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50)

같이 있어주기로 해 놓고 하루만에 이렇게 혼자 두고 가버리다니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고 말 테다.

* * *

-타닥 타닥

깊은 산 속, 중원에서 보기 드문 금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있었다.

경국지색. 문자 그대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외모의 여인이 그 고운 손으로 직접 고기를 굽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의외로 여인의 솜씨는 상당했다.

마치 불이 그녀를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꽃이 절묘하게 온도를 조절하며 고기를 고르게 굽고 있었다.

"콜록.. 콜록.."

집 안에서는 여린 남성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됐겠구나."

-사악

여인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며 아주 자그마한 불씨만 남기고 사라졌다.

"자, 다 됐으니 먹거라."

여인이 다 구워진 고기를 그대로 누워있는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승님.. 환자한테 고기가 무슨 말입니까.."

"원래 원기 회복에 고기보다 좋은 것이 없느니라. 결국 병이라는 건 원기가 상해서 일어나는 일. 기운을 보충하는 것이 최고의 약이니라."

"그런 것 말고.. 죽 같은 건 없습니까? 지금 그런 건 삼키기도 힘듭니다.."

"이것이 아프다고 아주 스승을 제대로 부려 먹는구나."

여인이 한숨을 쉬더니 고기를 내려두고 아궁이로 향했다.

-화륵!

분명히 불씨도 남아있지 않았거늘 순식간에 새로운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탁!

"이제 됐느냐?"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여인은 김이 나는 죽을 가져왔다.

"..제가 손에 힘이 없.."

"먹여달라는 소리를 한다면 입에서 입으로 넘겨버릴 테니 이 이상 스승을 부려 먹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어도 먹어야죠."

힘겹게 숟가락을 든 소년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죽을 푸더라도 여기저기 흘릴게 물 보듯 뻔했다.

"하아.. 그냥 내놓거라."

"제가 먹을 수 있.."

"그냥 너를 이대로 두는 게 더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니라. 이 건방진 녀석."

여인이 소년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들고 죽을 푼 뒤 후후 불고 소년의 입으로 넣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 할 시간에 그냥 자기나 하거라. 네놈이 빨리 낫는 게 더 도와주는 일이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제가.."

-쿨..

소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허약한 녀석. 그것도 못 버텨서 병이나 들다니."

여인은 한참 동안 잠든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불을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뜨는 달은 상현.

어쩌면 그 약초가 필지도 모른다.

몸이 점점 더 아파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은 더 아파왔고 마른 기침에서 피맛이 섞여 나왔다.

갈증 때문에 미칠 것 같았지만 도저히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목만 아픈 거면 모르겠지만 머리도 아프고 기침도 멈추지 않는 데다 혼자 있으니까 고독함까지 더해져서 더 서러웠다.

"켈록.. 케헥.."

'죽을 것 같아..'

정말 이 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겨우 감기 때문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몸이라니

아무리 단전이 없다지만 이렇게 까지 상태가 안 좋은 게 말이 되나 싶다.

'이것마저 오히려 나아진 편이긴 하지만..'

정말 영문도 모르고 이 몸에 막 들어왔을 때는 더 심각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고통이 올라오고 가끔씩 엄청난 고통이 몰려와 그 자리에서 낑낑대기만 한 기억도 한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부랑배들이 약값을 미끼로 더러운 일을 제안할 정도였을까.

"콜록.."

아프니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딱히 생각하고 싶은 기억은 아닌데.

누구든 좋으니까 좀 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간호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좋겠다.

아플 때는 그것 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

.

.

"으으.."

이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올라왔다.

"스승님..?"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만."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스승님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까.

"소저입니까..?"

"미안하네. 워낙 급한 일이라 좀 늦었군. 이렇게 아파서 쓰러져 있을 정도일 줄은 몰랐네."

"뭐.. 소저한테도 소저의 일이 있을.. 켈록! 커헉!"

기침에 의해 말이 끊기자 여인이 급하게 채워진 물병을 내밀었다.

입을 막으며 물병을 받아 들었지만

-파들파들

대체 얼마나 힘이 없는 건지 물병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대신 먹여 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입구를 입에 물고 물을 흘려 넣었다.

"파하.."

'이제 좀 살겠다.'

