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의 몸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는 그 상처를 보고 저를 떠올리겠지요.]
"우욱.."
차마 이해할 수 없는 광기어린 집착이었다.
아무리 그 경지가 낮다고 한들 무인에게 단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아이가 아닐텐데 그것을 고작 그런 이유로 파괴해 버리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대부분의 무인들은 단전이 파괴되면 폐인이 되기 마련이다.
그동안 쌓은 무공을 전부 잃고 앞으로도 익힐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 몸의 기운이 뭉쳐있는 곳이 붕괴되며 발생하는 신체적인 고통.
괜히 무인에게 단전을 파괴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이렇게 계속 찾아다니고 있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는 걸.
"..."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옆에도 있지 않은가. 단전이 망가진 상태로도 다른 방법으로 자신만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인물이.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했군.'
아무리 별호가 있다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 이름을 밝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따로 숨기는 이유가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없다면 대화의 편의를 위해서 이름 정도는 서로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똑똑
"소저, 안에 계십니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머리 빗겨드리러 왔습니다."
......응?
"자, 자. 말하지 않았습니까. 할 수 있는 수는 전부 해보자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겨우 머리카락에.."
"그 겨우 머리카락을 목숨 걸고 관리하는 여자들이 세상에 수두룩 합니다 소저. 무시하지 마시죠."
그는 빗과 이상한 약을 손에 든 채로 기어코 나를 의자에 앉혔다.
"평소엔 머리카락 정리를 얼마나 하십니까?"
"..전혀."
"그런 것 치고는 상태가 정말 좋네요. 이것도 무공의 효과입니까? 부럽군요."
일부 무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무공은 어느 정도 경지가 오르다 보면 몸의 노폐물을 없애고 신체의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몇몇 좋은 집안 규수들은 그걸 목적으로 삼류 무공이라도 익힌다는 소문이 있는데 실제로 효과를 봤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약은 뭔가?"
"머릿결을 좋게 해주는 일종의 기름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서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면 그냥.."
"그래도 그 자체로도 미용의 효과가 있으니 그것 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할 겁니다."
-쭈욱
등 뒤에서 액체의 소리가 들렸다.
-스윽
약을 바른 빗이 내 머리카락을 쓸기 시작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오묘한 감각에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원래 그렇게 여인에게 상냥한가?"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게."
이 사내는 이성이란 존재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
보통 사내들이라면 어제와 같은 선물과 칭찬의 공세나 이런 신체적 접촉을 대놓고 하지는 않을텐데 고도의 노림수인 건지 아니면 정말 순진한 건지 너무 거리낌이 없다.
-두근 두근
'하아..'
괜히 이쪽에서 오해할 정도로.
그렇다고 뭐라고 하기에는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아서 크게 거절하거나 나무랄 수도 없다.
차라리 그냥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여인에게 친절한 성격이라면 착한 청년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딱히 여인이라고 전부 상냥하게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상냥하게 대하는 거지."
"..후우.."
저런 태도가 오히려 문제다.
저렇게 순진한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돌을 던지는데 이쪽에선 너무 뼈아프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 마음을 대놓고 표현이라도 하는 상대라면 모를까 저렇게 애매한 태도로 다가오니 확신이 없어 제대로 대처를 하기도 힘들다.
괜히 단호하게 내쳤다가 내 오해였다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스윽
"혹시 아프진 않습니까?"
"..괜찮으니 걱정 말게."
"다행히 실력이 아직 녹슬진 않았나 봅니다."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을 나무라며 다시 빗질을 시작한 그의 말에서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실력이 녹슬어..?'
최소한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설마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었다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혹시 현재 인연을 맺고 있는 여인이 있나?"
다른 여인의 머리카락도 빗어본 적 있다는 결론이 된다.
설마 남성의 머리카락을 약까지 발라가며 빗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하하, 그런 것 없습니다. 스승님의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분도 소저만큼 머리카락이 길었거든요."
"..아. 그런 얘기였나."
"예. 그때는 식물에서 기름을 짜냈었는데 다행히 시장에도 비슷한 약이 있더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산 속에서 10년 동안 수련 했다고 했다.
확실히 혼자서 지내진 않았을 거다.
"그러면 속세에 다른 여인은 없나? 듣기로는 섬서에서 지낸 지 꽤 됐다고 하던데 그동안 연이 닿은 여인이 설마 아예 없지는 않을 테고."
