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50)

깨끗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곳곳에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그녀가 평범한 중원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흠흠. 새로운 삶을 맞이한 것을 축하한다 내 권속이여. 그대가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이 섀트리님의 은총 덕분이니 앞으로 그대는 나를 따라서.."

"..내 팔은?"

-빠직

그녀의 말을 전부 듣지도 않고 팔부터 찾는 권속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뱀파이어들이었다면 크게 호통을 쳤겠지만 한번만 봐주기로 했다.

'나는 관대한 뱀파이어니까.'

"그대를 되살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지. 그대가 이 몸을 충성스럽게 믿고 따라 공적을 세우면 그깟 팔 쯤 3개도 더 달아줄 수 있.."

"없으면 네 거라도 내놔."

-푸슛

뱀파이어 여인의 오른쪽 볼에 피가 튀었다.

"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그녀의 오른쪽 어깨로 향하자 그곳에는 깨끗하게 절단되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만이 있었다.

"꺄, 꺄아악!!"

"팔 하나로는 유성이를 품에 안을 수 없잖아."

그녀의 팔을 잘라버린 여인은 그녀의 팔을 주워 본인의 빈 어깨에 맞춰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런다고 남의 팔이 몸에 붙을 리가 없었다.

"이.. 이익! 감히 하늘 같은 주인에게 반항을 해?!"

뱀파이어 여인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정신 지배 마법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꿇어라!!"   

되살릴 때 머리에 심어 놨던 마법이 발동하며 건방진 그녀의 권속은 금방 무릎을 꿇..

"내가 왜?"

지 않았다.

"뭐, 뭐야! 왜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지?!"

뱀파이어가 급하게 다시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시전했지만 이번에는 권속이 더 빨랐다.

-서걱

뱀파이어의 남아있는 한쪽 팔마저 잘려나갔다.

"꺄, 꺄아아악!!!"

"으음.. 몸이 상태가 이상한데.."

"뭐, 뭐야!! 너 뭐야!! 왜 내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 건데?!"

뱀파이어가 그녀의 권속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드마스터도 뱀파이어의 권속으로 되살아난 이상 그 명령에 이렇게 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되살릴 때부터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주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권속이 대답했다.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유성이밖에 없어."

-서걱

뱀파이어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아..'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눈에 비친 여인의 모습에는

"유성아.. 누나가 지금 갈게.. 어디에 있더라도 금방 찾아갈게.."

광기 어린 사랑.

차가운 죽음 속에서 보낸 10년의 세월 동안에도 전혀 식지 않은 뒤틀린 애정이었다.

다행히 이곳을 무슨 사람이 살 수 없는 연옥으로 보게 된 내 오해는 금방 풀렸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오해를 한단 말인가."

"저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솔직히 다니는 곳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곳보다 치안이 안 좋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대가 생각하는 것 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왜요?"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그대를 건드리겠는가."

검후님은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피풍의 바깥으로 하얀 매화가 그려진 소매를 드러냈다.

솔직히 방금 좀 멋졌다.

"비록 정파와 사파가 사이가 나쁘다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때나 성립하는 것. 웬만큼 실력이나 뒷배에 자신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감히 이걸 보고 먼저 덤벼오진 않겠지."

"원래 그런 성격이셨어요?"

뭔가 겸손한 성격일 것 같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고 싶을 뿐이네. 후처리가 더 귀찮으니."

하긴, 검 한번 휘두르면 웬만한 분쟁은 끝날텐데 괜히 주변의 시선이 더 불편하겠지.

"광동에도 와보신 적 있으세요?"

"철없던 시절에는 정의감에 휩싸여 무림 곳곳을 돌아다니곤 했으니 당연히 온 적 있었지.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네."

분명 외모는 이십대인데 말하는 것만 들으면 완전 할머..

-홱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런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네."

생각도 끝나기도 전에 검후님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었다.

저게 고수의 직감인건지 여자의 직감인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몸에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그러면 전에 광동에 왔었을 때 기억에 남았던 장소 같은 건 있으세요?"