감기 때문에 물을 마셔도 갈증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면.. 이제 소저가 하던 일은 끝난 겁니까?"

"일단은 그렇게 됐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오려고 했는데 늦어서 미안하네."

"괜찮아요.. 소저가 저를 간호해줄 의무는 없잖아요.. 소저도 소저의 일이 있으니까.."

최근 많이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남남이다.

그녀가 자신의 일을 미뤄가면서 까지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었다.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나?"

"진짜 괜찮다니까.."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러네."

이 사람은 정말 생긴 건 예쁘게 생겼는데 사고방식이 은근 나이 많은 사람 같다.

말투도 그렇고.

"그러면.. 안휘에서 소저가 할 일이 끝난 뒤에 같이 놀러 다녀 주세요. 그때는 혼자 두지 말고."

내가 지금 그녀에게 원하는 건 이것 뿐이었다.

몸 상태를 보니 하루 이틀 만에 나을 것 같지가 않다.

하남에서 세웠던 계획은 속으로 다 폐기한지 오래였고 이제 남은 건 안휘에서 노는 것 뿐이었다.

하남에서 못 뽑은 뽕까지 뽑아서.

"...그거면 되나?"

"네.. 이거면 돼요.."

"그것보다 더 요구해도 되네. 돈이라던가, 물건이라던가.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으니."

힙겹게 고개를 들어서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 얼굴이다.

많아봐야 20대 중반인 외모인데 저렇게 자신 만만한 걸 보면 뒤에 대단한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저 나이에 절정이면 그 스승도 엄청 대단한 사람일 게 뻔하다.

"..괜찮습니다. 저는 소저면 충분해요."

그런 대단한 사람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이 여인이 특이한 거지 보통 도사들은 나랑 잘 맞지 않으니까.

"..."

"왜 그러십니까..?"

"후우.."

여인이 한 손으로는 심장을 두드리고 한 손은 부채로 삼아 얼굴에 부치고 있었다.

"알겠네. 안휘에서 볼일만 끝나면 같이 다니기로 하지."

"네에.."

그 대화를 뒤 이어진 침묵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저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는군."

"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알려줄 수 있나?"

보통 사람들이라면 딱히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긴 하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이름은 숨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그런 보통의 경우가 아니었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신비감 조성이라고 해야 하나

기껏 얼굴을 감춰 놨는데 이름이 알려지면 신분 특정도 되고 신비감도 줄어든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비감으로 먹고 사는 점쟁이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내가 섬서에서 장사하는 동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점쟁이가 봐주는 미래' 라는 분위기에 끌려온 손님들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기껏 얼굴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수단을 두고 나를 특정할 수 있게 이름을 알리는 것도 조금 아깝다.

'혹시 스승님이 쫓아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나오시려면 멀었지만 가끔 스승님이 예정보다 빨리 나와서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꿈을 꾸고는 한다.

아마 그렇게 잡히면 앞으로 평생 산 속에서 살아야겠지.

"나는 신유월이라고 하네."

"..예쁜 이름이네요."

"..."

유월 소저가 내 반응을 보려는 건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네. 그리고 밖에서는 신 소저라고 부르면 되네."

"알겠습니다 신 소저.."

다시 몰려오는 졸음기에 몸을 맡기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콜록.. 콜록.."

그의 기침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몸에서 나는 열도 점점 뜨거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갈증을 호소할 때마다 물을 넘겨주거나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는 것 뿐이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마가 있는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무력하구나."

무공을 익히다가 벽에 막힌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지만

감기에 심하게 걸려 고통을 호소하는 이를 간호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공을 익혔다면 대부분 이런 잔병에는 걸리지도 않고 만약 병에 걸리더라도 적당한 영약만 구해다 주면 금방 나을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들고 다니는 영약도 이런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단전이 망가진 자에게 함부로 영약을 먹였다가는 오히려 큰 화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후우..."

꺼내오기 싫었지만 지금은 옛날의 기억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고 있던 제자의 기억이었지만 남을 간호해본 적 있는 기억이 그때밖에 없었으니까.

-꼬옥

우선 손을 잡았다.

당시에 듣기로는 원래 병이란 마음 먹기에 따라 잔병이 될 수도, 죽을 병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결국 병을 이겨내는 것은 몸이겠지만 그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니.

[아직도 아프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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