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50)

"..."

내 말에 잠시 스승님이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짓더니

"맞다. 네놈 잠버릇이 꽤 고약하더구나."

"예?!"

"옆에서 자는 나를 걷어차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평소에 이 스승에게 쌓아두던 원한을 잠버릇이라는 명분으로 다 털어내는 줄 알았다."

갑자기 몽유병을 선고하셨다.

이후에 나름 잠버릇을 고쳐보고자 노력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너무 푹 잠드는 바람에 잠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 * *

"그러니까 도사님..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지금 당장은 사람이.."

"지금 사람이 납치 당했단 말일세! 추적술을 익힌 자가 필요하다고 몇 번을 말하게 하는가!"

추적술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시시가각 내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혈교다.

그 간악무도한 녀석들이 데려간 인질들을 멀쩡히 둘 리가 없다.

나와 잠깐 같이 다녔다는 이유로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불게 만들기 위해 고문을 가할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사이한 주술들로 정신을 망가트리려 들것이다.

시간이 지체 될수록 그가 무사하게 있을 확률이 떨어지고 있단 말이다.

'나 혼자서 이 지역 전부를 뒤져서라도..'

-우르릉

무모한 생각을 하는 사이 익숙한 구름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려나봅세. 빨리 들어가세."

"어휴 구름이 척 봐도 심상치 않구먼."

"..."

어느덧 하늘에는 자욱하게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 특유의 구름이 낯설지 않았다.

"..여소천?"

혈교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거의 보지 못한 친우이자 앙숙.

청뢰검 여소천.

그녀와 함께 싸울 때 자주 보던 구름이었다.

'이 근처에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녀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혈교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그녀가 곤륜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 먼 안휘까지 그녀가 나와있을 확률은 너무 낮았다.

그렇다면 저 구름은 여소천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 봐야 했다.

'...어쩌면.'

구름이 흐르는 방향으로 발을 움직였다.

부디 이 의심이 맞기를 바라면서.

* * *

"허억.. 허억.. 제길.. 야만인 주제에.."

마르딘은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있는 남성을 노려봤다.

저항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세뇌를 걸어보거나 약물을 먹여봤지만 조금 헤롱헤롱 하는 것 외에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질 못했다,

"주인님. 이러다가 귀한 약재가 전부 소모될 것 같습니다. 지금 마력도 별로 없으실텐데 조금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너까지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겨우 이런 정신 방벽 하나 못 뚫을 것 같더냐!"

"저는 단지 주인님께서 고작 이런 일에 감정을 소모하시는 것이 큰 손실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인은 이미 그를 다루는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었다.

이 뱀파이어는 절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비위를 맞춰줘야 제대로 말을 듣는다.

정말 어린애 같은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제가 밤새 고문을 해서라도 전해 드릴 테니 주인님은 여독을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 이렇게 간단히 몸을 쓰는 일은 저 같은 미천한 몸이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흠. 그렇지. 굳이 내가 힘 빼가면서 고문을 할 필요는 없지."

마르딘은 그 말에 또 좋다고 웃음을 지었다.

"좋다. 그러면 나는 잠시 잠을 자고 올 테니 너는 그 녀석을 순종적이게 만들어 놔라. 그러고 보니 태양빛을 받아서 몸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군."

다른 세계의 태양이라 그런지 이 세계의 태양빛은 뱀파이어들이 쬐더라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비롯한 전승 탓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없어진 것은 뱀파이어들에게 고무적인 일이었다.

비록 한정적인 시간이지만 낮에도 바깥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푹 쉬다 오십시오. 제가 전부 처리해 놓겠습니다."

마르딘이 떠난 뒤 여인은 여전히 헤롱거리고 있는 점쟁이를 바라봤다.

-흔들흔들

"제 말 들립니까?"

"히히.. 기분 좋아여.."

"확실히 세뇌는 안 걸린 것 같은데.."

그녀는 세뇌에 걸린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눈에 빛도 잃은 채로 주어진 질문에 대답하거나 명령에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망토 때문에 눈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세뇌를 당했다기 보다는 약간 정신을 놓은 느낌이 강했다.

비유하자면 술이나 약에 취한 것 같은.

"...흐음."

여인은 주변을 둘러봐 마르딘이 확실히 갔는지 확인한 뒤 점쟁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을 모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아까 느꼈던 향기가 다시 느껴졌다.

-추릅

절로 입에 침이 고이는 향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 목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을 정도로 향기로운 체취였다.

