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50)

무려 10년 동안 찾아다니던 사람이다. 솔직히 나였으면 이미 포기했을 것 같다.

사실상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준 아닌가.

심지어 중원 땅이 보통 넓은 것도 아닌데다 세상 자체도 꽤 험난하니까 아무래도 더 그런 경향도 있을 것 같다.

"축하드립니다. 10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겠네요."

"하하.. 그렇군.."

여전히 어딘가 경직된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나는 순수하게 그녀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녀가 기대하는 만남이 잘 풀리길 바라면서.

.

.

.

당연하지만 밤에는 다시 술판이 벌어졌다.

"근데 자네는 아픈 것 아니었나? 근데 술을 마셔도 되겠어?"

"저한테는 술이 약입니다."

"젊은 사람이 홀몸도 아닌 것 같은데 적당히 마셔야지. 그러다 사람 가는 것 한순간이야?"

"한순간이요.."

..그렇지.

사람 가는 건 한순간이지.

"그러니까 더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휴 내가 말을 말지."

다시 술잔을 들어 한번에 목으로 떠넘겼다.

알싸한 알코올 맛이 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만약 여기서 제가 먼 미래를 생각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가 갑자기 내일 사고를 입어 죽게 된다면 저는 죽은 뒤에도 마시지 못한 술 한잔이 떠오르겠지요."

"허허. 거 참 극단적인 예시구만. 그리고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니. 자네가 할 말인가?"

"뭐, 미래가 궁금하시면 은전 하나씩 들고 찾아 오시죠. 정가제라서요."

대화를 마치고 다시 술을 따랐다.

-후룩

미래를 본다는 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미래도 있는 법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옆에 자리 있나?"

"신 소저?"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신 소저가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잠시 실례하지."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게 아무래도 그동안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까 점을 봐준 이후로 말 없이 혼자 고민 상태에 계속 빠져있었으니까.

"어떻게 진정 좀 되셨습니까?"

"..된 것 같긴 하군."

"저는 술을 마시면 좀 진정이 되던데 말입니다. 한 잔 드릴까요?"

그녀의 기분을 조금 띄워보기 위한 말장난이었다.

그녀가 술에 손을 대지 않는 도사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한 잔 부탁해도 되겠나?"

"...네?"

"..생각이 좀 복잡해서 그러네. 부탁 좀 하지."

"어어.. 알겠습니다.."

예상 외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잔의 반의 반만 채워서 그녀에게 건넸다.

"..도사가 술을 마셔도 됩니까?"

"원래 금지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알음알음 먹는 제자들도 제법 많네. 아무리 도사라고 한들 결국 사람이니."

"하하, 그러다 우화등선 못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글쎄. 속세에 미련이 너무 많아서..."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좀 더 강인하고 견고해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뭔가 이렇게 보니 위태로워 보였다.

"뭐, 제가 무인은 아니라 뭐라 말씀드리진 못하겠지만 속세에도 좋은 것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푸흣. 그게 산 속에서 지내다 나온 자가 할 말인가?"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모닥불의 불빛을 반사하는 그녀의 붉게 물든 얼굴을 보면서

새삼스럽지만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스승님이 위였지만.

뱀파이어.

죽지 않는 자들. 소위 '언데드'에 해당하는 마물의 한 종류로 그 형태가 확연히 눈에 띄는 다른 언데드와 다르게 인간과 거의 비슷한 형체인 것도 모자라 그 외모가 대부분 상당한 미남미녀로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다른 언데드들에 비해 그 수를 늘리는데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기에  그 수가 많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또, 햇빛에 조금만 노출돼도 그 신체 부위가 재생이 불가능한 형태로 녹아버린다는 치명적인 약점 또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죽지 않는 자들의 군단 제 3 군단으로서 그 어마어마한 물량의 1군단, 2군단과는 다르게 소수 정예로 인간들에게 혼란을 주는 형태로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피를 매개체로 이용한 강력한 마법과 환술을 사용한 세뇌, 최면 등이 주요 능력이며

또 다른 치명적인 약점으로 그 자존심이 자만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다는 종족 특성이 있어 그 부분을 이용해 어이없는 실수를 유도할 수도 있다.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게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기에 본 기록에 정식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후대 영웅들을 위한 기록

* * *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죽겠군."

안휘성 근처의 수상한 지하시설로 한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 하남에서 일으켰던 소란이 갑자기 등장한 한 여성에 의해 너무나 쉽게 진압당해 버렸고 기껏 만든 새로운 권속에 들어간 재료는 전혀 회수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쉽게 당할 줄 알았으면 그냥 급이 떨어지더라도 두 마리를 만드는 거였는데..!"

하나는 배에 풀어놓고 하나는 시장가에 풀어놨으면 오히려 그쪽이 훨씬 더 이득이었을 수도 있다.

이미 지난 일은 후회하지 않는 게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지만

"빌어먹을! 이래서는 다른 놈들에게 밀린단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맡은 임무는 이 세계의 무인들의 시체를 이용해 기존보다 강력한 권속들을 만드는 것.

그러나 부활하기 전 그의 직책이 높지 않은 탓에 그가 맡은 임무는 고작 졸병 양산에 불과했다.

좀 더 수준 높은 권속들을 만드는 것은 더 높은 이들이 맡고 있으니 그가 맡은 시체는 대부분이 소드 비기너에 정말 가끔씩은 소드 익스퍼트. 중원으로 따지면 삼류에서 일류 무인 수준이었다.

