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50)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그 사이에 정보를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대가를 받은 만큼 제대로 일 한다고."

그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시간이 무려 10년이었다.

어느새 유성이가 건장한 청년이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나있었다.

'많이 자랐을려나..'

본판이 좋았으니 커서도 분명 엄청난 외모일 것이다.

그래도 아쉬웠다.

나는 큰 유성이의 모습보다는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유성이의 모습이 더 좋았다.

만약 건강하게 자랐다면..

'..그래도 괜찮아.'

성장을 고의적으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니

만약 내가 기억하던 것 이상으로 건강하게. 크게 자랐다면

그만큼 팔과 다리를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유성아.. 누나가 금방 찾아갈게.. 살아만 있어줘..'

설령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더라도. 이미 더럽혀져 있더라도.

그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 * *

-비틀

"소저.. 아직 잔이 비지도 않았는데 따라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마시게. 술 맛도 좋지 않나."

"무인은 잘 안 취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딸꾹."

계속해서 술을 주문하고 그의 잔에 채워주자 어느새 그의 발음이 꼬여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만취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꽤 취했다는 게 느껴지니.

"진짜.. 스승님도 너무하지.. 최소한 가끔씩이라도 밖으로 내보내 줬으면 이렇게 도망쳐 나올 일도 없었는데.. 원래 둘이 같이 나오고 싶었는데.."

"자, 자. 잔이 비었네."

"으으으으.."

-꿀꺽꿀꺽

정말 싫으면 그냥 안 마시면 되는 일일텐데.

자존심인 건지 아니면 그렇게 술이 좋은 건지 잔에 술이 가득 차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그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마셨을까

"..."

-쿵

그가 탁자에 고개를 묻으며 쓰러졌다.

"..이제 됐나?"

-툭툭

"정신 좀 차려보게."

쓰러진 그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그가 정말 쓰러진 것인지 확인했다.

아무리 건드려봐도 미약한 신음 소리만 흘릴 뿐 의식이 제대로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두리번

혹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나 확인해본 뒤 입을 열었다.

"흐, 흠.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군. 오늘은 그만 마시고 이만 돌아가서.."

쓰러진 그의 몸을 부축 하고자 쓰러진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

-똑똑

"손님. 혹시 아직 안에 계신가요?"

-움찔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에 있네."

"후훗.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아까 봤던 여인들과 비슷한 복장이었으나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자랑했다.

같은 여인이 봐도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과 몸매를 부각하고 있는 복장이 어우러져 누구나 그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외모였다.

-힐끔

그 여인을 보자 절로 내 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기는 밀리지는 않는 것 같지만..'

복장이 달랐다.

그녀는 숨기기는 커녕 오히려 옷을 이용해 그 매력을 부각 시키고 있었으나 나는 피풍의로 가리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무슨 일로 왔나?"

"안녕하세요. 본 금란주점의 점장입니다. 오늘 저희 점원이 무례를 범한 것 같아서 사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사과?"

"예.. 듣자 하니 술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손님들인 것 같아서.. 이렇게.."

여인의 뒤로 엄청나게 많은 술병이 늘어져 있었다.

"점장인 제가 직접 술을 따라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술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요."

"...뭐라."

"후훗. 본 가게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접이랍니다?"

여인이 요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수작을 알아차린 뒤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아니. 오늘은 그이가 조금 많이 취한 것 같아서 이만 가보려고 하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지."

"어머.. 벌써요?"

"내가 따라주는 술 맛이 좋았던 모양이네."

살짝 당황한 표정의 여인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비켜주겠나? 이제 그만 그와 함께 숙소로 돌아갈.."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요구를 하려던 순간

"..와아. 술이다아.."

-흠칫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다 시키지 않았어요..? 왜 술이 더 늘어났지이.."

잔뜩 취해 늘어진 목소리.

듣기만 해도 무언가가 자극되는 목소리였다.

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아하하.. 손님. 저는 본 금란주점의 점장인데 오늘 저희 직원의 무례에 사과드리고자 이렇게 직접 왔습니다."

