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250)

"이제 와서 도망이라도 가보게요..?"

"아니, 저 여자들을 날려 보내게."

물론 내가 저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설명은 빼고 부점장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가능성은 있네요. 원래 중원에 게이트 같은 게 존재하지도 않으니 대비 같은 것도 하지 않겠죠."

"그치? 그러면 내가 좌표 조정을 맡을 테니까 부점장은 다른 부분을 맡아줘."

"그래요.. 빨리 해야 수리비가 그나마 덜 나오겠죠.."

.

.

.

부점장과 한창 마법진을 개조하던 중 점점 칼 소리가 적어지는 게 느껴져 그쪽을 바라보자 붉은 눈의 여인이 크게 지친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거 동족의 권속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덜떨어진 녀석이 권속 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애초에 내가 맡은 역할은 병력 불리기가 아니라 자금 확보와 정보 수집.

그쪽 역할을 맡은 얘들한테는 관심 없었다.

다시 관심을 끄고 마법진에 집중하려는 순간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일관 다른 쪽을 압도하고 있던, 처음 저 남자와 같이 주점에 방문했던 여인.

들은 정보에 의하면 다른 쪽의 스승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많이 지친 것 같은데 그만 하는 게 어떠느냐. 더 이상의 싸움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소연이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와 이제 와서.'

실컷 물 먹여 놓고 이제 와서 그만 하자니.

저 여자도 보통 미친년이 아니었다.

* * *

"그만.. 하자는 말입니까.."

"나는 네게 더 이상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구나."

"하..하.."

우스운 말이었다.

되살아나서 이런 진실을 깨달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대로 죽어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설마 유성이와 스승님이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비틀

몸을 지탱하기 힘들었다.

감정에 휩싸여 모든 것을 실어 스승님을 향해 펼쳤지만 스승님에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넘치는 기운의 파도로 옷에 상처 입힌 게 전부.

겨우 겨우 적중 시킨다고 해도 스승님이 호신강기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젠장..'

새로운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꺾이지 않는 까마득한 격차.

'이럴 거면 왜 되살아난 거지..'

유성이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는데 이미 유성이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분의 손에 있었다.

"..유성이를 만져보고 싶습니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

"..또 전과 같은 일은.."

"그러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다 들었다.

내가 단전을 부숴버린 탓에 오히려 스승님과 정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고.

정말 듣기만 해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기억은 해주겠지..'

그게 비록 나쁜 의미라고 하더라도 유성이가 나를 평생 기억해 줬다면 그것 만으로도 기쁠 것 같았다.

그래. 진정하자.

앞으로 기회는 많다.

이미 스승님이 선수를 쳐버리긴 했지만 기회를 보다 보면 내게도 분명 기회가 있을 거다.

오히려 이미 유성이도 색에 눈을 떴을 테니 여러 여자에게 흥미가 생길 수 있었다.

-까득

정말정말정말정말 백 번. 아니 천 번 양보하면 스승님 까지는 참을 수 있다.

스승님이 아무리 외모가 젊다고 해도 나이 차이는 거의 손자와 할머니의 수준. 몸을 볼 수는 있어도 마음을 교류할 대상으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나이 차이..는 죽어있던 시간은 예외로 치면 거의 나지도 않는다. 이제 유성이도 어엿한 성인이니까.

그리고 가치관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으실 스승님과 달리 나는 유성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유성이의 발을 핥을 수도, 은밀한 곳을 핥을 수도 있다.

짖으라면 짖을 수도 있고 기라면 길 수도 있다.

그게 유성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유성이와 묵은 감정을 푸는 것은 최우선 과제였다.

"..알겠다."

스승님의 허락이 떨어진 이후 쓰러져있는 유성이에게 다가갔다.

"유성아.."

"히익..!"

-부들부들

술 기운이 느껴지는 유성이가 몸을 말고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커다란 망토를 벗겨버리고 그 위로 올라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유성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성아.. 누나야.. 한소연.. 누나 기억하지..? 누나가 다 미안해.."

아직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서 그렇지 나름 진심이 섞인 사과였다.

꼭 단전을 부쉈어야 했을까 아직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기억 당하길 원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나가.. 잠깐 눈이 멀어서.. 유성이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누나가 다 미안ㅎ.."

나 때문에 고생했을 유성이를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릿속에 낀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오늘부터 새롭게 출발하자.

전부 사과하고 유성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자.

그렇게..

"...그게 누구에여..?"

......

-쩌적

"유성아...?"

방금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유성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유, 유성아. 장난이지? 응? 누나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장난이라고 말해. 빨리. 유성이가 누나를 잊었을 리가 없잖아."

-흔들흔들

유성이의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흔들리는 것은 유성이의 몸일까 아니면 나의 동공일까.

어느 쪽이던 가만히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고 시야가 좁아지며 극히 주변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범위가 줄었다.

지금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건 오직 유성이 뿐.

스승님이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 좀 해봐 유성아.

누나 잊은 거.. 아니지..?

떨리는 입을 열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헤롱거리는 유성이를 재촉했다.

"유성아.. 유성아.. 유성아.. 유성아.."

"으으으.."

유성이의 몸이 흔들리면서 유성이가 신음을 흘렸다.

유성이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 만을 기다리는 순간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요오.."

-쩌적

유성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완전히 배신했다.

-스으..

고개를 비틀어 말없이 스승님을 바라봤다.

침묵.

이게 무슨 일인지 그녀에게 설명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침묵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 하는 것을 잊었구나."

스승님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스승님을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꿀꺽

스승님도 긴장하신 걸까.

한번 침을 삼킨 뒤 마저 말을 이으셨다.

"얼마 전에 사고가 있었다. 내가 그 아이와.. 치료..를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사고가. 아무래도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과거의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모양이더구나."

"..."

나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성이에게 평생 기억되겠다는, 평생 나를 잊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유성이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겼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그 상처는 스승님이 유성이의 첫 경험을 가져가는 계기가 되었고

이유가 어떻건 그는 나를 잊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짓을 했던 걸까.

"아.."

감정을 표현한다면 허무. 그 이외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아..아아아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고가 멈추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밟고 있을 발판이 사라졌다.

더 이상 밟고 있을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우르르

눈은 빛을 잃었고 몸은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스승님이 보신 걸까

"소, 소연아! 정신 차려라!"

다급하게 입을 놀리기 시작하셨다.

"그, 그 아이가 너를 잊은 것이 그렇게 큰 충격이었느냐?!"

"그것이.. 제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 다르게 생각하거라! 비록 네가 그 아이에게 저지른 짓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새롭게 출발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로운.. 출발.."

그래..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스윽

몸을 움직여 유성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이를 먹었을 텐데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탱탱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느껴졌다.

"유성아.. 유성이가 누나를 잊었구나.."

"누나는 누구세여..?"

"누나..? 응.. 유성이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유성이의 몸을 쓰다듬자 간신히 감정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스승님의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유성이를 사랑하니까. 유성이와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유성이가 나를 그대로 기억한다면 그 과정에 많은 난항이 있을 터.

오히려 잊은 게 더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유성이가 내가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누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네."

-핑!

유성이를 쓰다듬기 위해 잠시 놓았던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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