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50)

[헤헤.. 이제 하나도 안 아픕니다 스승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진하고 어여쁜 외모의 소녀의 얼굴을 먹으로 칠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실수. 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죄악.

나의 무공과 별호까지 물려받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하나 뿐인 제자.

검화 한소연.

제자가 저지른 죄는 곧 스승인 나의 죄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찾아서 사과해야 했다.

"으으으.."

그 아이로 의심되는 사내 앞에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니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대의 이름이 단유성인가?'

의식을 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만약 아니라면 이번에도 그동안 수없이 있던 오해로 끝나겠지만

만약 맞다면..

만약 그가 내가 10년 동안 찾아 헤매던 내 죄악의 피해자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히 그런 상대에게 마음을 품어버린 거라면..

'..아니겠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역겨웠다.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분개할 일이거늘 만약 그게 나 자신이라면 절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거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그런 죄를 지어 놓고.

....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마, 마음을 품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마음을 품다니 아무리 귀엽고 순진한 짓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겨우 언변에 넘어갈 정도로 가벼운 여자는 아니지 않나 근데 그렇다고 얼굴을 밝힌다고 하면 그것도 좀 그렇고 애초에 반로환동을 했다고 해도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거늘 감히 이어지는 것을 하늘이 용서 하시는..

'으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동안 익힌 무공이 헛된 것은 아닌지 금방 머리를 진정 시킬 수 있었다.

'언제나 명경지수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거늘.'

이 사내를 만난 이후로 이러는 것 같다.

'하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한편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흐윽.."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이런 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데.."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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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루 아침에 이런 몸이 돼야 했던 건데.."

"..."

"가진 것도 다 잃어버리고.. 이런 세상에서 혼자.."

남의 잠꼬대를 귀 기울여 듣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미 귀에 들어온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이런 몸. 혼자.

이미 그와 단유성에게 겹치는 부분이 많아도 너무 나도 많은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하아.. 하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너무나도 많은 정황들이 그가 단유성과 동일 인물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을 들쳐볼 수 없을 뿐이지 거의 10할의 확률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한들 이토록 겹칠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그를 찾고 나면 바로 무릎부터 꿇고 사과할 계획이었다.

내가 그 아이의 스승이라고.

내가 당신의 인생을 망친 그 아이를 가르친 스승이라고.

그것이 빚을 갚기 이전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을 저지른 죄인은 마땅히 그 피해자에게 사과를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하아.. 하아..'

지금은 두려웠다.

내가 내 정체를 밝혔을 때. 나에게 순수한 호의를 보내오던 그 사내의 태도가 바뀔 까봐.

아니, 바뀌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무인의 단전을 부쉈다.

목숨보다 소중하고 부숴진 채로 산다고 해도 산다고 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어린 나이에.

만약 그가 스승이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동안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승을 만나기 전에 겪었을 고생까지도.

'끄윽..'

분명 각오한 일인데도 그가 나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가 나를 향해 혐오의 감정을 보내는 장면을 상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내게 순수한 호의를 보내주던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안된 사내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아 있었다.

그 순간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숨길까?'

어차피 그는 나의 신분을 모른다.

내가 검후라는 것도. 내가 소연이의 스승이라는 것도.

감추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

내가 먼저 고백하지만 않는다면 그가 그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이 짧은 상념이 스쳐간 순간

"우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정말 토사물이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역겨웠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정체를 숨긴다고?

그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그가 보내주는 감정을 계속 즐기고 싶어서?

그게 감히 도사로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저지른 죄가 있는 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

"허억.. 허억.."

요동치는 감정에 내공까지 통제를 잃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감정을 진정 시키지 않으면 주화입마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도저히 감정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감히.."

사람은 극한에 몰리면 악한 본성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동안은 그 말이 악인들의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이라도 그것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아.."

감히 내가 그들을 욕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감히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내가 겨우 이런 욕망도 조절하지 못하고 이런 역겨운 생각을 하는 위선자였단 말인가.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콰득

그동안 견고하다 생각했던 마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면 정말 주화입마가 찾아올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으응.."

-꼬옥

손에 힘이 풀리며 떨어졌던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잡아왔다.

잡는 것을 넘어서 두 손으로 내 팔을 당겨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어어.."

큰 힘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너져 있던 탓인지 이끌려서 그의 침대에 몸을 걸쳤다.

-꼬옥

"에헤헤.."

이제 그가 아예 내 팔을 감싸 안고 있었다.

"스승님 거긴 간지러워요.. 헤헤.."

'...'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의 모자 안에 집어넣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비하게도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제대로 있다는 듯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이히.."

장난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쓰담쓰담

말없이 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다가 그의 모자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약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들추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들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그도 깊게 자고 있으니 몰래 살짝 들어서 얼굴만 확인한 뒤에 다시 돌려놓으면 그도 모르지 않을까.

"...후우."

모자를 집었던 손을 다시 그의 머리에 올렸다.

가리고 다니는 데에 그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억지로 이러는 것은 실례일터.

'우선.. 안휘로 가자.'

그곳에서 기존에 의심된다는 사내부터 보자.

그 사내가 아니라면.. 그 다음에 물어보자.

그때 가서 만약 그가 단유성이 맞다면..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

* * *

무림맹은 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혈교의 교주는 물론 마지막 잔당까지 전부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무림맹이 내세운 말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대부분 혈교가 멸망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천마를 건드렸기 때문에.

사실 그동안 마교가, 천마가 중원을 향해 그 야욕을 드러내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늘 있는 일이었다. 잊혀질 만 하다 싶으면 마교의 세작이 잡혔다는 소식이나 마인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그런 마교에 변화가 생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기존의 천마를 찢어 죽이고 새로 그 자리에 올라간 자가 중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세작을 심어 놓은 것은 마교만이 아니었기에 이런 소식은 무림맹에도 전해졌지만 당연하게도 그 말을 순순히 믿을 그들이 아니었다.

분명 사악한 수작일 것이라 생각하고 세작에 더 공을 들였지만 어느 날 마교에 심어 놓은 모든 세작들이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그들에게 경고장이 날라왔다.

[관심을 가지지 말거라. 나 또한 그리할지니.]

발신인은 쓰여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경고문을 쓴 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겨우 저런 경고문 따위를 믿을 그들이 아니었지만 때마침 혈교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기에 그들은 모든 신경을 혈교를 상대하는데 쏟아부어야 했다.

결국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전투에서 마저 정파의 고수들이 하나하나 쓰러져가고 급하게 일시적인 동맹을 맺은 사파의 고수들도 전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그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한 위기의 순간에 그녀가 나타났다.

[그대가 혈마라는 자인가?]

그 수많던 혈교인도

웬만한 고수들도 상대하기 힘들었던 혈교의 강자들도

그리고 정파의 최고 고수였던 검후와 청뢰검을 혼자서 상대하면서도 승기를 보이던 혈교의 교주도.

그녀의 앞에선 범 앞의 하룻강아지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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