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바꾸어 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후두둑
벽이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파편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지만 보았다.
무언가가 집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거기냐!"
검을 휘둘러 사칭범을 기절시킨 뒤 달아난 무언가를 쫓아 집 밖으로 나왔다.
'천서(天鼠)?'
동굴 같은 곳에 서식해야 할 검은 천서가 나를 피해 달아나기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휘에서도..'
그때도 천서를 봤었다.
대낮에 호숫가를 날아다니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해 검을 날렸었지만 내가 모르는 습성이라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었거늘 지금 상황에서도 나타난 걸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혈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타닷!
경공을 펼쳐 지붕을 밟으며 천서를 쫓기 시작했다.
천서치고는 비정상적으로 빠르지만 그래봤자 미물.
날개가 달렸다고 해서 인간보다 빠른 것은 아니었다.
-파닥파닥!
내가 쫓아오는 것을 아는지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천서와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진 뒤
"흐읍!"
-피잉!
팔을 크게 휘둘러 검에 의지를 실어 내던졌다.
검이 살아있는 듯이 스스로 움직여 허공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며 날아가
-푸슉!
"키익!"
천서의 한쪽 날개를 꿰뚫었다.
비행 능력을 잃은 천서가 그대로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기 시작했고
-덥석!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잡아내었다.
"키익.."
"자.. 이제 이 미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자리에 천서가 있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곳에 존재했겠지.
'대체 뭘 위해서?'
전서구 용도라고 생각하기에는 발에 무언가를 묶은 자국 같은 것 하나 없었다.
눈살을 찌푸려가면서 까지 천서의 용도를 고민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지식 안에서는 도저히 그 용도를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천서가 영물이라서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거나..'
아까 도망치던 동안의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를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뭐.. 마침 안휘면 남궁세가 근처고. 그들에게 협력을 부탁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겠지."
"삐이익.."
발버둥을 멈추고 축 늘어진 천서를 쥔 채로 사칭범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펑!
"...?!"
천서가 검은 안개로 흩어져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정말 흩어졌다.
"이게 무슨.."
'이형환위(移形換位)?'
정말 영물이었던 것인가?
아니, 아무리 영물이라고 해도 이건 그 수준이 아니었다.
무려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손에 잡혀있는 상태에서 사라지는 영물이라니 그건 영물 수준이 아니었다.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여러 동물로 둔갑하는 능력이 있다는 구미호가 변한 것인가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그랬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 무언가가 나타났어야 했다. 하다못해 작은 벌레라도.
지금은 정말 '안개로 흩어져서' 사라진 상태였다.
"허.."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우선 있는 단서부터 활용하기로 하고 벽이 뚫린 집으로 돌아갔다.
"..."
-까득
가기 전에 기졀시켜 놓은 사칭범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었다.
아무리 추격하기 위해 나갔었다고 하지만 잠깐이었다.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이쪽에 접근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었지.. 네놈들은 항상 그랬었지..'
과거에도 혈교는 실패한 부하들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죽이곤 했었다.
기껏 제압하고 생포하여 정보를 캐내려고 해도 분명 입에 독을 머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목숨을 잃거나 심하면 폭발하기까지 하였다.
'어쨌든 안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니 곳곳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혈교를 향한 분노를 태우던 중 한 사실이 떠올랐다.
"...무면금귀는?!"
잊고 있었다.
이 집에 방문했을 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워낙 정신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지만 당연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설마.. 설마.."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혈교놈들이 나와 함께 온 자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고.
"빨리 찾아야 해.."
서둘러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제발 그가 기다리다 지쳐 혼자 객잔으로 돌아갔기를 빌었지만 땅에서 발견한 흔적을 보자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아아.."
땅에 특유의 끌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금방 그 흔적이 사라진 걸로 보아 중간부터 아예 그를 들어서 납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급한 탓인지 흔적을 완벽히 지우진 못한 모양이지만 흔적 또한 찾기 어렵게 되어있었다.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해도 검만 수련한 몸이다.
추적술 같은 걸 익혔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찾아야 한다.'
