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50)

신 소저의 분위기가 갑자기 묘하게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전 저런 여자들 별롭니다.. 저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좋거든요. 서로 한 사람만 바라보는 그런 사랑이요."

"...흠?"

"뭐 영웅은 삼처사첩은 기본이니 뭐니.. 어디서 그런 말을 듣긴 했는데 애초에 저는 영웅도 아니고 원래 사랑이란 한 사람한테 전부 주어도 모자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군."

신 소저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은근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런 걸까 내 말이 동감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그대와 지내면서 그대가 취하는 모습을 못 본 것 같군. 혹시 한계는 알고 있는가?"

"한계라.."

이상할 정도로 주량이 높은 몸이라 약한 술이라면 배가 터질 때 까지 먹어도 안 취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만취한 적이 없는 것 같아 궁금하긴 했다.

'내 주량은 얼마나 되는 걸까.'

한번 알아둘 필요가 있긴 했다.

앞으로도 술을 계속 마실텐데 주량도 모르고 왕창 마시다가 혼자 있을 때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마침 지금은 믿을만한 사람도 같이 있고..

"잘 모르지만 오늘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오, 오늘 말인가?"

"네..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쓰러져도 보살펴줄 믿을만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믿을만한 사람.."

신 소저는 잠시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아닙니까? 저는 나름 소저를 믿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네. 믿어줘서 고맙군. 그 신뢰에 보답하도록 노력.. 해보지."

뭔가 분위기가 약간 심각해진 것 같아서 농담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오히려 더 오해를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 괜찮겠지.'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잔에 술을 마저 채웠다.

아직도 밤은 길었다.

* * *

"하아.."

금란주점의 최상층.

색정적인 분위기의 미녀가 한숨을 쉬며 유리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입에 기울였다.

잔에 묻은 액체가 그녀의 입가를 향해 흘러내리는 모습은 묘하게 고혹적이었다.

"요즘은 괜찮은 남자 없나.."

최근 들어 입맛에 맞는 남자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던 그녀의 뒤로 문이 열리며 다른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장님. 오늘 보고입.."

"아, 됐어. 어차피 매일 하는 건데 하루쯤 쉬지 뭐. 안 그래도 요즘 욕구 불만이라 신경질 나는데."

"..알겠습니다."

이 거대한 주점의 점장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 언행이었다.

"오늘 들어온 손님 중에 맛있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

"아.. 지금 3층에서 접대를 받고 있는 남자가 외모가 상당했습니다. 무공의 수준도 절정 수준이라고.."

"경지가 높으면 뭐해. 겨우 너희한테 헤벌레 하는 남자에 내가 만족 할 것 같아?"

"..."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인들도 절대 어딜 가서든 미녀라는 소리를 들을 자신이 있는 외모였지만 눈앞에 있는 여인 만큼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외모였으니까.

"하아.. 로드께서 불러주시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오늘도 그냥 참아야 하나.."

"아.. 저기.. 얼굴은 모르겠지만 흥미가 가는 손님은 계셨습니다."

"응?"

이상한 말이었다.

얼굴을 모른다라. 가면이라도 쓰고 들어온 것일까?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 해도 술을 마시려면 뭐든 벗어야 할 테니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저희가 직접적으로 접대를 해드린 것은 아니고 여인인 일행 한 분과 함께 오신 분인데.. 피풍의를 쓴 채로 안쪽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흐음.."

안쪽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망토라.

이전 세계에서의 까다로웠던 영웅이 생각나는 묘사였지만 이곳에 그자가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 착각이리라.

절묘하게 각도를 조절했거나 대충 신묘한 영물의 가죽이라도 이용했겠지.

"그런데 그게 왜? 얼굴이 안 보이면 도박이잖아. 내가 아무리 굶주렸다지만 도박이라도 하라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그.. 뭐랄까.. 여인으로서의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가까이 가기만 했는데도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지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흐음."

동족이라도 되는 걸까?

이전 세계였다면 인큐버스를 떠올렸겠지만 이 세계에 그들이 있을 리가 없으니 차라리 매혹을 쓰고 있는 동족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꽤 흥미가 가는 이야기였다.

다른 여자까지 데려왔다는 점에서 더더욱.

-스릅

눈앞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랜만에 꽤 괜찮은 오락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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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 터벅..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차가운 죽음 속에서 눈을 뜬 뒤, 유성이를 찾기 위해 헤맸지만 유성이가 어디 있는지,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방향으로 몸을 이끌 뿐

-터벅..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의 이 타오르는 듯한 갈증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 갈증을 해소할 방법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피..'

