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250)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아름답고 상냥하기로 유명했던 검화가 겨우 지학도 되지 않은 소년을 겁탈하려고 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

'..소연아.. 너는 대체..'

...그걸 실제로 저질렀다는 게 문제지만.

"어디 세력이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나?"

나는 그가 다른 세력의 세작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하필 이름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기에 이렇게 간파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 만으로도 꽤 화산 깊숙이 잠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소연이가 단유성이라는 소년의 단전을 망가트렸다는 정보는 그래도 아는 자들은 알고 있지만

겁탈하려고 했다는 것은 정말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도사로서, 인간으로서 차마 직접 손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짓이었으니.

"..."

"그대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다면 내가 맞춰보지."

그에게 검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혈교인가?"

사내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뱀파이어.

'밤의 귀족'이라는 이명답게 대부분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며 권속을 포함하여 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면 남을 잘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다.

죽지 않는 자들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영웅들은 모두 뱀파이어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영리하고 자신들끼리 뭉칠 수 있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산 자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 * *

"카렐!! 카렐!! 대답해라!!"

안휘 지역의 지하에 자리 잡은 뱀파이어 '마르딘'이 검은 수정구에 대고 소리쳤다.

중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의 통신 기술이었다.

"어서 대답해라!! 한시가 급한 상황이란 말이다!!"

수정구에 빛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르딘은 재차 소리쳤다.

그의 소음공해가 먹힌 것일까, 잠시 후 수정구에 빛이 들어오며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수정구로부터 들려왔다.

"..시끄럽다. 나는 너와 다르게 항상 수정구만 붙들고 있어도 될 정도로 한가롭지 않단 말이다 마르딘."

"뭐, 뭣?! 내가 한가하다고?!"

"그럼 바쁜가? 우리들이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캐오고 기사들의 시체를 확보하는 동안 지하에서 졸병이나 만들고 있는 네놈이 그렇게 바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다만."

"이익!! 내가 이 역할을 맡은 건 로드, 바르슈타인님의 명령에 의한 거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 가 아니다!"

"그래. 그렇다고 치지."

수정구 너머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연락했지? 빨리 전하고 통신을 끊어라. 아무리 미개인들이라고 해도 눈과 귀가 없는 건 아니니."

"마, 맞아.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빛나는 산'은 네가 맡은 구역 아니냐!!"

바르슈타인이 혈교의 의식으로 중원으로 넘어온 뒤, 바르슈타인은 그가 넘어온 방법을 분석해 과거 그와 함께했던 뱀파이어들도 주기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각자 능력에 맞게 할 일을 배정하고 명령을 내렸는데

마르딘 같이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은 난이도가 덜하고 중요도도 비교적 낮은. 후에 소모될 병력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고

변장, 변신, 현혹 등의 능력으로 인간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는 자들은 중원 곳곳에 있는 고수들의 시체를 확보하여 더 높은 연구시설로 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카렐이 맡은 곳은 다름 아닌 화산(華山).

물론 화산에 잠입한 뱀파이어가 그 혼자만은 아니지만 구파일방 세력에 잠입했다는 것에서 그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왜 그러지? 또 전처럼 시체라도 구걸하려고 그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네 구역에 있던 소드마스터가 이쪽으로 왔단 말이다!"

"...잠깐만 있어봐라."

차갑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던 카렐의 반응이 조금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그랬군. 원래도 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여인이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거늘 나간 흔적이 있어."

"그걸 미리미리 알아채서 알려줘야 하는 게 네 역할 아니냐!!"

"제길.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곳을 전부 장악하는 건 무리란 말이다. 네놈이 아느냐? 소드마스터들과 같은 길드에서 활동하는 기분을? 걸리면 바로 끝장이란 말이다!"

"나는 지금 연구실 위에 소드마스터가 있단 말이다!"

뱀파이어들에게 이런 싸움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로드의 명령 아래에 묶여 있다고 한들 각 개체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만큼 로드를 제외하면 누구도 자신의 위에 둘 수 없다 생각하여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는 게 그들이었으니까.

"..후우. 일단 진정하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어째서 그쪽을 향해서 갔는지 파악하는 것이니."

"서, 설마 나를 잡으러?"

"겨우 네놈을 잡으러 그 먼 곳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워프 게이트도 없는 세상이라."

수정구 너머로 종이 소리가 들려왔다.

"빠, 빨리 좀 찾아봐라!"

"재촉하지 말고 있어라. 어차피 금방 찾을 수는 없으니."

마르딘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이 카렐은 종이를 뒤지는 것 뿐만 아니라 세뇌를 걸어 놓은 인간들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고 있었다.

그들도 무공을 익힌 몸인 만큼 쉽게 세뇌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카렐도 치밀하게 그들에게 접근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카렐이 수정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쪽에 사람을 찾으러 간 모양이다."

"사람..?"

"그 여자에게 제자가 있었는데 10년 전 그 제자가 사고를 쳐서 한 신입 제자의 단전을 부쉈다고 하는군. 이후에 그 제자를 계속 찾아다닌 모양이야. 빚을 갚으려는 모양이던데."

"단전.. 이 세계의 마나하트.."

아무리 다른 세계 출신인 뱀파이어들이라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제자가 이 지역에 있는 건가?"

"적어도 지금 발견한 후보는 그렇지.  결국 그곳을 찾아가는 검후도 이 제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 가능성을 발견했으니 가는 것일 뿐."

