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50)

"이게 무슨.."

"감정이 꽤 격해지신 것 같아서 진정하시라고요."

내가 가끔 지구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혼자 몸부림칠 때면 스승님이 해주시던 자세다.

스승님은 쓸데없이 큰 가슴 때문에 불편하긴 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감정을 진정 시키는 데 도움을 줬었다.

아마 나는 남자라서 가슴이 없으니까 포근하진 않더라도 심장 박동은 더 잘 들리지 않을까.

"진정 좀 되세요?"

"...그래.."

"제가 자는 사이에 잠꼬대로 이름을 말했었나 봐요? 제 이름도 아시고."

"..."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랑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아요. 저는 검후님이 말한 한소연이라는 여자를 모르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찾는다는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잘 안됐어요? 혹시 찾았는데 제가 갑자기 납치 당하는 바람에 급하게 구해주러 오신 거면.."

"아, 아니네.. 아니었네.. 내 착각이었으니 걱정하지 말게.."

"이거 참 다행이라고 하기도 뭐하네요."

결국 이번에도 예지는 빗나간 모양이다.

요즘 은근 성공률이 좋았는데 이런 데서 실패할 줄이야.

"아쉽네요. 제 점도 항상 맞는 건 아니라.. 괜히 기대하게 만들었네요."

"으, 응? 그, 그렇지.. 가끔씩 틀릴 때도 있는 법이지.."

"도사라서 말이 통해서 좋네요. 틀렸다고 엄청 뭐라 하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처, 천기를 읽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니까.."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녀를 품 속에서 떼어냈다.

방 안이 더워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진정 되셨어요?"

"...됐네. 고맙네."

"저희도 이제 슬슬 일어나죠. 의원인 것 같은데 너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민폐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저, 저기.."

검후님이 일어나고 있는 나를 급하게 붙잡았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지금 급하게 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다급히 무언가를 말하려는 표정의 그녀를 보고 물어보았지만

"........."

입술을 깨물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아니네. 착각이었네."

생각보다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심각한 일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치료는 무사히 마치셨나요..?"

"도와줘서 고맙네. 그대가 아니었으면 치료할 방법도 몰랐을텐데 덕분에 살았네."

"고맙긴요.. 사람을 살리는 게 의원의 일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검후님과 의원처럼 보이는 젊은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의원이 그 민망하지만 결과는 확실했던 치료법을 알려준 사람이라 생각해 나도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게요."

"지금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네?"

"아, 아니에요. 밤새 잠을 못 잤더니 잠깐 헛소리가 나왔네요.. 하하.."

의원이 손을 저으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가렸다.

밤새 무언가에 몰두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겨있었다.

"밤새 다른 환자라도 왔던 건가?"

"아하하하.. 비슷해요.."

"아무튼 많이 피곤해 보이시니까 저희는 이만 가보죠. 제가 비상금이 있으니까.."

방에서 나오며 다시 껴입은 은둔자의 망토 속으로 손을 넣어 돈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 괘, 괜찮아요! 돈은 안주셔도 돼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요!"

의원이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치료 방법도 알려주셨는데 뭐라도 사례를.."

"..혹시 뭐든지 가능 할까요?"

"...그래도 뭐든지는 좀.."

"아하하, 농담이에요."

계속 말을 하려다가 마는 게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숨소리도 거친 것 같고 얼굴도 살짝 붉어진 게 혹시 나에게 감기가 옮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저는 한 일도 별로 없으니까 사례는 받을 것도 없어요.. 그냥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

"정말 사례는 필요 없으.."

"진짜 없으니까 빨리 가주세요!"

결국 우리는 의원에서 내쫓기다시피 걸어 나왔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그런가 보군."

"그러면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사람을 찾아봐야 하는데.."

검후님에게 듣기로 흡혈귀와 나에게 번개가 내려친 뒤 어딘지 알 수 없는 숲 속으로 이동 됐다고 들었다.

'순간이동 마법진이기라도 했던 걸까.'

검후님의, 중원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낯설기만 한 기술은 아니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고 해도 그렇게 따지면 무공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뭐, 여기가 어느 지역인지 물어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굳이 의원님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죠."

"..그런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나는 지나가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숲 속을 헤매다가 나와서 그런데 혹시 여기가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있을까요?"

"..미리 말하지만 돈은 없네."

"아이고 어르신 저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어느 지역인지만 알려주시면 조용히 물러갈테니 그렇게 경게하지 마시죠."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노인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다 생각했는지 금방 여기가 어느 지역인지 알려주었다.

"..광동일세. 대체 얼마나 헤매고 다녔으면 지역까지 잃어버렸단 말인가?"

"..."

그리고 노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광동.

무림의 남쪽 끝 지방이었다.

.

.

.

"광동이라.. 우리가 전에 있던 장소는 분명 안휘였거늘.."

"어.. 꽤 멀리 왔네요."

