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50)

그 괴인과 같은 붉은 눈에 서둘러 사내에게서 물러났다.

'이 무슨?!'

아무리 혈교가 그 세력이 강대하다고 하지만 겨우 상대를 무는 것 만으로 이런 상태로 만드는 능력은 없었다.

진작에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아예 중원을 집어삼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다르다. 그때 그 혈교가 아니다.'

느낌은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중원의 기술이 아니야.'

아무리 혈교의 술법이 사이하고 요상하다고 한들 이건 그 궤를 달리했다.

'새외무림의 주술인가?'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괴이한 현상의 원인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무리 혈교의 술법에 당했다고 한들 방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자들.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해야 한다.

"괴인에게 물린 자들에게서 떨어지게!!"

"크아아악!!!"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 * *

"젠장.. 그 괴물 같은 여자는 또 뭐야. 최소 소드마스터 급이잖아."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 그리고 세로로 된 동공을 가진 남자가 혼란을 틈타 아무도 없는 선박의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강화된 권속이 제대로 만들어 졌나 시험 좀 해보려 했더니.. 아까운 재료만 낭비했어. 이래서야 주인님을 제대로 볼 면목이.."

그가 한숨을 쉬며 몸에 두른 검은색 망토를 휘두르더니 금방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박쥐 한 마리가 나타나 그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세상이냐고. 왜 소드마스터가 부하들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그리고 그 순간

-피잉!

"우왁?!"

검이 날아와 그의 날개를 노렸으나 간신히 그 끝을 스치고 피하는데 성공했다.

박쥐로 변한 사내가 검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검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라잉 소드?!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사내에겐 다행히도 검이 다시 사내를 노리는 일은 없었다.

감염자들을 제압한 뒤에도 혼란스러운 선박의 상황을 잠재우기 위해 뒤를 돈 여인의 검집에 자연스럽게 들어갔을 뿐.

'젠장젠장젠장젠장. 빨리 연구소로 돌아가야겠어.'

사내는 이를 갈며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기회인데. 또 패배할 수는 없다고!'

전날의 참패를 떠올리면서.

"어떻게든 정리가 됐군."

괴인에게 물려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제압했다.

아무리 혈교의 술법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한들 방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자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건 시간이 조금 걸릴 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인..? 이제 저 자들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배가 땅에 닿고 나면 무림맹 쪽으로 연락을 해보지. 그때까지는 저대로 묶어 놓게. 혹시 몸에 문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밧줄로 단단히 묶어 놓긴 했지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대비해 마저 그들을 감시하고 있기로 했다.

아쉽게도 이 선박에 무공을 익힌 자는 따로 없어 보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 저기.. 대인 아주머니.."

"얘?! 지금 얘가 무슨.."

"응?"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한 여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저희 아빠는.. 무사 할까요?"

아직 10세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는 내가 아까 괴인을 제압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무사할거란다."

"저, 정말요?"

"내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느냐. 책임지고 너와 네 어미 곁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그동안 말이나 잘 듣고 있거라."

"가, 감사합니다!"

아이가 여인의 품에 안겨 돌아갔다.

'후..'

이렇게 무책임한 약속을 하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전쟁터에서는 이런 지켜질 자신 없는, 무책임한 약속을 하는 이들이 수두룩 했다.

꼭 돌아오겠다느니, 동료를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다느니, 싸움이 끝나면 술 한잔 하자느니.

결국 지켜진 약속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혈교..'

20년 전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감히 다시 돌아왔느냐.

-까득

분명 그날 천마에 의해 전부 괴멸 당했다고 생각했거늘 정말 끈질기게 그녀에게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모양이다.

비록 전날에는 무기력하게 당했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

이번 만큼은 내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리라.

'..그런데 뭔가 까먹은 느낌이 드는군.'

갑자기 워낙 큰 일들이 닥쳐서 생각할 일이 많았다.

그 전에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

그를 혼자 창고에 두고 올라왔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그가 올라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선박 위로 시선을 훑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게! 여기 칼은 맡길 테니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크게 소리를 지르게! 금방 올 테니!"

"예, 예?!"

서둘러 그가 있던 창고로 내려갔다.

괴인은 전부 처리했으니 그가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어째서 인지 빨리 내려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했다.

-벌컥!

"무사히 있나?!"