"아무리 마법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고작 한 사람 찾는데 10년이 넘게 걸리다니. 미개한 놈들인 건 알아줘야 하는군."

정작 본인도 마법 발전에 이바지한 적은 전혀 없는 뱀파이어가 불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상관 없다. 세뇌를 통해서 진짜로 만들면 그만이니."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자,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부 내놔라. 이 몸이 보여주지. 한때 소드마스터까지 우롱했던 이 몸의 실력을."

"...하아."

카렐이 한숨을 쉬었다.

마르딘. 확실히 뱀파이어로서는 하급이다.

권속을 만드는 능력도, 유지하는 능력도, 인간들 사이에 숨어드는 능력도 전부 변변치 않은 녀석이지만 전쟁 당시에 활약을 하긴 했었다.

무려 혼자서 소드마스터의 목을 가져온 전적이 있는 녀석이었으니.

정확히는 힘이 부족하여 마무리는 직접 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무력화 시키긴 했었으니 99%는 그의 공이 맞았다.

"그냥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건 어떠냐. 네가 특별히 나서지 않고 죽은 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하에서 버틴다면 알아서 돌아갈 것 같다만."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다. 후후,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정신은 연약한 인간. 트라우마와 죄악감을 건드리면서 세뇌와 약물까지 섞으면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야."

"..어쩌다 한번 성공한 것 가지고 좋아하기는."

"시끄럽다. 어서 정보나 내놔. 원래 이런 것에는 정보가 생명이니."

카렐은 한숨을 쉬면서 정보를 전달했다.

그가 실패해서 파멸한다고 한들 어차피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결국 뱀파이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군의 명령과 자신의 욕망이었으니까.

"좋아.. 성이 단이고 이름이 유성이라는 거지."

"이걸로 알아낸 것은 전부 전달했다. 행운을 빌지."

"후후, 조만간 소드마스터로 만든 권속을 보여주지. 그때 가면 깜짝 놀랄 거야."

-삑

저 말을 마지막으로 수정구가 빛을 잃었다.

카렐은 차가운 눈으로 빛을 잃은 수정구를 바라봤다.

'이 수정구는 곧 파기해야겠군.'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성공한다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영웅 한 명을 줄일 수 있으니 좋은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피로 돌아가는 것은 마르딘이지 자신이 아니다.

뭐, 운만 좋다면 그의 연구실에 있을 워프 게이트를 가동해 도망칠 수는 있겠지만 소드마스터의 검을 피해 마법진을 가동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으으.."

"됐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

눈에 빛을 잃고 있는 사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는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밤 새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사내를 돌려보내던 중 그의 입이 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소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흠?"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거의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흘려보냈을 수준의 정보.

"10년 전.. 기록을 담당하던 이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검화가 단유성을 겁탈하려 했었다는.."

아니나 다를까

"...하. 말도 안되는 소리군."

들을 가치도 없는 정보였다.

아무리 인간의 본성은 감춰져 있는 법이라지만 저건 범위를 너무 벗어나지 않았나.

"성인 여성이 10대 초반의 남자애를 겁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절레절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큐버스들도 최소한 2차 성징기는 와야 잡아먹는다.

대체 그 어린 외모의 어떤 부분에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카렐의 상식에선 이해할 수 없었다.

"빛나던 이의 추락을 비웃는 자들이 지어낸 유언비어로군."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세뇌에 걸린 사내를 돌려보냈다.

마침 안 그래도 오늘 시체를 몇 구 확보해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까지 산에 없다면 시도해보기 딱 좋은 시기였다.

-스륵

뱀파이어의 능력을 이용해 모습을 감추고 기척까지 최대한 죽여가며 미리 봐둔 시체가 보관된 장소로 향했다.

'아직 이 세계는 시체를 보관하는 문화가 있어서 다행이군.'

이전 세계에서 전쟁이 진행된 이후에는 인간 진영에서 모든 시체를 불로 태워 가루만 남겼다.

그걸로는 좀비나 스켈레톤으로도 쓰지 못하니까.

물론 아무리 그라고 해도 지금 당장 정말 귀한. '높은 사람들'의 시체를 노릴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다.

지금은 관심이 덜한 죄인들의 시체를 조금씩 빼돌리는 게 한계다.

'소드마스터의 시체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느껴지는 기운을 탐색하던 도중 괜찮은 물건을 발견했다.

비록 기대하던 소드마스터는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원한이 상당했다.

'경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인가.'

소드마스터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쓸만한 정도다.

그리고 저 엄청난 원한.

제대로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꽤 재밌는 물건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이.. 난장판으로 되어 있군."

그래도 죽은 자인데 이름판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 되어있다니.

상당히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았다.

그동안 배운 언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 어떻게든 읽어보면..

"한.. 제길. 도저히 못 읽겠군."

성밖에 모르겠다.

이름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마르딘 그 녀석. 이 세계의 이름은 성이 앞에 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아무리 지하에서 연구만 하던 놈이라지만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감히.."

-꾸드득

이 정도로 분노해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눈이 가라앉았다.

"감히 그 아이를 이용해 나를 우롱해..?"

도를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다른 어느 집단이 하더라도 감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을 감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혈교에서 저지르다니.

내 인생 최악의 죄악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쿠구구궁

"편히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히, 히익..!"

스승님. 당신께서는 아무리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친절을 베풀라고 말하셨지만

저는 혈교놈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위로 들어 올린 순간

-움찔

"..."

아무것도 없는 벽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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