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지도와 실제 위치가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아마 훌륭한 계획이리라.
"일단은 이렇게 세웠습니다. 궁금하셨습니까?"
"..예전에 안휘에 여행 갔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네."
"오. 혼자 가셨었습니까?"
"그때는 제...... 아니. 동생과 함께 갔었네."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 치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동생 분이 말썽이라도 피우셨었나 봅니다. 소저를 닮았으면 아주 예쁘고 얌전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닮았었지. 아주 닮았었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실수했구나.
'큰일 났다.'
아무래도 동생이라는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하지?'
생각해라.
기껏 친해졌는데 여기서 쌓은 호감도를 깎아 먹을 수는 없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말을 탐색했다.
"뭐, 옛날 기억은 잠시 접어두시죠. 지금은 저랑 있지 않습니까."
"...응?"
"저한테만 집중하시죠. 괜히 옛날 생각이나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돼, 됐나?'
간신히 말을 쥐어 짜냈다.
과연 이 말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지 확신은 없었지만
"...훗. 알았네."
그녀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고 나쁘지 않은 대처였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도사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나도 덕분에 편하게 왔네."
"저도요."
긴 마차행이 끝나고 그와 함께 상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긴 뒤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여기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거네."
"아하."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쓰여버린 것인지 그의 사소한 부족한 점이 보일 때마다 귀엽게 느껴졌다.
"마침 어제 그대가 말해주었던 계획과 어느 정도 경로가 겹치는군. 나도 찾는 사람이 그 근처에 있으니 그대가 원하는 대로 가보지."
"급한 것 아니셨습니까?"
"10년을 기다린 일인데 고작 하루 더 참는 것이 그렇게 어렵겠나."
그는 안휘에 있다는 그자가 내가 찾던 자가 맞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기대하던 만남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했으니.
하지만 내 입장은 아니었다.
-두근두근두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솔직한 심정으로는 안휘에 있다는 사내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가 단유성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안휘에 있다는 사내가 단유성과 얼마나 겹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보다 많이 겹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여인에게 배신당한 과거가 있으며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고 지금은 단전이 망가져 있다.
거기에 10년 동안 산에서 수련 했다는 행적을 생각하면 그동안 찾지 못했던 것까지 이해가 된다.
아무리 화산의 눈이 밝다고 한들 넓은 중원 땅의 인적 없는 산 속까지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차라리 아니면 좋을텐데.'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가 단유성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차라리 안휘에 있다는 그 사내가 단유성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평생 속죄해야 할 대상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닐 테니까.
"..앞장서게. 약속대로 그대가 가자고 하는 대로 갈 테니."
오면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만일 그가 단유성이 맞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그가 읽은 천기를 통해 둘 중 한명은 단유성일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었으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평생 속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보다 구체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그리고 현재 가장 걱정되는 것은 그가 내가 소연이의 스승인 것을 안 뒤의 반응이다.
그가 나에게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고 나를 밀쳐내는 장면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자신을 속이고 같이 다닌 것이냐고 말할 것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가증스럽게도
그에게 속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미움 받고 싶어하지 않는 여인이 이곳에 있었다.
-덥석
"소저. 뭐하십니까? 저기 볼만한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 길거리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
"소저?"
"미안하네.. 정말.."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가 올라오면서도
지금 그와 맞잡은 손이
지금 그가 내게 보내주는 순수한 감정이
너무 가지고 싶어서.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어서.
'조금만 더 허락해주게..'
나 자신을 속였다.
안쪽에서 올라오는 자기혐오를 억지로 짓눌렀다.
"그, 그런 표정으로 사과할 것까지는 없는데 말입니다."
"아, 아니네.. 금방 가지."
부디
남은 오늘 하루 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 * *
좋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와의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흘러갔다.
하남에서도 그와 함께 영물 구경을 해본 적은 있지만 그땐 금방 소란이 일어난 탓에 제대로 즐기기도 힘들었고 당시에는 그를 향한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뒤에는 그가 앓아 누운 탓에 밖에 돌아다니지 못했었으니
"소저! 저 폭포좀 보십쇼! 끝이 안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전이 맛있네요. 역시 유명한 곳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내가 그와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마지막 하루였으니
"그대가 좋아하는 술일세. 이 지역에서만 제조 되는 것이니 아마 꽤 새로울 것이네."
"오오오..!"
그에게 최대한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조금 힘들었지만 산을 오른 보람은 있군요. 때를 놓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중간에는 거의 내가 끌고 온 것 같다만."
"아마 소저가 없었다면 이 일정은 과감하게 버렸을 겁니다."
산에서 본 석양도 정말 아름다웠다.
[어떠냐. 힘들어도 보람이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최고입니다 스승님!]
"..."
똑같은 장소에서 10년 전에 봤던 장면을 다시 보게 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내가 남긴 죄악이니까.
이것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나의 당연한 의무이다.
"슬슬 객잔으로 돌아가야겠군요. 다른 사람들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겠군."
즐거운 시간이었다.
객잔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작은 판과 붓을 들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아마 그림을 그려주는 것으로 생업을 유지하는 자일 것이다.
"저.."
그쪽을 보고 입을 열려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과연 지금 그와 나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그는 내가 그의 원수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 것일텐데.
"...이만 가지."
"그림이라도 원하십니까?"
마음을 접고 돌아가려 했지만 그가 금방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뭐, 여기까지 왔으니 그림 하나 남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충분히 말릴 수 있었음에도 내 몸은 힘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노인장의 실력이 좋은 것인지 금방 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
피풍의로 몸을 가리고 있는 내 모습과 똑같이 피풍의를 입었지만 얼굴까지 완전히 가린 그의 모습이 담긴 그림.
묘하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소저가 가지시겠습니까?"
"괜찮겠나?"
"저야 지금은 떠돌이 신세다 보니 마땅히 걸어 놓을 곳도 없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 정체를 밝힌 뒤에 이 그림이 그의 손에 있다면 아마 찢어지거나 불에 탔을 테니까.
[...전부 치워라. 전부..]
"..고맙네. 잘 간직하지."
나 자신이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오늘 만큼은 조금 이기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동안 금욕적으로 살아온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
.
.
"..소저? 이제 제가 간호가 필요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
그가 잠들기 전에.
지금 이기적이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대는 혹시.."
말하면서도 입이 막혀왔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 지금이라도 해도 입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혹시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국 말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밖에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내가 자괴감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꿀꺽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입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럴 때는 경지가 높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만큼 기다림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으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