"제 여인 관계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건 그대가..!"
"뭐, 왜 궁금해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시다면 알려 드려야죠. 없습니다."
"...정말인가?"
"뭐.. 점집을 차리는데 도움을 받은 여인이 있긴 하지만 그냥 친우죠. 아마 그 소저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스윽
"흐흠.."
여인 관계가 복잡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매일 밤마다 주점에서 술과 노름을 즐기다보니 저를 그런 쪽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더군요. 딱히 여인을 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과거 믿었던 여인에게 배신당했었다는걸.
-꾸욱
'..그런 사내에게 마음을 품으려 했단 말인가.'
여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자다.
이제 와서 여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는 않겠지.
'후우..'
차가워진 머리로 거세게 뛰고 있던 심장을 진정 시켰다.
"...미안하네."
이걸로 잠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나도, 그에게도 서로의 사정이 있는데 괜히 서로 곤란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여기서 깔끔하게 정리..
"딱히 소저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응?"
"소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사과하십니까? 잘못한 건 그 여자지 소저가 아닙니다."
"..."
정말 끝까지 배려심 깊은 사내였다.
그래도 이제 마음을 다잡은 덕분에 지금까지처럼 흔들릴 일은 없었다.
-스윽
지금 이 일도 그가 봐준 내 점을 통해서 미래를 대비하려고 하는 일일 뿐 그가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있다면 그저 순수한 호의겠지.
'훗.'
그러니까 그냥 오랜만에 나온 속세의 작은 인연으로 남겨 두는..
"뭐, 인생이란 즐기기에도 짧은 것인데 그런 상처를 평생 안고 사는 것은 미련한 일이겠죠. 원래 사람은 상처로부터 배우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말입니다 소저."
"......"
남겨 두는..
"사람에게서 얻은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치유하는 법입니다."
"......."
'으으으으...'
-두근 두근 두근
간신히 가라앉힌 심장이 아까보다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 *
'어휴 까먹고 있었네.'
나도 내가 변명하고 까먹고 있었다.
여자한테 배신 당해서 그 아픔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는 설정이었지.
갑자기 사과해서 뭔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변명을 했던 게 떠올라 급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상처는 괜히 회복한다고 말했나?'
괜히 어색한 관계가 되면 따라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괜찮다고 안심 시켜 주려고 한 말인데 생각해 보니까 조금 위험했다.
정말 다 회복됐으면 술을 마시는 변명 거리가 없어지니까.
'아, 그냥 습관으로 굳어졌다고 하자.'
이쪽 세상에도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인식이 퍼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술이 없으면 못살겠다는데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스윽
어느새 빗질이 다 끝나갔다.
확실히 효과가 없지는 않은 게 머리카락에서 더 윤이 나는 게 고급 비단 부럽지 않아 보인다.
'눈 안부셔서 좋네.'
스승님은 머리카락이 황금색이라 햇빛 아래에 있으면 가끔씩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바깥 세상에 나오고 나서 보니까 금발이 중원에 절대 흔한 게 아니다.
'서양 사람인가? 아니면 혼혈?'
몸매를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도 꽤 높아 보이긴 하는데..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은 없는 사람.
나는 내 삶을 즐길 거다.
"자, 끝났습니다. 여기 면경입니다."
어째서 인지 심장 부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여인에게 거울을 건넸다.
거울을 건네면서 본 여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얼굴이 붉습니다."
"아니네.. 괜찮으니까.. 조금만 떨어져서.."
'진짜 어디 아픈가?'
얼굴이 완전 빨갛다.
절정 고수쯤 돼서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다른 종류의 병일지도 모르겠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오늘은 방에서 쉬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정말 아픈 것은 아니라네.. 그냥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라면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나 약한 부분은 있는 법이니까요. 소저가 강한 것은 제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대 때문에..!"
"네?"
"아, 아니네. 신경 쓰지 말게."
계속 횡설수설 하는 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면 저는 옆 방에 있을 테니까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거리낌 없이 불러주세요. 스승님 덕분에 아픈 사람 수발을 드는 건 자신 있습니다."
'손 발 하나 까딱 안 하는 게 아픈 거랑 똑같지 뭐.'
그렇게 말하고 방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잠깐."