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무공을 익히지도 못하는 몸이니 기껏해야 내가 상점창에서 사도 그걸 또 가져다 파는 용도가 대부분일텐데 그러다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이런 망토도 못 구했지.'
얼굴도 가려주고 체구도 가려주는 데다 보온, 방수, 방한, 통풍 등 모든 기능을 두루 갖춘 형편 좋은 망토를 무림에서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빙의 초기. 스승님을 만나기 전 이 잔뜩 망가진 몸으로 빙의했을 때 하루하루를 매일 생기는 포인트로 최하급 포션이라도 사가면서 연명했던 걸 생각하면 내 입장에서는 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를 보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막연히 '다른 세계랑 연결되어 있나 보다.' 라면서 넘기고 살고 있었는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뭐지?'
아무래도 진짜 다른 세계랑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었다.
시체에서 부활한 흡혈귀라니. 적어도 내가 아는 무협엔 그딴 게 없다.
그런 건 판타지에나 나오는 뱀파이어지.
"아무래도 고문을 해봐야.."
"아, 알아요! 이 망토 원래 주인!"
잠깐 머리가 복잡해진 사이에 큰일 날 뻔했다.
"그자가 망토의 원래 주인인 걸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천지신명님이 알려주셨는데요."
"..하아."
여인이 다시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만하면 천지신명 천지신명. 아주 편리한 변명이군요."
"사실인 걸 어떻게 해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 같기는 하네요. 아픈 게 무섭다는 말도 사실인 것 같고."
"욕망에는 솔직한 사람이라서요."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할 때마다 정말 내 미래는 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실감이 온다.
내가 괜히 이렇게 욕망적으로 사는 게 아니다.
언제 내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극단적인 예시지만 자다가 심장마비가 와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이니까.
매일매일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은 대부분 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어제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마시지 못한 그 술 한잔이 미치도록 아깝게 느껴졌겠지.
"..납치 당한 사람 치고는 되게 얌전하군요. 어느 정도의 반항은 예상 했는데."
"반항하면 풀어주실 거예요?"
"아니요?"
"그러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죠. 해봐야 좋아질게 없는데."
내 정론(?)에 반박할 수 없었는지 여인이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잠시 틈이 난 사이에 나는 다시 아까 가진 의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흡혈귀. 정확히는 뱀파이어에 대해서도 상점창에서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심장을 꿰뚫은 성검이라거나. 그런 물건들도 있었는데 사려면 몇 천 포인트가 필요한 탓에 당연히 엄두도 못 내고 시선 안에 두지도 않았다.
상점창에서 지속적으로 언급이 된 '죽지 않는 자들.' 그리고 그들과의 전쟁.
내 기억상으로는 그 전쟁의 끝은 결국 인간 진영에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물리치고 승리한 것으로 쓰여있었다.
뱀파이어가 대표적인 언데드 중 하나인걸 생각하면 아마 그 전쟁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딱히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눈앞에 있는 여인의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붉은 걸 보면 절로 뱀파이어가 연상되긴 했지만 확신할 수도 없고 내가 뱀파이어들의 과거를 알고 있던 말던 지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속으로 신세를 한탄했다.
만약 무사히 살아서 나간다면 그냥 산으로 돌아가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
'하늘 이 개같은년..'
속으로 하늘을 욕하면서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기도했다.
신 소저도 같이 당한 게 아니라면 아마 열심히 나를 찾고 있을 거다.
..아마도.
-우르릉
* * *
"제길. 겨우 도망쳤군."
성과 이름의 위치를 바꿔서 불렀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작전을 실패한 마르딘이 먼지가 뭍은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털며 그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이 세계의 소드마스터들이 아직 뱀파이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녀가 뱀파이어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었더라도 이렇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쥐로 변하는 능력이나, 안개로 변하는 능력은 중원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상식 외의 기술이었으니까.
"어이, 피를 가져와라!"
비록 이번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권속을 한 명 잃었지만 아직 한 명이 남아있으니 괜찮았다.
어차피 마르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목숨이지 권속따위 어떻게 되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한 여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에게 미리 보관해 놓은 피를 건넸다.
마르딘은 의자에 앉아 피를 마시며 방금 있던 일을 떠올렸다.
"겨우 인간 주제에.. 감히 이몸을 도망치게 만들다니.."
그가 나약하고 인간이 강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질로 잡아온 인간은 어떻게 됐지? 입은 열었나?"
"네. 아쉽게도 일행이 검후인 것은 모르고 다녔던 것 같고 그 외에 궁금하시던 건 알아 냈습니다."
"그래, 고문은 얼마나 했나? 피는 얼마나 뽑았고? 살아는 있겠지?"
당연히 그가 순순히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고문이 오고 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고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술술 열더군요."
"...?"
살면서 인간에게서 정보를 얻는 방법을 세뇌와 고문밖에 학습하지 못한 마르딘은 당황에 빠졌다.
"세뇌를 했나? 아직 네가 그 정도는 아닐텐데?"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픈 것은 싫다면서 그냥 다 말해준다 하더군요."
"..뭐, 나약한 녀석이었나보군. 그래서, 그 망토는 어디서 구했다고 하던가?"
"천지신명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또 뭐냐?"
여인이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그에게 천지신명의 뜻을 전달했다.
"이 세계의 신 같은 존재로군."
죽음을 거스르고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신이란 결국 적대 관계에 불과했다.
