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말에 다시 무언가가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검을 고쳐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이상 나와 소연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연이가 폭주라도 했다간 이 넓은 주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소연아. 나는 네가 아직 정을 져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싸웠다간 이 주점 안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위험.."
"닥쳐. 알 게 뭐야 그딴 놈들."
그동안 소연이의 입에서 듣지 못했던 비속어.
'..내가 말을 잘못 했구나.'
입을 열 수록 분위기를 더 악화 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은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어. 내 목숨도, 유성이의 몸도, 마음도. 내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갔어."
"..소연아."
"좋았어? 좋았냐고. 손자뻘 되는 남자애의 몸이 그렇게 좋았어? 다시 못 잊어서 주점까지 데려올 정도로?"
-울컥
명백히 선을 넘은 인신 공격이었지만 그동안 살아온 삶이 헛된 것은 아닌지 특별히 마음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들부들
"못 본 사이에 스승에게 꽤 건방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정말이었다.
"나이를 먹었으면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지. 겉만 젊지 속은 완전히 할망구인 주제에 그 어린 애한테 손을 대? 유성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빠직
"흐으음.."
분명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닐 텐데 어째서인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자식처럼 키운 제자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소연아.
제자가 엇나갔다면 바로잡아 주는 게 스승으로서의 도리겠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도 좋아했단다?"
-멈칫
소연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 덕분일까
알 수 없는 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스승님이 먼저 유혹을.."
"내가 그 아이를 의도적으로 유혹할 리가 있겠느냐. 만약 했다면 무의식중에 그 아이가 내게 끌린 것이겠지. 나는 하늘에 맹세코 유혹한 적이 없다."
"닥쳐.. 닥쳐!!!!"
칼질과 서로를 향한 공격의 말이 오고 가는 상황.
금란주점의 점장은 부점장과 함께 탁자 뒤에 숨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점장.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의 힘으로 자연 재해는 막을 수 없습니다. 천지신명이 정해주신 자연의 순리이니 그저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해야겠죠."
"아니 저건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간 재해잖아."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보면 어떨까요."
"..아. 그러면 자연 재해 맞네."
둘 모두 정신은 반쯤 나가있었다.
차라리 적당한 무림인 두 명이 싸웠다면 모를까 느껴지는 검풍 만으로도 보통 고수들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개입한단 말인가.
부점장의 말대로 무사히 지나가길 빌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뭘 잘못해서 이런 짓을 당하는 걸까."
"잘못한 것 자체는 많죠. 이 주점도 강제로 뺏으셨고, 주변 상인들도 짓밟으셨고, 탈세도 하고.."
"그치만 원래 세상은 약육강식인걸."
"그러면 우리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아니 너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평소의 냉철한 성격의 부점장이라도 이 상황에서 특별한 방안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점장이 온몸에 방어 마법을 두르고 달려가도 저 아수라장에서 10초는 살아있을 수 있을까 싶은 분위기인데 그녀보다 약한 부점장이 무슨 수로 개입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저 둘을 말로 설득하기에는..
"참고로 종국에는 그 아이도 직접 내 몸을 탐했다. 그 여린 몸으로 세 번이나 건강한 정을 내더구나. 소연이 너는 그 아이의 쾌락에 물든 얼굴은 보지 못했겠지."
"으아아아아아아!!!!!!!!!"
-카가가강!!!
'..닥치고 있자. 응.'
도저히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점장님은 그 남자한테 손 안 댔죠?"
"..아쉽게도 못 댔어."
"하긴. 아직 살아있으신 것을 보면 그렇겠네요."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사내를 생각했다.
-추릅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해 놨으면 이 정도로 미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웬만한 인큐버스도 이 정도는 아닐텐데.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저 아수라장에..'
-힐끔
살짝 고개를 내밀어 사내의 모습을 확인했다.
"으에에.. 무서어.."
'와 저 상황에서도 술이 안 깼네.'
한번 취하면 정말 제대로 취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상태였다.
-꿀꺽
'죽어도 좋으니까 어떻게 딱 한번만..'
마약에 중독된 중독자처럼 계속 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콰앙!
"죽어..!! 죽어어어어!!!!!"
소연이는 아까보다 훨씬 어두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뒤틀린 사랑이기에 그것이 흔들렸을 때의 충격도 더 큰 법.
내가 그 아이와 정을 나눴다는 사실은 소연이에게 굉장히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스스로 머리를 쥐어 뜯을 정도로 많이 불안정한 모습.
긴 설전에서 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한다면 제자를 교육하는 것은 스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먼저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저쪽이다.
당연히 내 사심이 담긴 보복이 아니라 소연이의 잘못된 말버릇을 고쳐주기 위한 정당한 훈육이었을 뿐 나라고 소연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
잠시나마 손상됐던 자존심이 복구 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나 또한 절대 소연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자극했나?'
