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금이 가기 직전이었던 내가 마음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말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니네.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주게."
이때 더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살면서 후회는 충분히 했다.
더 늘어난다고 해서 괴로울 것도 없었다.
* * *
"그러면 오늘 그 사람을 찾으러 가보는 겁니까?"
"..그럴 예정이네. 아마 지금쯤이면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을 테니."
"부디 그분이 찾으시는 분이 맞으시길 빌겠습니다. 제 점이 빗나가지 않았기를 빌죠. 무려 10년간 기다리셨다고 하니 천지신명님도 배려해 주실 겁니다."
그는 혼자 객잔에 남아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혹시 같이 가지 않겠나?"
"네?"
"내가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문 밖에라도 있어주게. 부탁하네."
"뭐.. 알겠습니다."
그는 내가 혼자 그 사내를 만나러 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지만
이는 나 스스로 치는 배수진이기도 하다.
이제 그 사내가 단유성이 아니더라도 도망갈 곳은 없다.
'후우.. 후우..'
아직도 떨리고 있는 심장을 애써 진정 시키며 그 사내의 집으로 향했다.
엄청 크지는 않았지만 작지는 않은. 평범한 가정집 정도의 크기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자 잠시 후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 집에는 저 혼자 살고 있습니다만.. 실례가 안된다면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닮았다.
본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아마 그 소년이 건장하게 자라 청년이 된다면 이렇게 자라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였다.
"..."
한참 동안 입술을 들썩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한소연이라는 이름을 아는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이름.
내가 이 이름을 꺼낸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사내의 표정에 급격하게 경계심과 혐오감이 차오르는 것을.
"..누구신데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혹시 그대.."
"일단 들어오시죠. 밖에서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
어쩌면 이 사내가 단유성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앉으시죠. 아무래도 짧은 용건으로 오신 분은 아닌 것 같으니."
"..실례하지."
일행을 잠시 밖에 두고 혼자 단유성이라 추정되는 사내의 집으로 들어왔다.
아직 그가 단유성일거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소매의 매화를 보니 화산에서 오신 분 같은데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한들 화산에 한소연이라는 여인이 둘이나 있지는 않겠죠?"
-움찔
"..."
그가 그 이름을 아는 시점부터 그가 단유성이 아닐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그의 말대로 아무리 넓은 중원이라고 해도 한소연이라는 여인이 화산에 둘이나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대가 혹시.."
"말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과 짙은 혐오감이 느껴졌다.
"그 여자랑 무슨 관계십니까?"
'..읏.'
각오하고 있었더라도 뼈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아이의 스승이네."
글자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하. 스승 되시는 분이셨습니까?"
"..."
"제자 교육을 아주 잘 시키셨더군요. 어딜 내놔도 자랑스러울 것 같습니다."
"미안..하네.."
그의 차가운 말투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참 빨리도 찾아오셨네요. 대충 세어도 그날부터 1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다시 나게 하시고."
"..빚을.. 갚으러 왔네.."
"빚이요? 하. 빚이라. 그래요. 당연한 거죠.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빚을 갚긴 하셔야죠. 한때 무인의 꿈을 꿨었던 인생을 끝내버리셨는데 당연히 갚으셔야죠."
마음속에 죄책감이 차올라 계속 목이 메여왔다.
"소연이가 저지른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네.. 다름 아닌 내 제자의 일이니까.. 스승인 내가 책임을 져야지. 정말.. 정말 미안하네.."
"그건 그렇다 쳐도 왜 그렇게 늦으셨습니까? 무려 10년입니다 10년. 제가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고 1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변명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대를 찾아다녔네. 내가 직접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었고.."
"결론적으론 10년 동안 방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미안하네."
나는 아까부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저히 그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도 나름 잘 살고 있습니다. 비록 무인의 꿈은 접어야 했지만 그대로 죽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악착같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걸 구하고.. 그동안 배운 기술을 조금이라도 살려서 자잘한 일이라도 시작하니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열리더군요. 그렇게 지금은 나름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만.. 덕분에 간신히 잊고 살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네요."
"..."
단전이 파괴되면 대부분은 폐인이 된다.
그가 그 고통을 이겨내고 지금 이렇게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빚을 갚으실 겁니까?"
"우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대의 단전을 고쳐주겠네. 예전에 신의에게 빚을 지워뒀으니 그에게 부탁하면 분명 고칠 수 있을 거네."
