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할아버지.. 말하기 힘드시면 나중에 얘기 하세요."
"아니다.. 지금 말해야 한다.. 잘 듣거라 유성아.. 이 할애비가 마지막으로 너에게 하는 부탁이니.."
할아버지의 기침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의사는 아니지만 각혈이 보통 일이 아닌 것은 알고 있기에.
"하, 할아ㅂ.."
"화산의 매화향을 맡아보고 싶.."
-툭
그 말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짐을 싸들고 바로 화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내가 속세에서 이루고자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입산 시험은 굉장히 어려웠다.
웬만큼 덩치가 좋고 근육이 많은 아이도 허구한 날 떨어지는 것이 화산의 입산 시험이었는데 근육은 커녕 동갑의 여자애들보다 몸이 약한 내가 무슨 수로 시험을 보통 방법으로 통과하겠는가.
"허억.. 허억.."
보통 방법으로 통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 내 선택은 빨랐다.
"제발 입산하게 주세요!"
"자, 잠깐! 지금 뭐 하는.."
시험을 담당하던 사람의 다리에 매달렸다.
상대가 남자였으면 시도도 못했을 짓.
그동안 어른들. 특히 여자들이 나를 좋게 봐주던 것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 울면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가족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유언이 화산의 매화향을 맡아보고 싶으셨다 라는 것.
"..딱한 사정이구나."
덕분에 무사히 입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입산해도 되는 건가 궁금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유일한 가족의 마지막 유언.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드릴 거다.
* * *
스승님이 수련을 하러 들어가셨다.
위험했다.
그동안 유성이를 보며 감정이 폭주하더라도 간신히 유성이나 스승님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억눌렀는데 스승님이 없어진 이상, 감정이 폭주하더라도 억누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요즘 감정이 폭주하는 정도가 늘어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유성이가 귀여운 짓을 할 때 버티는 것도 일이었지만 특히 아직도 유성이가 다른 여자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눌 때의 장면을 생각하면 살의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감히 유성이의 얼굴을 본 그 눈을 도려내고 유성이에게 꼬리를 친 혀를 잘라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쯤에는 나 스스로 두려운 감정도 들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교류를 잘 하지 않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을 베풀며 즐겁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런 섬뜩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두려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과연 이 상태로 유성이를 만나러 가도 좋을까?
만약에 또 감정이 폭주했는데 참지 못한다면?
그래서 유성이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면?
-부들부들
'그런 건 싫어..'
아무리 그래도 유성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싫다.
순수하고 착한 아이다.
내 욕심 때문에 상처를 주게 된다면 아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것이다.
'..조금만.. 버티자..'
결국 그날은 유성이를 만나러 가지 않기로 했다.
비록 유성에게 말을 하지 못해 유성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지금 유성이를 만났다간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억지로 수련을 이어나가며 유성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아무리 내공을 순환시켜도 머릿속에서 유성이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나를 환영해줄 그 아이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품에 안고 싶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음껏 쓰다듬고 싶었다.
향기로운 향기를 풍기고 있는 몸에 코를 가져다 대고.
옷을 거칠게 찢어서 땅에 드러 눕히고 배신감에 흘릴 눈물을 핥은 뒤 기겁할 표정을 보고 싶었다.
'...?'
뭔가 이상했는데 뭐가 이상한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고 수련을 이어나가 해가 저물고 밤이 된 시간.
자기 위해 침상에 누웠다.
아직 까지 머릿속에서 유성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빨리 자자..'
머리를 끌어안고 한시라도 빨리 잠에 들기를 청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유성이에 대한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오늘 유성이는 뭘 했을까.'
내가 말도 없이 가지 않았기에 혹시 오래 기다리진 않았을까 걱정됐다.
내가 아는 유성이라면 내가 오지 않더라도 나를 계속 기다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유성이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내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줬을까? 배신감을 느꼈을까?
'미안해..'
누나가 못나서
누나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유성이를 만나러 갈 자신이 없었어.
만약 유성이를 만나러 갔으면 유성이한테 큰 상처를 줄 것 같았어.
'정말 미안..'
혼자서 나를 오랬동안 기다리고 있을 유성이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외로움을 타고 있는 모습에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유성이에게 다른 여자가 다가왔다.
[왜 혼자 있니?]
[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안 와서요..]
[저런.. 그러면 누나랑 같이 갈까?]
[하지만 누나가..]
[너를 혼자 기다리게 내버려 뒀잖아. 아마 기다리는 너는 생각도 안 한 거겠지. 자, 누나랑 가자.]
[...그럴까요?]
-콰득
눈이 크게 뜨여졌다.
손에 쥐고 있던 이불이 망가진 것이 보였다.
"안돼.."
유성이는 줄 수 없다.
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게 누구라고 하더라도 감히 유성이를 탐한다면 절대 용서 못한다.
-스릉
검을 차고 유성이와 만나던 곳으로 향했다.
내가 했던 역겨운 상상이 사실 일리가 없지만 확인은 해봐야 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달려가는 동안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씩 식기 시작했다.
'..하긴. 유성이가 그럴 리가 없지.'
단순히 내 과민 반응일 것이다.
그 장소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쯤 볼 수 있었다.
-휙 휙
유성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괜시리 유성이를 의심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정말.. 과민 반응도 적당히 해야지..'
유성이가 혼자 있는 사이 다른 여자가 유성이에게 접근하는데 그걸 유성이가 또 받아준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유성아~"
머리도 식었겠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지금이라도 유성이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흠칫!
유성이가 내 목소리를 듣더니 몸을 떤 것 같았다.
"누, 누나 왔어요?"
"응.. 오늘은 일이 있어서.. 미안. 내가 많이 늦었지? 다 설명해 줄게."
두 팔을 벌리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성이에게 다가갔다.
-주춤
내가 다가가자 유성이가 뒷걸음질을 쳤다.
"..왜 피해?"
"누, 누나.. 지금 제가 땀이 많이 나서.."
"누나는 유성이 땀 냄새도 좋다니까? 자, 빨리 일로 오라니까?"
"..."
내 차가운 목소리 덕분일까
유성이가 떨리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안겼다.
"하아아아.."
품에 안긴 유성이의 냄새를 맡으며 어깨에 턱을 올렸다.
정말.. 유성이는 왜 이렇게 땀 냄새도 향긋할까..
오늘 따라 평소랑 다른 향도 나는 게 다른 사람의 향이 섞인 것 같은..
-쾅!
"꺼윽!"
유성이의 몸이 머리부터 땅에 박혔다.
그 머리에는 내 손이 올라가 있었다.
"어떤 년이야."
"그, 그게 무슨.."
"어떤 년이냐고!!!"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났다.
역겹고, 혐오스럽기 그지 없는 여자의 냄새가 그의 몸에 묻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쯤엔
-콰직
더 이상 내 폭주를 막을 무언가가 없어진 뒤였다.
-까드드득
'대체 어떤 년이..!'
착각이 아니었다.
유성이의 몸에서 확실히 다른 더러운 여자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꾸욱
"어떤 년이야."
"자, 잠깐만요 누나. 지금 오해가.."
"오해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해."
"히끅!"
살의를 내뿜자 유성이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긴 익혔다지만 아직 삼류 수준도 안되는 아이.
내가 진심으로 내뿜는 살기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랬다.
나는 지금 유성에에게 진심으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덜덜덜덜
내 살의에 몸을 떨며 침묵하고 있는 유성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장 말해."
"누, 누나를 기다리는 사이에 다른 누나가 다가와서 누굴 기다리냐고.."
"[누나]?"
-꽈악
내 손이 가느다란 유성이의 목을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