"그러면 그 녀석은 사제 같은 녀석이라고 봐도 되겠어."
이 세계의 신의 뜻을 따르고 전파하는 존재이니 사제다.
마르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의 신은 대체 뭐하는 녀석인거지..'
그렇다고 해도 이 세계의 신의 사제가 어째서 이전 세계에서 그들의 동족을 학살한 영웅놈의 망토를 사용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 그의 고민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여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그자는 아직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죽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무려 검후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니까요."
"정작 녀석은 검후의 정체도 몰랐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우연히 만난 일행일 가능성은?"
"그러면 그때 가서 죽여도 늦지 않겠죠. 하지만 지금은 가치가 있는 인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긴.."
무려 플라잉소드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다.
후에 이 세계를 정복하는데 분명 걸림돌이 될 터.
정확한 사이는 아직 모르지만 어쩌면 괜찮은 인질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참에 그놈에게 정보를 좀 얻어봐야겠어."
마르딘은 여인과 함께 사내를 잡아 놓은 곳으로 향했다.
그가 고문 없이 모든 정보를 털어놨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표면적인 것.
세뇌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마르딘이었지만
"..왜 안 걸리지?"
"헤헤.. 스승님.."
"그리고 아까부터 이 녀석은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있는 거고..?"
이상하게 그에게 세뇌가 잘 걸리지 않았다.
은둔자의 망토의 효과가 아닐까 싶어 아예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도 계속 제대로 된 세뇌에 걸리지 않고 튕겨져 나왔다.
망토를 벗길 수는 없었다.
강박적으로 모습을 감추려고 했던 허미트의 마력이 담겨있는 탓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가 마력 회로에 간섭하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강제로 벗겨버리지 않는 한 망토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쉽게도 마르딘에게는 위에 해당하는 두 능력 모두 없었다.
"분명 몸에서 반발하는 기운은 없는데..?"
처음에는 신성력이 반발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세계의 사제는 특이한 것인지 그의 몸 안에서 그의 세뇌와 저항하는 기운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순수하게 본인이 가진 내성으로 뱀파이어의 세뇌에 저항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약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왜 다 튕겨내냔 말이다!! 왜!!"
"지, 진정하시죠 주인님."
"차라리 마력이나 신성력으로 저항한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약물 또한 세뇌와 마찬가지로 전혀 먹히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 * *
깊은 밤. 산 속의 작은 집.
"으응.."
유성이 상의가 거의 다 흐트러진 상태로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님..? 거기서 뭐 하.."
그는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스승이 그의 몸 위에 있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입을 열었지만
-팟
"Zzz.."
이상한 불빛과 함께 그대로 잠들었다.
평화로운 숲 속의 일상이었다.
-철퍽철퍽
집 앞에 있는 냇물에서 빨래를 하며 저 멀리 드러누워 있는 스승님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뭣 좀 물어봐도 됩니까?"
"무어냐."
"스승님은 강호에선 뭐 하시던 분이셨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은거기인이거니 했지만 몇 년 지내다 보니 할 줄 아시는 게 굉장히 많았다.
점도 볼 줄 알고, 약도 지을 줄 알고, 사냥도 할 줄 알고, 각종 요술도 다룰 줄 아는 것 같은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을 때가 있다.
"강호에서 놀던 시절은 꽤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그냥 알려주기 싫다고 말하십쇼."
"알려주기 싫다."
"이럴때는 솔직하셔서 좋네요."
투덜거리며 마저 세탁물을 물에 철벅였다.
"스승님. 생각해보니 스승님의 경지면 가슴 가리개 정도는 안 차도 가슴이 상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안 차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가 가르쳐준 것 아니더냐. 그리고 이제 없으면 불편하다."
"세탁할 때마다 아주 일도 아닙니다."
크기가 뭐 이리 쓸데없이 큰지.
아마 쓴다면 한쪽으로 내 얼굴은 감쌀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브래지어를 물에 담그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불편해 보이길래 알려줬던 게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그보다 외간 여자의 유방에 대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 외간 남자에게 속옷을 포함한 모든 세탁물을 떠넘기시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매일 동침하는 사이에 그걸 꺼리겠느냐."
"남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말은 좀 삼가해 주시죠."
이런 성희롱도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다.
아무리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지내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아주 매일 줄넘기를 하고 계신다.
'남의 혼삿길을 대체 얼마나 망쳐 놓으려고.'
둘밖에 없으니 망정이지 남이 들으면 아주 수군대고 난리도 아니리라. 스승이랑 제자가 붙어 먹었다고.
이 세상에서 사제관계가 부모와 자식과도 같은 관계인 걸 생각하면 아주 난리도 아닐 거다.
"여기 오해할 남이 어딨느냐? 너와 나밖에 없는 것을."
"..정말 평생 산 속에만 가둬 두실 작정이십니까?"
"네가 혼자 강호에 나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올 능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지금 네 상태로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점이라도 보면서 돈 벌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장담컨데 네놈은 혼자서 밖에 나가면 분명 사고를 칠 관상이다."
내 관상이 뭐 어때서.
"그냥 이 스승 말이나 듣거라. 네 스승의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고기가 떨어지니."
"아. 스승님.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요즘 자고 일어나면 몸이 많이 아픕니다."
"...무엇이 말이더냐?"
"분명 편안하게 잤을텐데 무슨 격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쑤십니다. 주로 다리와 골반 부분이 심한데 혹시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