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그래도
나 자신이 역겨운 생각이었지만
그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도 미움 받지 않고 있다는 지금 이 상황 만으로도 만족했다.
나는 그에게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으니까.
* * *
'9997..!'
검술의 초식이 펼쳐지며 주변으로 매화향이 퍼지고 있었다.
스승님이 내주신 숙제이자 하루 일과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식 일만 번.
'9998..!'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매화검이라면 모를까 스승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독문무공은 아직 내가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난해해서 초식 하나 하나를 펼치는 것에도 온 집중을 다 해야 했었다.
검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몸이 익숙해지면 무아지경의 경지에 들어서 금방 흘러가지만 스승님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시고 훈련량을 늘리신다.
'9999..!'
물론 힘들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불쾌한 감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10000..!'
훈련이 끝나면 이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다닐 수 있으니까.
비록 화산 안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 아이도 화산에 있는 아이였으니까.
"허억.. 헉.."
일만 번을 전부 끝낸 뒤 주저앉을뻔 했지만 이를 깨물며 접히는 무릎을 펴 방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기 전에 몸을 씻어야 했다.
그 아이에게 이렇게 몸에서 냄새가 나는 상태로 갈 수는 없으니까.
-스륵
수련용 옷을 내팽겨치듯 벗은 뒤 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물이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며 불쾌한 땀까지 같이 씻겨 내려갔다.
근처에 놔둔 거울로 스스로의 몸을 둘러보며 혹시라도 몸에 자국이라도 남지 않았나 확인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가꾸는 것에 관심 없었지만 이것도 다 그 아이 때문이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사랑만 있다면 나이 차이는 상관 없었다.
"흥~ 흥~"
콧노래를 부르며 피부 관리를 위해 몸 곳곳에 화장품을 발랐다.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상태가 좋았지만 원래 이런 것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었다.
-몰캉
'조금 커졌나?'
한 손으로 감싸기에는 약간 커다란 가슴.
원래 그동안 커봤자 방해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소중한 여인의 무기였다.
'유성이도 큰 걸 좋아하겠지?'
대부분의 사내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마 작은 걸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다른 여인을 자주 만나본 적이 없어서 쉽게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스승님이랑 비교해 본다면..
'...'
..스승님 말고 며칠 전 만난 사숙의 제자와 비교해봤다.
'흐흥.'
확실히 컸다.
이 정도면 유성이도 좋아할 거다.
-스륵
미용이 끝나고 가진 옷 중 가장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경공을 펼쳐 속가제자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향했다.
근처에 도착한 뒤, 미리 약속한 장소로 도착하자 한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것일까
"누나!"
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포옥
"보고 싶었어요!"
"응.. 누나도.."
품 속에 푹 안기는 작은 아이.
내 품에 안긴 아직 지학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5년만 참자고.
[소연아, 스스로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도 해봤으면 좋겠구나.]
내가 화산에서도 다른 사람과의 교류 없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때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다.
실제로 스승님은 다른 사숙의 제자 등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나를 이어주며 내가 교류를 하기를 기대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들이 전하는 감사 인사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친절을 베풀 때 잠시 뿐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와아.."
이 장소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경공을 연습하기 위해 내가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을 돌아다니던 중 어쩌다 보니 속가제자들이 수련하는 공간을 볼 수 있는 곳을 발견하였는데 평소였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저 경공 연습을 펼치러 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귀엽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헷갈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이였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전체적으로 마르고 여린 몸. 그리고 '귀엽다' 라는 단어를 그대로 뽑아낸 것 같은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보호욕구를 자극하게 생겼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몸도 워낙 말라 더 성별이 헷갈린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 제자들이 있는 곳에 있는 것을 보아 남자아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하루는 그곳에서 그 아이가 수련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주변 제자들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를 피했고 그들의 시선에서 불편함,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는 그것에 대해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
계속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계속되는 따돌림에 결국 혼자서 구석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실력은.. 솔직히 말해서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타고난 근골부터가 너무 약해 보였고 그렇다고 오성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 펼치고 있는 것도 매화권이라는 검법도 아닌 기본적인 무공인데 아무리 배운지 얼마 안됐다 지만 엉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봐도 가장 크게 뒤떨어져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입산 시험은 어떻게 통과했을까.'
솔직히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런 몸으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험이 무르진 않을텐데.
보기와 다르게 무언가 한 수라도 있는 것일까?
'아. 지금 시간이..'
그를 보고 있느라 시간이 흐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황급히 해를 보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저물어 있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스승님이 기다리실 것 같았다.
'..내일도 있겠지?'
이미 입산한 이상 하루만에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날은 스승님이 계시는 곳으로 돌아갔다.
.
.
.
이후로도 스승님이 안 계시는 틈을 타 매번 그 아이를 보러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그 아이는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수련의 성취가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스스로 저렇게 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도와줄까?'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스승님에게 걸렸다가 무슨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러다가 크게 다쳐서 하산하기라도 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더냐?"
"히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 스승님?! 제가 수련을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오라.."
"아직 너를 나무라지도 않았거늘 왜 벌써 고개부터 숙이느냐. 그냥 뭘 보냐고 물어본 것 뿐이다."
스승님이 내 어깨를 짚고 내가 방금까지 보던 장소를 눈으로 훑으셨다.
-꿀꺽
'드, 들켰나?'
혹시 내가 그 아이를 유심히 보고 있던 것이 들킨 것일까?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계셨던 거지?
혹시 오늘 뿐만 아니라 진작에 들킨 거라면..
'아아..'
어떤 꾸지람을 들을지 벌써 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스승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며칠 전 막 입산한 제자들이구나. 소연이 네가 평소 다른 사람에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걱정을 좀 덜어도 되겠어."
"아, 아닙니다!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고.."
"응? 누구 한 명을 찾아온 모양이구나? 난 저 제자들 전체를 보러 왔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거늘."
"앗.."
특정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고 스스로 밝혀버린 꼴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게냐? 여기에 있는 제자들은 대부분 아직 지학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일텐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냥 비록 속가제자라도 같은 화산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검을 배우는 아이들을 한번 보고자 이렇게 내려온 것입니다! 맹세코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당황해 나름 변명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시선이 유독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
이미 전부 걸린 모양이었다.
"보, 보셨습니까?"
"사실 확신은 없었지만 네 반응을 보니 진짜인 것 같구나."
"?!"
설마 여기까지 와서 유도 심문이었다니
스승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 의도에 시원하게 걸려버린 것은 나였지만.
"그래서, 어떤 아이냐?"
"꼬, 꼭 말해야 합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스승의 눈을 피해서 몰래 나올게 아니라면 그래야 할 것이다."
스승님의 눈은 단호한 눈빛이었다.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될 거라는 의도가 훤히 느껴졌다.
"..저기. 저 아이입니다."
마음을 졸이며 조심스럽게 그 아이를 가리켰다.
그 아이는 오늘도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꿀꺽
스승님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속을 졸였다.
그리고 스승님의 입에서 나온 평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