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50)

하찮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인의 입장에서 그를 속이고 기만한 역겨운 나를.. 그는 어떻게 바라볼까.

옛날 같았으면 한참을 생각했을 일.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것처럼 심상 속에서 검을 들어 상념을 끊어냈다.

그리고 눈앞의 소연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부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지를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구나. 굳이 우리가 서로 검을 맞댈 필요가 있겠느냐."

침착하게. 최대한 침착하게.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 시키며 말을 이었다.

"비록 네가 저지른 죄가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하지만 너도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 그에게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시 소연이를 베고 싶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두고두고 후회했던 일이다.

꼭 죽였어야 했을까.

꼭 베었어야 했을까.

내가 노력했다면 돌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계속 고민하고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후회했던 일이다.

"..무슨 속셈이십니까."

"어릴 때부터 너를 보아온 스승이다. 네 성격이 원래 그랬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언가 오해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이겠지. 너도 그 아이에게 미움 받기를 원하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

"..."

"그 아이에게 사과부터 하거라. 지난 시간이 무려 10년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할 수 있겠느냐."

"사과.. 말입니까."

"계속 그 아이에게 미움 받은 채로 남고 싶은 것이냐?"

"..."

소연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광애. 미쳐버린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사랑의 한 종류.

소연이도 그에게 미움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테지.

"이미 늦지 않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연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주겠다. 늦었다고 포기하는 순간 더 늦어져 손 댈 수 없는 곳까지 갈 뿐이다."

소연이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깊은 고민에 잠긴 모양이었다.

"..."

나 또한 재촉하지 않고 말 없이 소연이를 향해 내민 손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해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든게 느껴졌다.

"그래. 잘 생각했다."

"..지금 바로 사과하면 되겠습니까?"

"그 전에 너도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지금은 그도 네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소연이와 검을 맞댄 사이 허공섭물을 이용해 멀리 보내놨던 그를 가리켰다.

"와아.. 여기 술병이.."

이 소란 속에서도 아직도 술에서 깨지 못한 듯 여전히 취해 있는 게 보였다.

"..유성이는 왜 저러고 있습니까?"

"술에 많이 취한 모양이구나."

"술을 마셨습니까..?"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취미가 생긴 모양이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더구나."

괜히 소연이를 자극하지 않고자 그녀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 그러면 주점에 둘이서만 온 겁니까?"

"위험하게 혼자만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 주점에 그렇게 가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것이다."

불순한 의도를 최대한 숨기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진실을 들켰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렇구나."

다행히 나를 의심하지 않는지 소연이가 그에게 다가갔다.

-스륵

"으에에.. 당기지 마아.."

"..미안해. 잠깐만 이렇게 있어줘."

소연이가 한쪽 팔로 그를 감쌌다.

"스읍.. 하아아.."

"간지러.."

그 상태로 그의 목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에 순간 놀랐지만 특별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아직 다른 짓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

"흐으으.."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소연이의 입이 열렸다.

"스승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이제 와서 특별한 질문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나는 아직

"왜 유성이에게서 스승님의 냄새가 납니까?"

소연이의 광기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답해 보시지요."

단순히 같이 다니면서 냄새가 밴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체취였다.

최소한 둘이 장시간 동안 껴안고 있어야 날 수 있는 정도로 깊은 체취.

"왜 유성이에게서 스승님의 냄새가 납니까?"

-부글부글

간신히 가라앉았던 감정이 불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속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승님이 그런 짓을 저지르셨을 리가 없다고.

그러나 확인은 필요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내 냄새라니."

"회피하지 마십시오. 유성이의 몸에서 스승님의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움찔

아주 잠깐이지만 보았다.

스승님의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이.

부모처럼 따랐던 스승님이다. 속으로 켕기는 일이 있을 때의 모습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본인은 모르셨는지 10년 동안 고치지 못하신 것 같았지만.