급하게 문을 열자 창고 구석에서 몸을 말고 덜덜 떨고 있는 생명체가 보였다.

-덜덜덜덜

"...소저입니까?"

"..그대는 지금 그게 무슨.."

-와락!

그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내게 안겨왔다.

"소저죠? 소저 맞죠? 다른 사람 아니죠?"

"자, 잠깐만 너무 달라붙으면.."

"금방 온다면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면 어떻게 해요..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게 달라붙은 그의 망토 너머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 어서 떨어지게!"

"놓으면 또 혼자 두고 올라갈 거잖아요!"

"아니네! 다 끝났네! 이제 안전 하니까!"

'그러니까 좀 떨어지게! '

손에 깍지까지 껴가면서 내게 달라붙은 그를 억지로 떨어트렸다.

이대로면 서로 민망한 상황만 될 뿐이니.

"..이제 정말 안전해요?"

"그, 그래. 날뛰던 괴인은 제압했으니 이제 육지로 돌아갈 차례네."

물에 젖었었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까 달라붙었을 때 느꼈던 감촉이 다시 떠올랐다.

'저, 정신 차리거라. 너는 도사다. 도사가 이런 발칙한 생각은..'

"그러면 마침 옷도 거의 다 마른 것 같으니 갈아입고 올라가죠."

"응? 아, 알았네. 잠시 나가있지."

다시 창고의 문을 닫고 뒤늦게 사춘기라도 맞이한 건지 날뛰고 있는 상상의 무리들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감도 최대한 억눌렀다.

이대로 기감을 펼쳤다간 그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까지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두근두근두근두근

'대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폐관수련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대인관게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정신 차려라. 지금은 겨우 이런 것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마교도 신경 써야 하고 당장 나타난 혈교의 흔적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당초 나온 목적이었던 그 아이로 추정되는 자도 찾으러 가봐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란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거리를 둬야..'

-끼익

"아직 조금 젖긴 했지만 입을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자, 가죠. 우리만 위에 없으면 괜히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어느새 제대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가지."

그를 따라 걸으며 속으로 그와 거리를 둬야겠다는 소리를 되새기며 그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갈 무렵,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가급적이면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무섭거든요."

-툭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질 뻔했다.

"후우.."

정말 위험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뻔 했다.

지금도 안 그래도 위험한데 방심했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저지르..

"그래도 소저한테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우화등선은 그른 것 같다.

* * *

"콜록.. 콜록.."

아, 그냥 젖은 옷 입지 말걸.

나는 지금 방 안에서 혼자 몸져 누워있었다.

소저는 어제 선박에서 내린 뒤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거짓말쟁이..'

금방 돌아온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믿어도 될까 싶다.

하남에 머무르기로 한 날이 이제 이틀 남았는데 이렇게 몸져 누워버리니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어지러워..'

그렇다고 몸 상태를 무시하고 밖으로 놀러 다닐 수 있는 상태는 도저히 아니었다.

다시 타오를듯 올라오는 갈증에 힘겹게 물병을 집어 들었지만

-쪼륵

"콜록.."

물까지 다 떨어졌다.

이래서 혼자 있기 싫었다.

'진짜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놈.'

몸은 약하지, 단전도 없어서 강해질 가능성도 없지, 그나마 쓸 수 있는 미래를 보는 능력도 자기 자신의 미래는 보지 못하지.

정말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켈록.."

생각해보면 영문도 모르고 이런 세계로 떨어진 이후로 혼자 있던 시절은 거의 없었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는 혼자였긴 했지만 스승님을 만난 이후엔 10년 동안 함께 있었고

스승님이 폐관수련에 들어가시고 도망치듯 나온 뒤에도 섬서에서는 당아영과 함께 지냈었다.

그리고 어제의 일과 지금 상황이 되니까 알 수 있었다.

'나 혼자 있는 걸 싫어했구나.'

스승님이 폐관수련에 들어가시자 마자 도망치듯 나온 데에는 앞으로 3년 동안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내게 이 세상에서 혼자 있던 시절의 기억은 끔찍한 기억밖에 없었으니까.

"콜록.."

'그래서 이 사람은 언제와..!'

죽을병 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아픈데 혼자 있으니까 더 서럽고 아팠다.

'안휘에 가기만 해봐.. 볼일만 끝나면 꼭 붙어 다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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