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50)

"고..맙...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일그러지기 직전의 표정이 보였다.

넘치기 직전의 물컵처럼 물 한 방울만 더 떨어져도 전부 흘러내릴 것 같은 그 모습이.

-꼬옥

"손님. 혹시 춥지 않으세요? 어디선가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도발하듯이 그의 몸을 더욱 더 끌어안았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상대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을.

-씨익

드디어 이 수준 낮은 싸움의 끝이 왔나 싶던 그 순간

-꿀꺽꿀꺽

-쿵

"..제안 하나 하지."

그녀가 술을 병 채로 들어 마시더니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제안이죠?"

"주점에 왔으니 술로 승부를 내지 않겠나. 먼저 취해 쓰러지는 사람의 패배로."

"..흐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술 내기인 모양이었다.

나름 무인이라고 술에 자신이 있다 이건가?

'어리석기는.'

그렇게 생각해 신청한 술 대결이라면 정말 어리석기 그지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마나나 내공? 이라는 기운으로 술 기운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인간인 이상 경지에 따라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경지는 고작해야 소드 유저 정도.

피를 조작할 수 있는 뱀파이어. 밤의 일족에게 덤비기에는 백 년도 일렀다.

"후훗. 받아들이죠."

괜히 나중에 수작 부리지 못하도록 확실히 밟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존심도 없이 그 이후에도 달라붙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그걸 빌미로 흉을 봐 그의 앞에서 평판을 깎아내리면 그만이다.

-탁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오기 전에 이미 꽤 마시셨을 것 같은데."

"무림에서는 강자가 약자에게 몇 수를 양보하는 관례가 있지. 그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게."

"호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양보를 해?

자존심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

.

.

'되게 끈질기네..'

혈류를 조작해 알코올을 억누르며 승부를 이어갔지만 상대 쪽도 만만치 않았다.

-탁

"..뭔가. 벌써 한계인가?"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눈을 또렷했다.

"후훗, 저는 아직 얼굴도 안 붉어졌는걸요."

"그런가? 아무튼 그대 차례일세. 어서 들게."

살짝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 정도로 강적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다.

'술로 승부를 걸 만 했네..!'

-꿀꺽

인상을 찌푸리며 술을 목으로 넘겼다.

짜르르한 알코올의 감각이 식도를 찌르고 있었다.

"후후.. 손님 차례.."

-꿀꺽

"다시 그대 차례일세."

'이런..'

이상했다.

저번에 소드 익스퍼트 수준이랑 비슷한 내기를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혹시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걸까?

나도 여차하면 그냥 마법이라도 쓰면 되겠지만 아직 반칙까지 저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이 없는 미개한 세계라고 해도 단번에 변화가 생겼다간 의심할지도 모른다.

마법은 없어도 사술인지 뭔지 이상한 건 많다고 들었으니까.

-까득

'아무래도 정신을 조금 흔들 필요가 있겠어..'

이 싸움은 질 수 없다.

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저 인큐버스 빰 치는 남자의 맛을 한번 보기 위해서라도 절대 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손님. 두 분은 어떤 관계시죠?"

"..관계?"

"예.. 지금 손님의 반응은 뭐랄까.. 질투를 하는 애인 분 같은 반응이셔서요."

내 말에 그녀의 동공이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시나였다.

이런 부류는 이렇게 대놓고 나서면 오히려 아무것도 못한다.

"혹시.. 두 분은 서로 애인 관계신가요?"

"아, 아니네! 따, 딱히 그런 관계는.."

"어머.. 그러면 더 이상하네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걸려들었다.

"손님은 무슨 권리로 저를 막으시는 거죠?"

"..."

"마음이 맞는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것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시 애인이라면 또 모를까.. 전혀 관계 없는 타인이 막을 권리는 없지 않나요?"

"으으으읏.."

그녀의 얼굴이 금방 붉게 물들며 입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기는 하겠지만 아무 말도 못하겠지.

'여자들의 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란다 애송아.'

10살 정도는 더 먹고 오렴.

나름 나를 고전 시키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 정도였다.

약한 부분을 공략하면 어쩔 줄 몰라한다.

이대로 조금만 더 공략하면 내기고 뭐고 알아서 자멸할게 눈에 훤했다.

-스릅

'어떤 플레이부터 해볼까.'

아직 벗겨보지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웬만한 플레이는 다 받아줄 것 같은 포용력이 있었다.

저렇게 달콤한 향기를 내는 몸은 대체 어떤 몸일까.

당장이라도 벗겨보고 싶었다.

"..사이일세."

"네?"

그러는 사이 나름의 발버둥이라도 쳐보려는 것인지 상대의 입이 열렸다.

나올 말은 보나마나 뻔했다.

사랑하는 사이라던지, 어릴 때부터 자라온 소꿉친구라던지, 뭐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았다.

대체 얼마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내뱉으려고 이렇게 뜸을 들였나 들어보려는 순간

"몸을 섞은 사이일세."

"...예?"

"서로 처음이었지."

이 싸움, 아무래도 쉽게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저벅저벅

"아직 멀었나?"

"아이고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해가 저문 뒤라 그런지 더 이상 피부를 따갑게 하는 햇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습을 감추기 위해 피풍의를 눌러 쓸 수밖에 없었다.

금란주점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지름길을 알고 있다면서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는 자를 만나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계속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헤헤, 원래 지름길은 골목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빨리 가기나 해."

기분 나쁜 웃음소리의 사내를 떠밀며 계속 그를 향해 따라갔다.

그 뒤로 사내가 멈춰선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뭐야? 막다른 길이잖아."

"킥킥, 여기까지 잘도 속아서 왔군."

사내가 돌변하여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함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제대로 안내해 준다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곤란하거든."

어두운 골목 사이로 사내 넷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아가씨? 아가씨가 했던 제안을 우리가 하지. 순순히 따라만 와 준.."

-서걱

이 자들에게는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손날만으로도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이, 이게!"

바로 달려오는 거구의 사내.

마침 되살아난 뒤 이상해진 몸의 상태를 확인할 기회였다.

이상할 정도로 몸에 힘이 넘쳤다.

-스으으

검법 만큼은 아니지만 잠깐 배웠던 각법을 준비하며 눈 앞까지 달려온 거구의 사내의 복부에 쏘아냈다.

-쿵!

"꺼헉!"

순식간에 벽까지 날아가 벽에 금을 만들었다.

'특별히 기운을 쏟지도 않았는데.'

단순한 신체능력만으로 이 정도라니

특별히 외공을 수련했던 몸도 아닌 만큼 확실히 이상했다.

"..."

"히, 히익!"

이쪽을 보며 기겁하는 사내들과 바닥에 생긴 피 웅덩이를 번갈아봤다.

어째서인지 이 피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하는 거지..'

아기가 걸음마를 뗄 때 이런 느낌일까

뭔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렁울렁

스승님의 이기어검을 다루는 흉내라도 내볼까 싶어 최대한 의식을 집중하자 피웅덩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금방 들어 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푸슉!

"끄아아아아악!!!!"

"히, 히이익!"

비명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사내의 팔을 뚫고 핏빛의 칼날이 솟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서걱

칼날이 솟아난 사내를 베어버리고 덜덜 떨며 주저앉아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금란주점."

"예, 예?"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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