"마차로 다녀도 몇 주는 걸릴 거리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지.."

황당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놀지도 못했는데?!'

기껏 마음먹고 안휘까지 갔는데 하남에서도 제대로 못 놀았고 안휘에서도 겨우 하루 놀았다.

그런데 갑자기 광동?

중원의 남쪽 끝?

'..여기서 놀면 되나?'

생각해보니 마냥 나쁘지도 않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잠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이 검후님은 여러모로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았다.

"..어쩌다 이런 먼 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돌아가야겠군. 광동에서 섬서까지 가려면 꽤 오래 걸릴 테니."

"바로 가시게요?"

"어차피 화산에서도 다른 활동 없이 수련만 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자리를 오래 비우면 걱정하는 이들이 있어서 말이야. 원래 안휘로 가겠다고 하고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니.. 적어도 한번 들르긴 해야겠지."

"아.."

그녀가 섬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옆에 있을 때도 이렇게 위험한 일이 자주 생겼는데 나 혼자?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래도 기껏 여행을 목적으로 나왔는데 바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내 감정을 읽은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겠군. 소식 자체는 전하는 것은 전서구를 빌리기만 해도 되는 일이니."

"그러면.."

"돌아가면서 즐길 거리가 있다면 즐겨보도록 하지. 그런데 이쪽 지방에는 사파 세력이 많아 치안이 별로 좋지 않으니 항상 조심하는 걸 추천하네."

"..많이 위험할까요?"

"사파 세력이 득세라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인데 그렇게 위험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대가 지금까지 있던 지역은 구파일방이 관리하던 곳.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지 않을 것은 염두하고 있게."

"으음.."

나는 기존에 있던 지역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흡혈귀가 사람들을 습격해서 토벌대가 꾸려지고.. 선상에서도 난리를 부리고.. 대낮에 사람을 납치해서 지하로 끌고 가고..

'여기는 대체 얼마나 지옥인걸까.'

딱히 전에 있던 지역도 치안이 좋지는 않은데 이것보다 안 좋다고?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나?'

그냥 놀지 말고 하루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흐흠.. 카렐녀석.. 꽤 괜찮은 시체를 보냈잖아?"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

이제 설명하지 않아도 누가 봐도 뱀파이어라고 보이는 여성이 마법진 위의 관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하긴.. 이전 세계에서도 은근히 추파를 던지던 녀석이었으니.."

카렐이 듣는다면 미간을 찌푸릴 소리였다.

그가 이 시체를 그녀에게 보낸 이유는 권속들의 배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낸 것이지 결코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생전의 경지도 소드 익스퍼트 수준에.. 이 엄청난 원한.. 어느 정도 개조만 제대로 해주면 소드마스터 부럽지 않겠어."

뱀파이어인 그녀마저도 살이 떨릴 정도의 엄청난 원한이었다.

그녀는 소드마스터인 권속을 가지고 자랑하던 다른 뱀파이어들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다시는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해주겠어."

그리고 그녀는 이후 이 시체를 최고의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힘들게 모아 놨던 고급 재료는 물론이고 부족하다 싶으면 원래 있던 권속을 폐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정도로 이 새 권속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절약을 하지 못한 탓일까

"팔 하나는 무리겠는데.."

몸을 전부 복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다른 부위까지는 부패를 되돌리는 게 될 것 같지만 아무래도 팔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피를 마셔 재생할 수 있는 흡혈귀의 특성을 생각하면 일단 되살리기만 하면 팔 하나쯤은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햇빛 아래에서 걸을 수 있게 하고.. 재생 능력이랑.. 감각도 생전에 비해서 증폭시켜 놓고.. 신체 능력도 어느 정도 향상 시켰고.. 혹시 모르니까 정신 지배 마법도 점검해 봐야지."

지배가 과할수록 권속을 움직이는 게 매끄럽지 못하고 버벅임이 생기게 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투자해서 만든 권속이 폭주라도 하면 그녀는 끝이었으니까.

"이제 되살리기만 하면 되겠어."

관에 시체와 피를 집어넣고 주변에 그려진 마법진을 점검했다.

재료도 완벽했고 주술도 완벽했다.

이제 마력을 불어넣기만 하면 금방 흡혈귀로 되살아날 것이다.

-우웅!

'나도 드디어 소드마스터 부럽지 않은 권속을!'

마법진을 작동 시키고 뛰지 않는 심장을 두드리며 가슴을 졸였다.

주변에 펼쳐둔 재료들이 주술의 힘에 의해 흡수되고 마법진이 뿜어내는 핏빛의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쿵!

관이 크게 들썩이며 마법진은 그대로 빛을 잃었다.

"돼, 됐나?"

뱀파이어 여인은 금방이라도 달려가 관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공했다면 위엄 넘치는 자세로 권속을 맞이해야 하니까.

-덜컹!

'여, 열렸다!'

잠시 후 관 뚜껑이 열리며 안에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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