생각해보니 훈육이 너무 과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정신이 많이 불안정한 상태인 지금은 언행을 신중하게 했어야 했는데..
'스승에게 할망구라고 말하는 제자를 어떻게 가만히 둔단 말이냐.'
소연이도 충분히 잘못했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실례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법.
그리고 아무리 실제 나이가 그렇다고 한들 이미 반로환동을 이룬 몸. 신체적인 나이는 젊은 여인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리 도사로서 마음의 수양을 쌓았다고 하지만 그게 자식처럼 키운 제자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면 변명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생각 없이 입을 놀린 것은 아니었다.
-콰아앙!
소연이가 휘두른 검을 한 발자국 차이로 피했다.
안 그래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의 적을 도발했을 때 그 공격의 방향을 유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소연이의 공격을 내 쪽을 향하도록 유도하며 그 뒤쪽 방향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최대한 피해가 적도록 하고 있었다.
힘으로 소연이를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 손으로 소연이를 제압했다가 그녀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팔 하나가 없는데도 저렇게 난폭하게 덤벼오는 상태다. 완전히 제압하려면 남아있는 하나까지 잘라버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녀를 진정 시키고 대화를 나누어 가능하다면 잘못을 바로잡아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만큼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혈교의 사이한 술법으로 되살아난 몸이니 어떤 수작이 부러져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힘이 전부 빠져 스스로 쓰러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뒤틀린 애정이 폭주하여 단전을 부수는 것을 넘어 그의 목숨까지 노리는 상황이 온다면..
..그런 상황은 오지 않기를 빌어야 할 것이다.
* * *
-콰아앙!!
"..부점장. 손님들 다 나갔어?"
"아마 알아서 탈출해서 나가지 않았을까요."
"직원들은?"
"저나 점장님이나 여기 숨어있는 처지인데 뭘 자꾸 물어봅니까. 이제 와서 점장으로서의 책임감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
아니, 내가 오늘 사고를 칠 것 같아서.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이미 마음이 기운 이상 목숨에 미련도 없었고 이 주점에도 미련이 없었다.
진짜 죽어도 좋으니까 한번만. 딱 한번만 따먹어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괜히 저 여자 둘이 남의 가게에서 깽판을 치는지도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솔직히 나도 힘만 있었다면 저 판에 끼어들 것 같았으니까.
'..근데 저 여자 둘이 끝이겠지?'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과연 저 여자 둘이 끝일까.
체구가 좀 작아 보일 뿐이지 느껴지는 향기를 보면 성인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최소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꼬인 게 저 여자 둘 뿐일까?
몸에서 나는 향기와 목소리 만으로도 이 정도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귀한 걸(?) 알아보고 미리 손을 써둔 사람도 있을 것 같고
그냥 평범하게 나처럼 매료된 사람도 분명 더 있을 것 같았다.
'저 여자랑 할 때까지 동정이었다는 것도 사실 아닌 거 아니야?'
지금 저쪽에서 오가는 설전에서 들은 바로는 만난 지 얼마 안됐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동정을 유지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저 몸으로?
누가 어디 가둬 두고 키우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남자 본인이 몸을 험하게 굴리지 않았더라도 그냥 매료된 여인이 덮치기만 해도 아무것도 못하고 밑에 깔려서 버둥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텐데 순결을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사실 완전 걸레자지일수도.'
뭐,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는 한 결국 의심 선에서 끝날 뿐이었다.
운이 정말정말정말 좋다면 순결을 유지했을 수도 있겠지.
내가 저 남자의 자지를 입에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걸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추릅
'물어보면 알 것 같긴 한데.'
아직도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쪽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저기서 남자만 쏙 빼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떻게 한 1시간 정도만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워프 게이트..'
저 남자만 쏙 빼온 다음에 빠르게 마법진을 작동 시켜서 빠질까?
넘어가자 마자 반대쪽 마법진을 망가트려 버리면 추적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카가가가강!!!
'응. 무리.'
저 틈을 뚫고 잠깐 만이라도 남자를 빼내서 워프 게이트를 작동 시킨다?
그럴 틈도 안보였다.
그리고 내가 다가가면 내 쪽으로 모든 공격이 집중될게 뻔히 보이는데 그러면 방어마법을 전부 걸어도 몇 초도 못 버틴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다른 방법이 있었다.
내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 저쪽을 날려 보내는 것.
게이트의 입구를 조정하면 저 둘만 딱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꽤 어렵겠지만 적어도 내가 저 틈을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였다.
'아예 도착 좌표도 교란 시켜 버릴까?'
원래 도착 지점의 게이트는 안정적으로 지정된 좌표로 도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도착 지점 좌표를 교란 시켜 버리면 아예 이상한 곳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를테면 인가와 천 리는 떨어진 깊은 산 속이라던가.
"부점장. 워프 게이트를 좀 손 보려고 하는데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