이라는 기술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무인들은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배우고 있는 기초 소양이죠."

"신기하네.."

"어쨌든 싸움이 끝났으면 이제 이 작업은 그만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움찔

부점장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췄다.

생각해보니 부점장은 저 여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지 내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계획을 위해서는 두 여자가 싸움을 멈추던 멈추지 않던 둘을 먼 곳으로 날려 보내야 하니까.

"그.. 그게.."

어떻게 해야 부점장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콰아아아아앙!!!!!

쓰러졌다고 생각한 제자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핏빛의 마력이 시야를 가리고 간신히 시야가 복구 됐을 때는 기존보다 훨씬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로는 비어있던 팔에 새로운 팔이 돋아나 있었다.

-오싹

주변으로 퍼지는 오싹한 기운에 절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점장님. 저건 뭔지 아십니까?"

"몰라.. 나도 무서워.."

"아까는 동족이 만든 권속이라면서요. 저랑 비슷한 것 아닙니까?"

"몰라.. 누구 권속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너는 저런 기능 없어.."

"쳇."

우리가 소곤소곤 대화하고 있는 사이 각성(?)한 제자가 스승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이미 스승에게 빼앗긴 뒤.

저대로 돌진해봤자 손으로 육탄전을 벌이는 것 밖에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슈르륵

"?!"

핏빛의 마력이 결집하며 순식간에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스승쪽도 당황한 것일까 급하게 검을 들어 올렸고

-채앵!

청명한 소리와

-콰아아아아앙!!!!!

그와 전혀 대비되는 기운 간의 충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걱! 삐걱!

한층 더 강해진 충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주점이 기둥이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2차전을 벌이기 시작한 두 여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거 누가 만들었어.'

대체 뭐하는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거하게 사고를 친 것 같다고.

"할아버지!"

"오냐. 오늘은 별 일 없었느냐."

"아 오늘도 친구가 늘었어요!"

눈 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칼밥을 먹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오다 말년에 거두게 된 고아 출신의 남자아이.

무슨 변덕으로 평생 연도 없는 아이를 거두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년에 갑자기 손자 욕심이라도 생긴 것일까.

젊은 시절 같이 지내던 동료가 돌아갈 곳이 있다며 은퇴를 결심하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일까.

이유가 어찌 됐던 내 손으로 거두어 자식같이 키운 아이였다.

아이를 막 거둘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굉장히 어릴 때라 고놈 나중에 자라면 여자 여럿 울릴 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자라나며 보여준 모습은 그것 이상이었다.

"..유성아. 네 마음씨가 착한 것은 알겠지만 여자애들이 친하게 지내 달라고 하는 것에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치만 그러면 그 애가 슬퍼할텐데.."

'그런 이유로 받아들이는 게 더 큰 독이다..'

아직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녀석이 어디서 자꾸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지 주변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매번 이 사단이 나는 건지 몰래 감시하기도 했지만 딱히 특별한 짓을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혼자서 공터에서 흙놀이만 하고 있더라도 금방 주변에 시선이 가득해졌다.

진지하게 가면이나 복면이라도 쓰고 다니게 해야 하나 고민했던 때도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라 그런지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실패했지만.

사실 아직 이때 까지는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계속 주변에 여자들을 몰고 다니며 여난으로 고생을 할 것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아직 미성숙한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너무 이른 나이에 가슴에 불을 지피게 되어버린 여자아이들을 향해 속으로 위로를 보낼 뿐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고

내가 우려하던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어르신!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유성이가 아니면 안됩니다! 이제 저는 유성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단 말입니다!"

"징그러운 소리 말고 빨리 꺼지게!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고!"

"어르신!! 어르신!!!!"

미친년이었다.

아직 나이가 두 자리도 되지 않은 아이를 상대로 다 큰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있는 집안 사이의 혼사라면 어릴 때부터 약혼 상대가 정해져 있는 예비 신부가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 이해관계 따위 없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였으니까.

처음에는 사람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넓은 중원에서 미친 여자를 잘못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두 번 정도 더 이어지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세상에 미친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확률은 마냥 운이 나쁘다고 보기엔 힘들었으니까.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이런 의문을 품고 유성이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보았다.

몰래 유성이를 지켜본 결과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다른 또래 아이들과 노는 것은 여전했지만 가끔씩 그렇지 않은 이들과도 어울리는 것을 발견했다.

주로 젊은 여성들과.

하지만 이것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유성이가 했던 것은 그저 아무 특별한 것 없는. 상대가 어른이라고 해도 가식 하나 섞이지 않은 평상시에 하는 말과 행동들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유성이 본인은 아무 의도 없는 순수한 행동이 그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대로 유성이를 가만히 방치했다간 조만간 화를 입을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다.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고 이내 점점 집 밖으로 거동 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내가 몸져 눕자 유성이는 씩씩한 모습으로 어디선가 식재료나 생활비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저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것들을 구했는지 궁금해 물어보자 유성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친한 누나들이 줬다고.

그리고 유성이의 그런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내가 떠난 이후에 이 아이가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일까 걱정되었다.

나만 없어진다면 유성이는 가족 하나 남지 않은 홀몸.

그 상태에서 주변의 여인들이 유성이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필시 무언가 일이 발생할 것이고 그것은 유성이에게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과분한 외모를 타고난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주변에 감당하지 못할 이들이 계속해서 엮일 것이고 그들이 자신에게 뻗는 손에서 자유롭지 못할 운명. 흔한 말로는 도화살이라고도 한다.

내가 죽은 뒤의 유성이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뒤 어떻게 해야 유성이가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장에서 맡아봤던, 화려한 검무 속에서 피어나던 매화향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속세와 연을 끊고 오욕칠정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도사들.

유성이의 살(煞)도 끊어낼 수 있을 것이고 안에서 만나는 이들도 모두 도사들일테니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성이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줄 은인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빌어볼 수 있었다.

마침 살고 있는 곳도 그리 멀지 않았다.

간신히 생명의 불씨가 꺼지기 전 알아낸 최선의 방법.

가장 큰 문제는 유성이가 화산에 들어갈 수 있느냐 였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명을 더 재촉하는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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