-까드득

이걸로 확실해졌다.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교접? 그건 아닐 거다. 다른 아닌 스승님인데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로 몸에 냄새가 밸 정도로 가까이 밀착해 장시간을 보내는 일.

그게 뭐가 있을까.

불쾌한 상상과 함께 머릿속을 온갖 상념이 채우던 순간 한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 스승님..?]

[악몽을 꿨느냐?]

아직 어리고 미숙하던 시절

내가 밤에 잠을 잘 못 이루던 날에는 스승님께서 품을 빌려주시곤 하셨다.

당시엔 그 품 속이 기분이 좋아 일부러 잠이 안 오는 척 연기를 했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것과 비슷한 일환 아닐까.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성이는 나에 의해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스승님이 유성이를 찾아낸 뒤, 둘 사이엔 작은 소란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큰 충격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을 테니까.

되살아난 과거의 괴로움에 사로잡힌 유성이에게 스승님이 그 품을 빌려주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나이 차이도 차이이니 아마 손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지.

'하..'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걸 거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스승님인데. 설마 스승님이 유성이를 탐했을 리는..

"그, 그, 그게 말이다.. 사실 그 아이의 기운이 크게 쇠해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음양합일을 통해 기운을 넘겨준 것 뿐 결코 사적인 감정은.."

'...어?'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음양.. 합일이요..?"

"저, 정말 그 아이의 목숨이 위험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 아이와 나 모두 본의 아니게 첫 경험을 나누게 되었지만 그 아이의 의견을 따라 없던 일로 하는 것으로.."

"아...?"

처음..?

유성이랑 몸을 섞은 것도 모자라서.. 첫 경험까지 가져갔다고..?

스승님이..?

-스릉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검을 뽑고 있었다.

몸을 말려줄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만이 남았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검을 타고 올라갔다.

"소, 소연아?"

"죽여버릴거야..죽여버릴거야..죽여버릴거야..죽여버릴거야.."

애석하게도 이성을 잃고 감정만 남은 내가 스승님에게 휘두른 검은 내게 가장 익숙한 그것이었다.

스승님에게 배운 스승님의 무공.

수천, 수만 번을 넘게 펼쳐본 초식이 검으로 펼쳐지며 그 순간 몸 안에서 이상한 기운이 반응했다.

되살아난 이후에 생겨난 것 같은 살아 생전 느끼지 못했던 내공과는 다른 기묘한 기운.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몸에 침범한 불순한 기운을 걸러내려 했지만 내가 막았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지금 눈앞의 스승님을 죽일 수만 있다면

역겹고, 혐오스럽기 그지 없는 배신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상관 없었다.

-키잉

피를 닮은 붉은 기운이 검을 휘감고 올라갔다.

"이 무슨..!"

스승님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멈출 이유는 되지 않았다.

검이 휘둘러졌고

-콰과과광!!!!

붉은 기운이 검의 궤적대로 펼쳐졌다.

* * *

-후우우웅

한 차례 검의 기운이 공간을 훑고 간 이후, 나는 손목의 얼얼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방금 무슨..'

분명 펼쳐지던 것은 내가 소연이에게 알려주었던 나의 무공이었다.

화산의 무공과 맞게 쾌(快)와 환(幻)의 묘리가 담긴 검술.

하지만 방금 소연이가 보여주었던 파괴력은 강(強)의 묘리를 다루는 그것과 비슷했다.

절제 되지 않은, 마치 사나운 짐승과도 같이 넘치는 기운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검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나는 그런 것을 소연이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소연이를 바라보고 있기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검이 남긴 흔적이 느껴졌다.

흘러넘친 기운이 그녀의 검을 따라 바깥으로 달려나갔고 그 결과

-후웅

무너진 벽을 통해 늦은 밤 특유의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훑었다.

소연이의 변화가 내 목숨에 위협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승으로서 제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해가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이렇게 다루는 거였구나.."    

목소리는 아까처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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