다른 생명의 피를 마셔라.

그 목에 거칠에 이빨을 박아 넣고 몸부림과 비명을 안주로 삼아 목을 축여라.

신선한 인간의 피를.

본능을 넘어선 충동.

지금도 옆을 지나가는 인간의 목에 이를 박아 넣고 피를 빨라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았다.

비인간 적이라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성아..'

만약 피를 반드시 빨아야 한다면 그 대상은 유성이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 따위 마시고 싶지 않다.

누군가 억지로 입 안에 넣는다고 해도 토해낼 것이다.

-꾸욱

내가 깨어난 곳에서 챙긴 피풍의를 최대한 눌러 썼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되살아나면서 외모가 일반적인 중원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바뀌어 버렸으니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눈은 붉어졌고 원래 흑색이었던 머리카락도 군데군데 붉은색이 감돌고 있었다.

'색목인이라..'

생전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이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내 감상보다는 유성이의 감상이 더 중요하다.

만약 유성이가 이 붉은 눈을 징그럽게 생각한다면 기꺼이 내 손으로 뽑아버릴 각오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유성이를 보지 못할 테니 가능하면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아. 눈을 바꿔 끼우는 건 어떨까.'

그러면 좋든 싫든 본인도 한쪽은 가지게 되는 것이니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지 않을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제법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끼익

도착한 목적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자 마자 시끄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성질 나빠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입구 근처의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용건은?"

"..사람을 찾고 있는데."

"소개장 같은 건 있나?"

-탁

품 속에서 챙겨온 물건을 꺼냈다.

붉은 심장의 문양과 의미 모를 숫자가 그려져 있는 징표였다.

"..흠. 그쪽 소개로 왔구만."

사내는 잠시 징표를 살펴보더니 내게 되돌려 주었다.

-휙휙

"일단 따라 들어오슈."

사내를 따라가자 바깥의 시끄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찾는 사람의 이름, 나이. 인상착의, 그리고 대충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 등등 아는 것 전부 말해봐. 종이와 붓도 필요한가?"

"..아니. 이름은 단유성. 그리고 나이는.."

-멈칫.

그러고 보니 내가 죽은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이 멀쩡히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마교가 세상을 지배했다거나 하는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이 몇 년도지?"

"거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사내가 한숨을 쉬면서 알려준 년도와 유성이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10년 정도가 지났으니까..'

"아마 약관 정도."

"이름은 단유성.. 나이는 약관 정도.. 인상착의는?"

"..."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당시 작고 귀여웠던 유성이가 건장한 청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

"..잘 모르겠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근데 어렸을 때는 굉장히 작고 귀여웠어."

"..그렇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적어두지. 그 외에는?"

"10년 전 당시에는 화산파 소속이었어. 그 다음은 몰라."

"쓰읍.. 구파일방이면 값이 조금 올라가겠는데.."

"..부족하면 나중에 말해. 의뢰를 받든 뭐든 해서 줄 테니까."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아가씨가 가져온 소개장의 주인이 조금.. 뭐랄까.. 우리 쪽에선 여러모로 곤란했던 손님이거든. 항상 대금을 한참 늦게서야 겨우 겨우 주시는 분이라.. 우리 쪽도 곤란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어쩌면 대금을 선불로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이게 물건이라면 모를까 정보는 들으면 끝이잖아?"

"..쯧."

생각보다 쓸모없는 여자였다.

돈도 많지 않았고 문서처럼 보이는 종이도 죄다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문자로 쓰여져 있어 그나마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게 하오문과의 연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일 줄이야.

없느니만 못한 정도는 아니겠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못 미쳤다.

-철그럭

"일단 이게 지금 가진 돈의 전부야."

"음.. 이걸론 한참 부족할 것 같은데."

"..본론만 말해."

"시원해서 좋네. 별건 아니고. 기세를 보니까 칼 좀 쓸 것 같은데 부탁 좀 하자고."

'살인 의뢰였나.'

해본 적은 없지만 하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유성이를 만나러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마음의 가책도 없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

"누구를 베려고?"

"어이쿠, 보기보다 성질이 조금 급하네. 확실히 베려는 건 아니고.. 뭐랄까. 경고 좀 해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

"경고?"

"응. 여기서 마차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에 금란주점이라는 주점이 있어. 원래 하오문이랑 연이 깊은 주점이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돈도 안줘.. 협력도 안 해줘.. 아무리 요즘 잘 나간다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괘씸하다 이거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 했다.

하오문 소속이었던 주점에서 독립 비슷한 걸 꾸미고 있는 상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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