하지만 주인인 마르딘이 오기 전에 먼저 인질에 이를 박아 넣을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 마르딘은 이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신경 안 쓰겠지.'

이미 뭐든지 해서 입을 열게 만들겠다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그 귀찮은 뱀파이어가 그때 가서 뭐라 하고 처분하러 들더라도 상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향기라면 목숨과 맞바꿔도 될 것 같았다.

-스윽 슥

모자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를 박아 넣을 목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연약한 살결이 느껴졌다.

-꿀꺽

촉각만으로도 식욕과 성욕을 자극하는 몸이라니

아마 이 때를 놓치면 평생 이만한 극상의 육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간지러워요.."

"..가만히 있으세요. 아픈 건 넣을 때 처음 뿐이니까."

"...잠깐만. 대사가 뭔가 이상.."

무슨 실수라도 한 건지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오려는 기미가 보였다.

서둘러 어두운 모자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연약한 목에 이빨을 박으려던 찰나

-콰과과과광!!!!

위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 때문일까.

"뭐, 뭐야! 그쪽 뭐해요!"

'..칫.'

그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피 몇 모금 빠는 것 정도야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 빨리 빨면..

"이게 무슨 소란이냐!! 어서 나가서 확인하지 못할까!!"

"..."

-까드득

쓸모없는 주인을 욕하며 몸을 돌려 소리가 들린 상층으로 향했다.

'..침입자?'

소리가 들린 곳에선 한 여성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푸슉!

"감히.. 감히 그 아이를.."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제, 젠장! 일어나라 실험체들아!"

그의 마지막 남은 권속이 사망했음을 느끼자 마르딘은 그의 연구실에 있는 모든 실험체들을 깨워버렸다.

원래 후일 그들의 정체를 이 세상에 완전히 드러내고 전쟁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두던 병사들이었지만 마르딘에게는 지금 당장 그의 목숨이 중요했다.

-덜컹! 덜컹!

-쾅!

"""그으으으..!!"""

한 명 한 명의 무력이 이류에서 일류 수준에 흡혈을 통해 회복까지 가능한 흡혈귀 수백 구.

지금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내보내면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는 병력이지만

"감히 어디에 그 더러운 이를 들이대는 것이냐!"

-카가각!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검후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흡혈귀들이 목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잉!

그녀가 휘두르는 검 이외에도 주변에 널부러져있던 검이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 흡혈귀를 베기 시작했고

-서걱! 서걱!

"크아아아악!!!"

"끄어어억!!"

"비켜라!!"

아무리 상처를 재생할 수 있는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머리를 잃으면 재생할 수 없었기에 그 숫자가 빠르게 줄어가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젠장.. 젠장..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절대 들켜서는 안될 지하의 연구소가 발각되고 그 안으로 분노한 소드마스터가  진입해 실험체들을 베어가며 최하층으로 향해오고 있는 상황.

마르딘은 손톱을 물어 뜯으며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실험체들과 힘을 합쳐서 소드마스터를 물리친다.

-콰과과광!!

위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했다.

2.서둘러 지원을 요청한다.

요청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도우러 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3.도망친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다.

'비밀통로를 이용해도 완벽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지옥 끝까지 찾아올 기세니까. 근데 그렇다고 워프 게이트를 발동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한데..'

공간과 공간 사이를 뒤틀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면 완벽하게 도망칠 수는 있겠지만 가동 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있는 실험체들로 시간을 버는 사이에 발동 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떻게 더 시간을 끌만한 방법이..'

연구실 입구를 무너트리면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을까 고민하던 도중

"뭐, 뭐야! 지금 뭔 상황이야!"

아까 권속에게 맡겼던 사제가 기둥에 묶인 채로 버둥대고 있었다.

그를 보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인질?'

고전적이고 뻔하지만 효과적인 수단.

사제가 본인 입으로는 검후와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했지만 검후는 그를 아꼈을 가능성도 있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수가 없기도 하고.

"가만히 있어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몸에 바람 구멍을 만들어 줄테니."

"히익.."

사제에게 마력을 내뿜으며 위압을 가하자 겁에 질린 건지 금방 몸이 굳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마법진을 가동 시키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 수 있도록 입구를 무너트렸다.

크게 시간을 지체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소중했다.

.

.

.

-콰아아앙!

"감히 얕은 수를..!"

검후가 분노한 표정으로 무너져 내린 입구를 폭발 시키며 연구소의 최하층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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