"그러면 저 술도오..?"

"네. 저희 주점에서 보관 중인 온갖 진귀한 술들입니다. 손님은 술을 좋아하시나요?"

"히히.. 좋아여.."

"잘 됐네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옆에서 따라드리며 설명을 해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당황한 사이 이미 대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속으로 걱정하는 한편 안심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까 그와의 대화에서 그가 여인이 따라주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 저 여인의 말도 거절..

"당연히 좋죠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그는 따라주는 사람에 관계 없이 그냥 술을 좋아하는 것이었다고.

'..이 인간 뭐지?'

뱀파이어 여인. 로젤리아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 계획은 사이 좋아 보이는 두 남녀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의 매력으로 남자를 꼬셔 버린 뒤 분해할 여자 쪽을 지켜보며 즐길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지만 정작 오고 나니까 상황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이, 이 술은 옥명주라는 이름으로 옛날 옛적에 산 속에서 홀로 살던 노인이 낚시를 하러 갔다가.."

-쪼르륵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뛰지 않는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주세여!"

"저.. 손님. 많이 취하신 것은 알겠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여유롭게.."

"더 주세여!!"

"..알겠습니다."

잔뜩 취해 꼬인 발음과 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보통 남성이 이런 짓을 했다면 징그럽게 느껴졌을 테지만 오히려 들을수록 어딘가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남자 뭐야?! 진짜 인큐버스라도 돼?!'

내가 꼬시러 왔다가 오히려 당할 판이었다.

물론 진짜 인큐버스일리가 없다.

이전 세계에서도 한번도 못 본 인큐버스가 설마 다른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꿀꺽꿀꺽

"햐아아아.."

그렇다고 지금 상황 또한 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내가. 고귀한 피의 혈족이 겨우 인간에게. 그것도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있는 인간에게 넘어간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아라 로젤리아. 고귀한 피의 일족은 사냥을 하는 쪽이지 사냥을 당하는 쪽이 아니야.'

로드의 은혜를 생각하며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매료의 힘을 끌어올렸다.

"후훗, 손님. 제 대접은 마음에 드시나요?"

"마음에 들어여.."

"저 역시도 이렇게 멋진 손님 분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두근거리네요. 혹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근처로 입을 가져다 대려던 순간

-쨍그랑!

"..이런. 실수했군."

앞의 여자 손님이 접시를 깨트렸다.

"변상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하던 일 마저 하게나."

명백히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

'후훗.'

드디어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런 부류의 여자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불만이 있다면 제대로 얘기를 해야지 저런 식으로 무력 시위만 해봤자 오히려 남자에게 무서운 인상만 안겨주는 법이다.

"변상은 괜찮습니다. 혹시 어디 다치시거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가게에 커다란 벌레가 있는 모양이던데. 좀 쫓아내 줬으면 좋겠군."

"어머 벌레라니. 저도 벌레가 무서워서요."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앉은 사내의 몸을 끌었다.

내가 품 속에 안기려고 했지만..

"으엑."

-툭

'...?'

오히려 사내 쪽에서 안겨오는 상황이었다.

'보기보다 몸집이 작은가?'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사내의 등에 손을 얹고 내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으븝."

가슴과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지금 뭐 하는 건가?"

"벌레가 있으시다길래.. 저는 무서우면 주변에 있는 뭐라도 껴안아야 진정이 되거든요."

"나이도 적지 않은 여인인 것 같은데 별로 당당하다고 하긴 뭐한 습관이군."

-빠직

'..이 망할 년이?'

감히 아픈 부분을 건드려?

딱 봐도 나이는 얼마 먹지도 않아 보이는 년이.. 젊다고 다야?

이래 보여도 겨우 70살밖에 안 먹은 젊은 뱀파이어라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성을 붙잡고 차갑게 식히며 마음을 진정 시켰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다.

진정한 승자는 오히려 상대를 역이용해야하는법.

"어머.. 의외네요. 손님도 말투만 들으면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데.. 노파들이나 쓸법한 말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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