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50)

"..감히 누구의 뒤를 노리는 것이냐!"

-파앙!

엄청난 감정이 느껴지는 검을 쳐내고 이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우득!

그녀의 몸에서 한층 더 어두운 감정이 뿜어져 나오며 관절이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움직임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각도의 움직임이었다.

피풍의 사이로 그녀의 타오르는 열기와 차가운 한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오싹

분명 경지의 차이는 압도적이지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생전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해산물을 봤을 때 느꼈던 기괴함.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원초적인 감정.

'정녕 인간이 맞단 말인가..?'

그녀는 같은 인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감정을 처음 느껴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연이를 베었던 날. 죽기 전 그가 평생 자신을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광소하며 기뻐하는 그녀를 봤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도 잠시

그녀가 휘둘러오는 검을 받아치기 위해 검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이런 두려움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내 무공..?'

그녀가 휘두르는 검이 나의 무공이었다.

비슷한 다른 무공일리는 없었다.

내가 나만의 깨달음을 정립하며 손수 만든 독문무공과 완전히 똑같았으니까.

-채앵!

검과 검이 충돌하며 주변으로 익숙한 매화향이 퍼져나갔다.

아무리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화산의 무공은 매화향을 주변으로 퍼트린다지만 검을 맞대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나의 무공이었다.

남에게 가르쳐 준 적 없는.

아니, 가르쳐 준 인물이 이제 세상에 없는.

배운 이는 나를 제외하면 오직 한 명 밖에 없던 무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펄럭!

충돌의 충격으로 괴한의 피풍의가 벗겨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중간 중간 핏빛으로 물들어있는 아름다운 흑색의 머리카락

누구나 본다면 아름답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을 아름다운 얼굴과

분노, 증오,  울분, 배신감, 기대감, 좌절감으로 물들어있는 붉은 눈동자.

"네, 네가 어떻게.."

조금 변하긴 했지만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나의 제자.

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죄악.

나의 무공과 별호까지 물려받은 자식과도 같았던 아이.

소연이가 그곳에 있었다.

내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소연이의 입이 열렸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부들부들

[아아.. 이제 그 아이는 바깥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겠죠. 저를 유혹했던 것처럼 다른 여인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과 재산을 착취하면서 보내겠죠.]

[그래도 그가 앞으로 어떤 여인을 만나더라도 저를 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때의 장면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분위기.

잘못된 사랑으로 망가진 인간의 말로라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아핫! 아하하하핫!!!]

순간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든 것 아닐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베었던 나의 제자가 살아서 돌아왔다.

"아..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감정이 주체 되지 않고 감각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을 돌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나를 묶는 손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색이 뒤섞여 만들어진 흑색처럼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목소리가.

"스승님이 왜 그 아이와 함께 있습니까?"

"스승님이 왜 그 아이와 함께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멈춰버렸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오히려 무심하게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내 손으로 직접 벤 죄인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놀라서도 아니었다.

'내가 왜.. 함께 있었지?'

정말 몰라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의미로 저런 질문을 한 걸까.

이런 곳에, 주점에 그와 함께 있는 이유?

아니면 그걸 떠나서 이곳이 어디던 내가 그와 함께 있는 이유?

아니면 둘 다?

어느 쪽이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있다는 것에 당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게 아무리 눈앞에 있는 소연이에게서 비롯된 문제라고 해도

결국 제자의 잘못은 스승의 잘못.

소연이를 벤 이후에도 나는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부들부들

"정말.. 소연이냐..?"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하지만 스스로 베어버리신 제자도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

흔들리는 눈으로 소연이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혈교의 상징과도 같은 핏빛의 눈동자.

혈교가 그녀에게 어떤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시로 되살아난 것이냐?"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질문했습니다."

"스승님이 왜 그 아이와 함께 계십니까?"

재차 대답을 재촉하는 그녀의 물음.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그렇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하."

소연이가 한탄 섞인 조소를 내비쳤다.

"보나 마나 저 때문이겠죠. 제가 유성이에게 한 일에 책임을 느끼시고 유성이를 찾아 스승님의 그늘 아래에 두고 키우셨겠죠. 시간이 시간이니 몸과 마음의 상처도 식었을 것이고."

"...아."

소연이의 말을 들은 뒤 그녀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연이는 내가 그를 그 일 직후, 혹은 거의 바로 찾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실상은 만난 지 얼마 안된 상태였지만.

"뭐.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네요. 스승님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다면 다른 여인들의 손을 거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승님이 그 아이에게 손을 댔을 리도 없겠죠. 책임감이나 모성애 비슷한 감정은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쿵!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붉은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다시 눈을 마주쳤지만 이미 소연이가 이상한 낌세를 느낀 것 같았다.

"..아닙니까?"

"..으읏..."

이대로 계속 침묵하고 있으면 전부 들킬 수밖에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오래 같이 지낸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계속 찾아다녔지만 발견되지 않다가 최근에 간신히 만난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유성이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무슨 의미냐."

"스승님이 유성이를 발견했을 때. 유성이가 뭘 하고 있었냐는 말입니다. 10년 동안 무언가를 했으니까 살아남아 스승님을 만난 것 아닙니까.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온 겁니까. 여인들을 유혹했습니까? 몸을 팔았습니까? 그동안 유성이가 뭘 하면서 지냈냐는 말입니다!!!"

광애(狂愛).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그녀의 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거라. 스승과 함께 산 속에서 지냈다고 하였으니."

"스승.. 말입니까?"

"그래. 네 탓으로 크게 다친 이후에 다행히 돌보아준 은인이 있다는 모양이구나. 그동안 나름 재주도 익힌 모양이라 내가 처음 봤을 때는 어엿하게 혼자서 잘 살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섬서에서 점집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명성까지 펼쳤던 인물.

천기를 읽으면서 많은 일을 겪었을 텐데도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엿한 청년이었다.

외모가 그렇지 않아서 그렇지.

"..그러면 그 스승은 여자입니까?"

소연이의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질투가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과했다.

설마 스승까지 견제하다니.

"나도 모른다.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구나."

"그러면..!"

"하지만 스승이 여성이라고 해도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사제관계에."

나이 차이도 차이..

'크흠.'

..사랑에 나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벽이니 의미가 없다 치더라도 관계가 사제관계다 사제관계.

둘 사이에 이성적인 끌림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부모자식과도 같은 관계인데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네가 아무리 뒤틀린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방금 그건 도를 넘은 짓이었다."

"..."

-꾸욱

소연이가 검을 쥔 손과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휘두르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아직 의심이 누그러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대화한 것에 수확은 있었다.

소연이가 다른 혈교인들처럼 이지를 잃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

명백히 생전의 기억과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하면 이대로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화로 해결을 한 뒤에는 그에게 사과를 시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는 소연이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그에게 미움 받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소연이가 그에게 사과를 하게 만든다면 우선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두근

'그러면.. 어떻게 하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를 속였다는 것을.

내가 그를 기만했다는 것을.

아무리 소연이에게 사과를 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속인 것에 가만히 있을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