이 외에도 거대한 문파에 잠입해 정세를 파악하고 혼란을 퍼뜨리고 수준 높은 무인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도 있었지만 더러운 인간들 틈에 잠입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이쪽을 선택했다.

신경질적으로 벽을 걷어차며 더욱 깊숙이 내려가자 또 다른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결과는 어땠습니까?"

"제대로 하기도 전에 제압 됐어! 재수 없게 소드 마스터한테 걸려 가지고."

"소드 마스터라면.. 초절정이겠군요. 아니 화경인가. 어쨌든 아쉽게 됐습니다. 그 정도 고수가 흔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애초에 이 세상은 이상하단 말이다. 기사들이 갑옷 하나 안 입고 종자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대체 왕국이나 제국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황실을 말하시는 거라면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니까요.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얼토당토 않은 원칙은.. 하아. 됐다. 야만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

눈앞에서 중원 전체를 모욕 당했지만 이미 뱀파이어의 권속이 된 사내는 그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의 주인이 바라는 대로 지식을 전해줄 뿐.

"그러면 상대가 누구인지 추론이나 해볼까요. 그 정도 고수면 분명 별호 하나둘 정도는 있을게 분명하니 말입니다. 혹시 눈에 띄는 무공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검술.. 이었지만 잘 모르겠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베어져 있었다."

"뭐, 주인님은 무공을 보는 눈이 없을 테니 어쩔 수 없죠. 그러면 다른 기억나는 특징은 있었습니까?"

"..아름다운 여성이더군."

"중원에 여고수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복장이라던가."

"아. 옷에 하얀 꽃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 꽃에 검이라.. 아무래도 화산파일 가능성이 크군요. 환검과 쾌검을 주로 다루는 곳이기도 하니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내가 책을 펼치며 몇몇 부분에 붓을 그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다."

"네. 무엇입니까?"

"이 세계의 소드 마스터들은 플라잉 소드를 쓰나?"

"..그게 뭐죠?"

"후우.. 검에 기운을 불어넣어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기술 말이다."

"아. 이기어검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의 주인이 말하는 바를 알아내는데 성공한 사내의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이기어검을 쓰는 걸 보셨단 말입니까?"

"그래. 방금 말한 그 소드 마스터가 말이다."

"..."

화산파. 이기어검.

사내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혹시 착각하신 것은 아닙니까? 단순히 검을 던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잘못 봤겠느냐! 그건 투척의 수준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의지를 싣고 날아왔단 말이다!"

"...잘 들으십시오 주인님. 만약 주인님이 본 게 사실이라면, 그 여인이 제가 생각하는 여인이 맞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왜, 왜 그러느냐?"

"화산에는 괴물이 한 명 있습니다."

이기어검.

검에 의지를 실어 손에 닿지 않고도 검을 움직일 수 있는 기술로 웬만한 고수로는 어림도 없고 중원 전체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가 되어야 쓸 수 있다는 기술이다.

실제로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는 경지의 강자가 이기어검을 펼칠 이유도 많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목격된 경험은 더더욱 없는 사실상 전설 속의 기술이지만

혈교와의 전쟁에 직접 참여했거나 먼 발치에서 보기라도 했던 자들의 목격담이 있었다.

검의 여왕(劍后)이 그곳에 있었다고.

* * *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군."

혹시라도 싫다는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신 소저의 표정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다른 제자들이 왜 숨겨가면서 까지 마시는지 알겠어."

"..그 정도입니까?"

"맛 자체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지만.."

신 소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인들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상인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저가 저쪽을 보자마자 정말 다급하게 돌리는 게 이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피식

"..분위기가 맛있군."

처음이라면서 분위기의 맛을 느낄 줄 알다니

꽤 자질이 있어 보였다.

강하고, 성격 좋고, 술도 즐길 줄 알고.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동료로 키워(?)보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건 조금 쫄렸다.

'아무리 그래도 도산데 주당으로 만드는 건 좀..'

솔직히 지금도 조금 위태위태 하다.

만약 주변에 다른 화산파 도사가 있었다면 나보고 그녀를 타락(?)시켰다며 검을 뽑아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타락이라고 할 것 까진 아닌가.'

그냥 천기를 좀 다룰 줄 아는 점쟁이랑 같이 다니고 술까지 먹이는 게 뭐 얼마나 큰 죄라고.

우화등선 그거 그냥 안 하면 되잖아. 세상에 즐길게 얼마나 많은데.

-후룩

"한 잔 더 부탁하지."

"..나중에 저 탓하시면 안됩니다?"

"책임지라고 하면 되겠나?"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시죠."

"..무얼, 농담일세."

어딘가 아쉬워 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신 소저의 스승이나 친구랑 마주치게 되면 정말 곤란할 테니까.

"..."

잠시 어색한 분위기에서 애써 술을 목으로 떠넘기던 중 신 소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안휘에 가면 계획이 있나?"

"계획이요?"

"여행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특별히 정해진 목적지가 있냐고 물어본 거네."

"아. 일단 책자를 보고 계획을 세우긴 세웠습니다. 우선.."

그녀는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유명한 폭포나 강, 맛집 등 괜찮은 구경거리들을 그 위치를 최대한 고려해서 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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