"이제 와서 단전을 고친다고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늦어도 한참은 늦었을텐데."
"..내가 가르쳐 주겠네."
이미 생각했던 일이다.
그의 단전을 고치고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준다.
그가 화산에 들어왔던 이유도 화산의 매화향을 맡아보고 싶었다는 노인의 유언을 지켜드리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소연이가 그에게 접근했던 수작 또한 그것이었으니까.
"하. 당신의 제자 때문에 망가진 사람을 제자로 들인단 말입니까?"
"..제자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네. 그러지 않아도 알려줄 테니까."
"..."
"나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아도 되네. 당연히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네. 무공을 원한다면 무공. 돈을 원한다면 돈. 10년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 무공에 관심이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지원해줄 테니 말만 하게."
만약 화산의 장로들이 이곳에 있었다면 내게 제정신이냐고 물었을 정도의 말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속죄가 우선이었다.
내겐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힘이 있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무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군요. 이제 와서 다시 익히기에는 너무 늦었고요."
"..그러면 다른 원하는 거라도 있나?"
"요즘 하는 일에 그쪽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시기도 했고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때 그 어리고 약했던 아이가 어느새 저렇게 자랐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땐 입산 시험도 어떻게 통과했을지 의문이었을 정도였는데 이제 웬만한 사내들 수준은 된다.
여리고 병약해 보였던 얼굴 또한 건강해 보이는 얼굴로 바뀌었고.
"식사는 하셨습니까? 곧 중식을 먹을 시간이긴 합니다만."
"..사양하겠네. 여기서 더 빚을 질 수는 없으니."
"그러면 빚의 일부로 요청드리죠. 식사나 한 끼 하고 가시죠. 앞으로도 빚을 갚으시려면 자주 볼 것 같은데."
저렇게 말한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네."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한 모양인지 능숙한 솜씨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군.'
사실상 그가 단유성인게 확실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찾아다니면서 계속되는 실패에 그가 이름을 바꾸고 그를 숨기고 살고 있다는 생각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름은 그대로 쓰고 있나?"
"예. 그 이름 그대로 쓰고 있죠. 의심되십니까?"
"..그동안 그대가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네."
"또 그 변명입니까. 잘 들으시죠. 제 이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적 없이.."
"단유성.."
"유성단......"
...............................
-쿵!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하, 하하! 이거 잠깐 실수했네요. 단유성입니다. 예. 잠깐 실수했네요."
그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분명 똑똑히 들었다.
'단유성'이 아니라 '유성단' 이라고.
"..."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그러고 보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단전이 망가진 것은 맞다.
하지만 소연이가 그에게 저지른 죄가 그것 뿐이지는 않지 않은가.
오히려 어떻게 보면 단전이 망가진 것보다 더 큰 죄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대.. 정말 내가 아는 단유성이 맞나?"
의심의 싹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지만 타고난 근골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랬던 아이가 무공도 익히지 못하고 저렇게 건장한 청년이 될 수 있는가.
"그, 그러면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겠습니까 검후님?"
"검후라.. 나는 그대에게 내가 한소연의 스승이라고만 했지 별호까지 밝힌 기억은 없는 것 같네만.."
"...큿!"
얼굴이 비슷하다는 것도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10년 전.
지학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였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굴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원이 보통 넓은 땅인가.
얼굴이 닮은 사람은 찾으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보게. 내가 질문 하나 하지."
"다, 당신이 저에게 질문을 할.."
-서걱
그의 옆에 있는 벽에 상흔이 생겨났다.
"내가 10년 동안 사칭범을 한 명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사, 사칭범이라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래. 아는 게 많길래 나도 의심하지 않았네. 내가 봤던 사칭범이라고 해봤자 결국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다가 걸린 자들이었으니."
한소연이라는 이름.
그녀가 한 아이의 단전을 망가트렸다는 것.
이것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 아이라고 생각했다.
"질문이네. 내 제자. 한소연이. 단유성에게 저지른 일을 말하게. 전부."
그의 표정에서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이 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다, 단전을 부쉈죠."
"그게 다인가?"
"포, 폭행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 그게 다인가?"
그의 얼굴에서 의문이 느껴졌다.
이 이상은 모른다는 거겠지.
"..하."
모를 거다.
모른다면 전혀 추측할 수도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