혈교가 사람을 납치해서 어떻게 하는지 아는 이상 한시도 지체해서는 안됐다.
방금 내가 안휘까지 찾아온 사내가 가짜 단유성인게 밝혀진 이상 진짜 단유성은..
'...혈교놈들..'
-까드득
그에게 상처 하나라도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 *
"으으.."
머리가 아팠다.
신 소저가 사내를 따라 집으로 들어간 뒤에 적당히 벽에 기대서 졸고 있던 사이에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뒤로 기억이 없었다.
"뭐야 갑자기.."
무의식적으로 뒤통수를 쓰다듬으려고 팔을 들었지만 그게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컥
"..뭐야 이거."
몸이 사슬로 기둥에 묶여있었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고 기절했다가 쓰러져 일어났더니 몸이 묶여있는 상황?
자연스럽게 납치라는 두 글자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십..'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드디어 어제 하루는 좀 마음껏 놀았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하루만에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대체 얼마나 저주 받은 운명이란 말인가.
"아, 일어나셨군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던 도중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전체적으로 병약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있었다.
피부가 창백한게 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 몰골이었다.
"조용히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면 피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직접 당하는 게 처음이지 영화나 소설에서는 은근 자주 보던 장면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에서는 '그런 것에 대답할 것 같으냐!'라면서 거부하면 '굳이 피를 봐야겠다면 어쩔 수 없군.' 의 대사로 이어지면서 고된 고문을 버티는 장면으로 이어지겠지만..
"네. 다 대답할게요. 뭐든 물어보세요."
내가 왜 반항을 한단 말인가.
"..."
내 협조적인 태도에 당황한 건지 여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반항 안 하십니까?"
"아픈 건 싫어서요."
"...흠.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죠."
여인이 내 앞에 서더니 질문을 시작했다.
"검후랑 무슨 관계십니까?"
첫 번째 질문부터 막혔다.
"검후가 누구에요?"
"...당신과 함께 다니던 여인 말입니다. 아니 근데 검후를 모릅니까?"
"제가 산 속에서 지냈었어서.."
"이거 아무래도 고문을 해봐야.."
"아니 진짜 산 속에서 지냈다니까요?! 고문 안 해도 다 대답해준 다는데!"
괜히 반항하거나 거짓 정보를 내뱉으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내가 버티겠냐고.
진짜 아픈 건 싫단 말이야.
"...그래요. 이건 그렇다 치고. 주인님의 의문부터 해결해야겠네요. 당신 그 피풍의를 어디서 났습니까?"
아마 은둔자의 망토를 말하는 것 같다.
"천지신명께서 주셨습니다."
"...예?"
"제가 하늘의 기록을 조금 다룰 수 있는 점쟁이인데 아마 그와 연관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 천지신명께서 제 손을 향해 내려주셨습니다."
내가 대답할 때마다 여인의 표정이 점점 더 의문으로 물들었다.
천지신명이 줬다기보다는 내가 모아서 산 거지만 그게 그거였다.
"당신 도사입니까?"
"도사는 아니고 점쟁이입니다."
"그럼 사파인입니까?"
"좋게 말하면 순천(順天), 나쁘게 말하면 역천(逆天)인 요술을 다루는 요술쟁이지요."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여인이 차가운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나는 정말 사실을 말했다.
"그러면 이것부터 물어봐야겠군요. 당신 은둔자나 허미트? 에 대해서 아는 것 있습니까? 주인님이 당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시던데."
'...어?'
은둔자? 허미트?
내가 이 망토를 살 때 상점창에서 봤던 이름이다.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이라고.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아니 애초에 허미트는 영어 아니야?'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상점창에 대해서 크게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있는 세상은 무림인데 왜 누가 봐도 판타지스러운 설명을 가진 물건들이 넘치는 것인지 의문이긴 했지만 갑자기 이런 세상으로 온 것도 이상한 일인데 이런 상점창이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판타지 쪽이 쓸모 있는 물건이 훨씬 많다.
무림의 물건들만 팔았다면 기껏해야 금창약, 무공비급, 명검 같은 것들만 팔았을텐데 이런 걸 팔아봤자 내가 어디에 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