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50)

저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혹시 자신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

하지만..

"..미안."

"...아."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몸이 아니야. 타고난 근골이 너무 약해. 근육 하나 붙으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수련해야 할 거야."

약해도 너무 약했다.

아무리 어려서 몸이 잘 발달하지 않았다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유(柔)를 다루는 무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있지 깃털로 바위를 막을 수는 없다.

최소한의 근력은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소리다.

정말 이런 몸으로 어떻게 입산시험을 통과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알고 보면 오성은 뛰어나기라도 한 걸까.

그가 무공을 쓰는 모습을 보면 딱히 그런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 의문이었다.

"...그래도 익힐 거예요."

그때 그의 각오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화산의 무공을 익히고 싶어요."

유악한 외모와 달리 확고한 각오.

이렇게 보니 제법 모습이 든든해 보이기도 했다.

"힘들지 않겠어?"

"..힘들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각오하면서 들어온 거니까."

"흐음.."

마냥 유약해 보이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자신만의 뜻이 있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아까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기회였다.

그를 도와주고 그의 호감을 사는 것은 물론이요 도와주는 과정에서 합법적(?)으로 신체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도 남자다.

지금부터 계속 몸에 조금씩 새겨 넣어 주면 나중에는..

'후후..'

원대한(?) 계획을 품으며 그날은 적당한 수련법을 알려주고 헤어지고 돌아갔다.

그날 스승님에게 그와 첫 대화를 나눴다는 것에 대한 자랑을 긴 시간 동안 떠들어 댔다.

다음날이 기대되는 마무리였다.

.

.

.

"그런데 유성아. 너는 왜 화산의 무공을 익히려고 하는 거야?"

-슉

유성이가 내지른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말을 걸었다.

-슉

지금은 나름의 내기 중이었다.

그가 내가 알려준 매화권으로 내 옷깃이라도 스치면 그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기.

반대로 내가 이기면 반 시진 동안 그는 몸의 자유를 잃는다.

참고로 그는 아직도 그를 향한 내 흑심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을 마음대로 하는 것도 그저 연상의 누나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앞으로 4년하고 350일 정도만 더..'

그러고 보니 생일이 언제인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한 100일 정도만 깎아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슉

"화산의 무공을 배우는 이유요?"

"응. 사실 도사라는 게 이것저것 제약도 많고 단순히 무공만 익히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화산까지 오지 않아도 되니까."

단적으로 단순히 무공만 익히는 게 목적이라면 길거리에서도 구할 수 있는 삼재심법만 익혀도 무공은 무공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상위 무공을 원한다면 당연히 문파에 들어가도 되지만 원래 문파란 그 이름값이 높으면 높을수록 벽이 높은 법이다.

입산 시험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그렇게 까지 화산의 무공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매화를 피우고 싶어요."

-슉

"매화?"

저런 이유라면 확실히 화산에 오는 것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매화는 왜?"

"할아버지의 유언이셨어요. 화산의 매화향이 맡아보고 싶었다고."

"...아."

갑자기 숙연해지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미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까."

-슉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내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 가지고..!'

어차피 한번은 물어봤어야 할 일이었겠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이 분위기 어떻게 할 거야!'

일단 계속 주먹을 뻗고 있기는 하지만 영 힘이 실리지 않았다.

"유, 유성아..? 그러면 오늘은 그만 할ㄲ.."

이 어색해진 상황을 일단 끝내 보기라도 할까 입을 연 순간

-툭

"?!"

그가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면 땅에 부딪힐 것은 뻔한 일.

-텁

"괘, 괜찮아?!"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꼬옥

"잡았다."

유성이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이것도 이긴 걸로 쳐 주시는 거죠?"

"이, 이러는 건 반칙이지."

"에이. 도사가 거짓말하면 안되죠."

"...하아."

당했다.

설마 이런 영약한 구석이 있을 줄이야.

"그래. 뭐 들어줄까?"

"정말 말해도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웬만한 건 되겠지만 너무 힘든 건 안돼. 적당한 영약 정도라도 구해줘?"

"그러면.. 누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응?"

순간적으로 뇌가 멈췄다.

내가 방금 뭐라고 들었더라?

"유성아. 방금 뭐라고.."

"누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요."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두근두근

"누, 누나라고?"

"네. 제가 고아로 지냈었어서 가족이라고는 할아버지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족이 되어 달라는 건 너무 과한 요구니까 누나라고 부를수만 있게 해주세요."

"..."

가족?

"어.."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지금 내가 듣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뇌가 굴러가지 않았다.

"너무 건방지죠..? 감히 속가제자가 누구한테 이런 건방진 호칭이나 제안하고.."

"아, 아니야! 괜찮아! 누나라고 불러! 아니 불러줘!"

다시 듣고 싶었다.

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누나라는 호칭을.

"저, 정말 괜찮아요?"

"응. 괜찮으니까 빨리."

그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누나."

-부들부들

끊어지기 직전처럼 보이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생각했다.

과연 5년을 버틸 수 있을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라고 해도 스스로 외모에 대해서 자찬을 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겸손이라는 것은 괜히 있는 일이 아니기에 누군가가 외모에 대해 칭찬을 하더라도 멋쩍게 웃으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외모가 어떤 수준인지 아는 만큼 그들도 자신들의 외모가 어떤 수준인지 알고 있다.

그야 어렸을 때부터 어딜 가서든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텐데 모를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의 외모가 어느 정도 수준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무기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곱게 자랐다면 모를까 고생을 하면서 자란 이들이라면 더더욱.

* * *

"흥~ 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유성이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말 실수를 해서 혹시 유성이를 앞으로 볼 수 없는 걸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진도를 더 나갔다.

'가족..'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비록 유성이가 말한 가족과 내가 생각하는 가족이 다른 거겠지만 원래 이런 건 이런 식으로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언젠가 누나가 여보가 될지.

"후훗.."

아직도 틈만 나면 누나라고 불러주는 유성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잘 때 고생했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러다 큰일 날지도 모르겠다.

'수련에 게을러지면 어쩌지.'

이대로 가다간 수련이고 뭐고 하루 종일 유성이 생각만 할 것 같다.

지금도 하루 대부분을 유성이 생각을 하면서 지내지만 정말 유성이만 있으면 수련이고 무공이고 전부 내팽겨 쳐버릴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유성이와 사랑을 나누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스승님이..'

과연 스승님이 내가 그 지경까지 돼도 가만히 있으실까?

내가 아는 스승님이라면 분명 나를 크게 꾸짖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어져야지 사랑에 정신이 팔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실 분이 아니니까.

유성이와 나를 억지로 떨어트리려고 할 수도 있다.

-까득

그건 안된다.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나의 유성이를 빼앗아 가는 것은 용서 못..

'핫.'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걸까.

감히 스승님에게 이런 건방진 마음을 품다니.

'..일단 유성이한테나 가자.'

요즘 사고방식이 점점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유성이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유성이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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