"기억에 남았던 장소라.."

검후님은 잠시 고민하시는 표정을 짓더니

"주점이 기억에 남는군."

"..네?"

"아마 중원에 있는 주점 중 가장 큰 규모의 주점일거네. 따로 찾아다닌 적은 없지만 당시 친우가 알려주었던 말에 따르면 중원에서 이보다 훌륭한 주점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네."

"오오.."

꽤, 아니 엄청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중원 최고의 주점?

-추릅

절로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척 보니 흥미가 당기는 모양이군."

-끄덕끄덕

"뭐.. 그대도 나름 고생이 심했으니 이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가도 되는 거예요?"

"그대가 원한다면 못 갈 것도 없지. 내가 살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게."

"와 사랑해요."

-멈칫

검후님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지, 지금 뭐라고.."

"그래서 그 주점 이름이 뭐예요? 그 정도로 유명하면 분명 금방 찾을 수 있을텐데."

"..."

"검후님?"

"아, 아무것도 아니네. 주, 주점의 이름 말인가? 아마 금란주점일걸세."

지나가는 행인에게 확인해본 결과 이곳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아서 이틀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가능한 빨리 가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겨우 반 정도 와서 날이 저물어 주변 객잔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방 있나?"

"아.. 죄송합니다. 요즘 장기 투숙중이신 손님들이 많아 지금은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

검후님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당장 전날 그런 일(?)을 하고 또 같은 방을 쓰기에는 부끄러우시겠지.

"괜찮아요. 방 하나 쓸게요."

"그, 그대?!"

"어차피 단 둘이 할 얘기도 있고. 괜찮아요."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할 얘기가 많았다.

비록 사고를 치긴 했지만 뒷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같이 다니긴 했지만 밖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끼익

"이제 둘만 있게 됐네요.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그, 그런가?"

"네. 검후님은 할 말 없으세요?"

아무리 치료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서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섹스를 해버린 상황이다.

오히려 나보다는 그녀 쪽에서 더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승님을 피해 잠깐 세상에 도망쳐 나온 일개 점쟁이이고, 그녀는 정파의 최고 고수 중 한명으로 뽑히는 검후였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더 성적으로 민감하니까.

'나야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 지만 검후님은 어떨지 모르지.'

"할 말.. 물론 있네."

"그러면.. 먼저 말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말할까요?"

"..."

"말하기 힘드시면 제가 먼저 말 할게요."

그녀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말하려는 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질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없던 일로 하죠."

* * *

사실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게 내게 기회가 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결국 그의 입장에서 나는 '친한 여인'일 뿐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는 여인은 아니라는 것을.

"..."

"저도 소저한테도 각자의 사정이 있지 않습니까. 저를 치료하기 위해 한 몸 희생해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서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첫 경험에 얽매이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의 저 말투가 싫었다.

가끔씩 딱딱해지는 저 말투가 정말 싫었다.

저 딱딱한 말투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더 싫었다.

'마음이 없다..'

어쩌면 속으로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아닐까 라는 기대를.

그럴 리가 없는데.

"..."

뭘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있는 걸까.

그를 그동안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겨우 몸 한번 섞었다고 마음까지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나?

'후..'

아쉬워 하지 마라.

예상 했던 일이니.

"..알겠네."

"그러니까... 예?"

"알겠다고 했네."

잊지 마라.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죄인이다.

그에게 큰 죄를 지은 죄인.

자신이 상대라고 언제나 품던 신념을 잊지 말아라.

사람은 죄를 지었다면 그 자에게 반드시 죗값을 치르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꾸욱

이 너무나도 아픈 고통을 버티는 것 또한 내가 받아내야 할 업보였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대의 말에 틀린 것이 없지 않나.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서로에게 얽매였다가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만 줄 수 있다는 게."

"어.. 그렇긴 한데.."

-싱긋

지금도 느껴지는 고통을 버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네. 그대가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내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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